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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사력 Sep 04. 2024

시대를 잘못 만난 '비운의 주인공들'

(조선의 천재 송익필·송한필 형제의 파란만장한 삶)

     



              望月


未圓常恨就圓遲(미원상한취원지)

 보름달이 될 때까지는 하도 더디다 했는데


圓後如何易就虧(원후여하이취휴)

보름달이 되어서는 어찌 그리도 쉬이 이지러지는가


三十夜中圓一夜(삼십야중원일야)

한 달 중에 둥근 날은 하루 밤인 것을


百年心思總如斯(백년심사총여사)

 백 년의 인생사도 모두 이와 같으리

                                                   (龜峯 송익필 作)  






                  遇吟


花開昨夜雨(화개작야우)  

어젯밤 비에 꽃이 피더니  

        

花落今朝風(화락금조풍)  

오늘 아침 바람에 꽃이 지는구나 

    

可憐一春事(가련일춘사)  

가련하다 한낱 봄날의 일이여


往來風雨中(왕래풍우중)  

비바람 속에 오고 가는구나

                                    (雲谷 송한필 作)




얼녀의 자손    

위 칠언절구(七言絶句)와 오언절구(五言絶句)의 한시(漢詩)는 조선 시대 성리학의 거두로 평가받는 송익필(龜峰, 1534~1599)과 그의 동생 송한필(雲谷, 1539년~?)이 지은 것이다. 두 편 모두 권력무상과 인생 부침의 회한(悔限)을 자연에 빗대 절절하게 표현한 것이다. 송익필·송한필 형제는 관상감 판관(종 5품)인 송사련(1496~1575)과 어머니 연일 정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송사련의 어머니 감정(甘丁)은 성균관 사예(정 4품)를 지낸 안돈후와 비첩 중금(重今)의 딸이다. 조선 시대 양반이 양인 첩에게 얻은 자식은 서자녀이고 천인 첩에게 얻은 자식은 얼자녀이다. 따라서 송사련의 어머니 감정은 안돈후의 얼녀가 된다.

 

역모 고변과 패륜             

안돈후는 얼녀인 감정 외에도 정실 자식으로 안당이 있었는데 안당은 중종 때 호조와 이조판서를 거친 후 조선 시대 최고 관직으로 일컫는 우의정과 좌의정을 역임했다. 따라서 좌의정 안당은 감정과 이복 남매로 송사련의 외삼촌이 되고, 안당의 아들 안처겸·안처함·안처근은 송사련의 외사촌이 된다. 안당은 생질인 송사련의 재주를 아껴 면천시키고 관직에 추천해서 관상감 판관에 이르게 했다. 이처럼 외삼촌 안당의 두터운 은혜에도 불구하고 송사련은 자신의 가계가 서얼 출신이라는 열등감을 가졌으며 중종 때 조광조 등이 발의한 현량과(관리 추천제)를 통해 입신양명한 외사촌 형제들을 부러워하고 시기했다. 한편으로는 서얼 출신이 높은 벼슬을 할 수 없었던 당시의 시대적 배경도 송사련이 뒤틀린 마음을 가졌을 것이라고 짐작된다. 그래도 송사련이 자신의 신분 상승과 출세를 위해 많은 은덕을 베푼 외가를 역모로 엮어 멸문의 사지로 몰아넣은 것은 인면수심의 패륜이나 마찬가지라 할 것이다.

 

멸문과 부귀영화      

1521년(중종 16) 송사련이 고변한 신사무옥의 과정을 살펴보면 참담하기 그지없다. 즉 1519년(중종 14) 기묘사화가 일어나 조광조를 비롯한 사림파가 숙청될 때, 조광조를 후원하던 좌의정 안당 또한 정치적 위기에 처해졌다. 결국 안당은 파직되고 낙향했지만 안당의 아들 안처겸·안처근 형제는 조광조를 죽음으로 내몬 기묘사화의 주역 남곤과 심정 등이 아버지와 자신들에게도 위해를 가할 것이라는 위기감을 느끼고 주변에 이런저런 불평을 토로했다. 이때 외사촌들의 대화를 엿들은 송사련이 역모죄로 이들을 고발했다. 그 결과 안당과 두 아들은 사형당하고(둘째 안처함은 직접 관련이 없어 죽음을 면하고 청도로 유배됐다가 이듬해 사면) 집안은 멸문됐으며, 재산과 노비는 송사련이 차지하게 됐다. 또한 송사련은 역모 고변에 대한 공으로 선조대에 이르기까지 네 임금(중종, 인종, 명종, 선조)을 섬기면서 벼슬이 당상관(정 3품) 절충장군과 시위대장 등에 올랐다. 송사련은 자신에게 한없는 은덕을 베푼 외삼촌 안당의 집안을 역모로 고변해 가문을 도륙하고 그 대가로 부귀영화를 누리게 됐으니 그야말로 배은망덕과 인면수심의 표본이 아닐 수 없다.   


군계일학의 천재    

송사련은 여든 살로 죽을 때까지 양반으로 부귀영화를 누렸지만 신분과 도리를 중시하는 선비와 유생들은 그를 노골적으로 경멸하고 등을 돌렸다. 명종 때 사림이 다시 집권하면서 그 화는 송익필 형제들에게 고스란히 되돌아왔다. 아버지 송사련이 안처겸 형제의 역모를 고변한 공으로 공신에 책봉되고 양반이 됐기에 송익필 형제들은 어릴 적 유복한 환경에서 교육을 받았다. 특히 송익필은 일곱 살 무렵부터 뛰어난 문재(文才)를 드러낼 정도로 천재적인 재능을 보였다. 송익필은 스승도 없이(아버지 송사련의 패륜적 역모 고변에 대한 선비들의 기피로 스승을 구하기 어려움) 독학으로 성리학을 익혔으나 뛰어난 재능으로 학문의 경지가 대단해서 다양한 이들과 교유할 수 있었다. 이십 대에 들어서면서 송익필은 율곡 이이, 우계 성혼 등을 만나 깊은 친분을 쌓았고, 이들은 신분을 초월해 친구의 예로 서로를 예우하며 친교를 이어갔다. 또한 이산해, 최경창, 윤탁연, 정철, 조현, 윤두수, 윤근수, 하응림 등도 송익필의 명성을 듣고 찾아와 친구가 되었다. 토정 이지함도 송익필을 찾아보고는 그의 뛰어난 학문과 재능을 칭찬해 "구봉 같은 이를 스승으로 삼으면 성현에 가까울 것"이라고 높이면서 친히 시를 써주기도 했다. 


학문 연구와 제자 양성           

1558년(명종 24) 송익필·송한필 형제는 초시에 함께 합격했다. 그러나 그들 형제의 초시 답안지가 세간에 알려지자 사관 등은 상소를 올려 “송사련은 예의를 저버린 죄인이니 그 공훈을 없애고, 그 자식들 역시 얼손(孼孫)이니 과거에 나아감은 부당하다”라고 규탄했다. 더욱이 그들 형제의 대과 응시를 정지시키고 초시 합격까지 박탈해 벼슬길을 아예 막아버렸다. 벼슬길이 막힌 송익필은 경기도 고양 구봉산(龜峰山) 아래 은거하며 학문 연구와 제자 양성에 전념했다. 그의 호인 구봉(龜峰)은 이 산의 이름을 딴 것이다. 송익필의 제자 중 김장생은 이이의 제자이기도 했는데 송익필에게 예학(禮學)을 전수받아 이후 조선 최고의 예학자가 됐다. 송익필이 후학을 양성하는 동안 인근에 살던 이이와 성혼을 만나서 토론하거나 서신을 주고받으며 성리학의 이치와 도리를 탐구했는데, 대체로 이이와 성혼이 묻고 송익필이 답하는 식이었다. 그만큼 송익필의 학문과 철학의 경지가 대단했다. 하물며 율곡 이이는 송익필을 가리켜 "스승은 될지언정 친구라고는 할 수 없다(師可不可友)"라고 할 만큼 송익필의 학문을 높이 평가했다. 이처럼 송익필은 성리학, 예학, 경학, 문장(선조 때 8대 문장가: 송익필, 이이, 최립, 백광훈, 윤탁연, 이산해, 이순인, 하응림, 시(조선의 산림삼걸: 송익필, 김시습, 남효온), 서예에 모두 통달했다.    


노비환천과 피신         

송익필이 마흔두 살 되던 1575년(선조 8) 아버지 송사련이 사망했다. 송사련 사망 이후 신사무옥 때 살아남아 그때까지 숨어 살던 안당의 증손자 안로(安璐)의 처 윤 씨가 신원 상소를 올렸고, 결국 신사무옥이 송사련의 무고임이 밝혀져 안당과 세 아들, 손자들이 모두 복권됐다. 이에 반해 모함에 의해 안당 가문을 파멸시킨 송사련에 대해서는 비난 여론이 거세게 일어났다. 그들 형제도 반박하는 상소로 싸웠으나, 결국 패하여 아버지 송사련의 관작이 삭탈되고, 안씨 일족에 의해 송사련의 무덤이 파헤쳐지고 시신이 크게 훼손되는 변을 당했다. 이 과정에서 이이와 성혼은 아버지의 잘못을 아들에게까지 적용하는 것은 무리하다고 변호했으나 안당의 후손들은 송익필·송한필 형제를 계속 공격했고 변호해 주던 율곡 이이의 죽음(1584년)은 그들에게 큰 타격을 주었다. "2대 이상 양인(조부 송인과 부친 송사련이 관리로 봉직)으로 지내면 면천한다"는 규정조차 적용되지 않고, 또한 안씨 집안이 가지고 있던 속량문서도 사라지면서, 1586년(선조 19) "송익필 집안을 안씨 가문의 노비로 환천한다"는 판결이 내려졌다. 이에 송익필 집안 70여 명은 피맺힌 복수심에 철저히 보복하려는 안씨 집안을 피해 각지로 피신하며 흩어져 살아야 했다. 안씨 집안은 노비를 잡는 추노꾼까지 각지로 보내 송익필 집안을 샅샅이 추적했다. 송익필은 성혼과 김계휘 등이 피난처를 주선해 주어 여기저기 옮겨 다녔다. 특히 김계휘의 동생이자 제자 김장생의 숙부인 김은휘는 자신의 집에 송익필과 송한필 가족까지 숨겨주기도 했다. 


산골 은거      

이후 송익필·송한필 형제는 조정에 자수하여 1591년(선조 24) 1월 탄핵을 받고 평안도 희천으로 유배됐다가 명천으로 옮겼다. 송익필은 “형은 동녘 산으로/ 아우는 서쪽 바다로/ 갈림길에서 차마 울지도 못한다” 는 시를 비롯해 유배지에서 450여 수의 시를 남겼다. 1592년(선조 25) 4월 임진왜란이 터지고 1593년 9월 두 형제는 석방됐다. 유배에서 풀려났지만, 송익필·송한필 형제에 대한 안씨 집안의 공격이 계속되므로 그들은 여러 곳으로 숨어 다녀야 했다. 송익필은 만년에 정해진 주거지를 얻지 못하고 여기저기를 떠돌다 1596년(선조 29) 김진려의 도움으로 충청도 당진의 산골에 오게 된다. 예순세 살 때이다. 


비운의 주인공들    

송익필의 은거 소식을 들은 젊은 선비들이 송익필의 가르침을 받기 위해 그의 은거지로 모여들었다. 송익필은 여기에서 주자의 가례(家禮)를 보충 설명하고 주석을 단 ‘가례주설(家禮註說)’을 짓고, 이이, 성혼, 정철, 윤두수 등과 학문에 대한 견해를 주고받은 글들을 묶어 '현승편(玄繩編)'을 엮었다. 송익필의 사후 서자(庶子) 송취대가 송익필, 이이, 성혼이 주고받은 글들을 따로 모아 '삼현수간(三賢手簡)'을 편찬했다. 1599년(선조 32) 8월, 송익필은 당진의 주거지에서 예순여섯 살에 사망했다. 반면 동생인 송한필은 1593년 9월 유배지에서 풀려난 후 행적이 알려지지 않고 있다. 송한필의 한시에서 보듯 권력무상과 인생 부침에 대한 회한으로 세상의 모든 인연을 끊었거나 계속 추적한 안씨 집안에게 화를 입은 듯하다. 송익필·송한필 형제는 아버지 송사련의 업보와 신분(서얼) 차별에 대한 시대적 한계로 천재적인 재능을 제대로 살리지 못하고 고단한 인생을 살다 갔다. 이처럼 송익필·송한필 형제는 시대를 잘못 만나 파란만장한 삶을 살다 간 비운의 주인공들이라 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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