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도자의 무능과 오판이 빚은 비극의 역사)
잉카제국은 1438년부터 1533년까지 95년 동안 남아메리카 일대를 다스린 대제국이다. 현재의 페루, 에콰도르 서부, 볼리비아 남서부, 칠레, 아르헨티나 북서부, 콜롬비아 남서부 등 총 6개국에 걸친 광대한 영토를 통치했다. 즉 1492년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에 도착하기 이전의 남북 아메리카 전역에서 가장 거대한 제국으로 남아메리카의 태평양 연안 대부분을 다스렸다.
(잉카제국의 요새 마추픽추)
한때 강대했던 잉카제국도 우아이나 카팍 황제가 천연두로 사망한 후, 점차로 세력이 쇠퇴하기 시작했다. 즉 두 아들 간에 치열한 제위 다툼이 일어났고, 동생인 아타우알파가 승리해 제위를 이었지만, 내전 때 상방 원한이 깊었고 정예 병력들도 많이 소모됐다. 이 무렵인 1530년, 에스파냐 하급 군인 출신인 프란시스코 피사로(1476~1541)가 이끄는 168명의 원정대가 잉카제국에 도착해 황제 접견을 요청했으나, 내전 수습에 골몰하던 황제 아타우알파는 접견을 거절했다. 그런데 1532년 가을, 아타우알파가 내전을 종식하고 잉카의 북부 도시 카하마르카에 머물고 있을 때, 피사로 원정대도 부근에 있었는데, 황제 '아타우알파'가 백인에 대한 호기심 등으로 접견을 허락했다. 당시 남미 대륙은 말이 없어 잉카인들은 꼬리가 길고 육중한 동물인 말을 데리고 다니던 피사로 원정대를 신기하게 바라봤다. 다른 한편으로는 거대한 말의 덩치에 위축돼 약간의 두려움도 가졌다. 아무튼 황제의 접견이 허락되자, 피사로는 화승총으로 무장한 보병, 기병들과 함께 대포에 포탄을 장착하고 황제가 나타나기를 기다렸다. 이윽고 아타우알파가 수천 명의 호위병을 거느리고 접견 장소인 카하마르카 광장으로 들어왔고, 황제 호위병들의 무장은 흑요석이 박힌 곤봉, 작은 활, 도끼와 원시적인 무기에 불과했다. 이에 피사로는 황제를 급습키 위해 원정대의 성직자를 시켜 일부러 황제에게 성경책을 내밀고 그에게 크리스트교로 개종할 것을 권유했다. 그러나 아타우알파는 성경이 무엇인지도 몰랐고, 또한 자신에게 무례하다고 생각해서 성경책을 바닥에 내던졌다. 피사로는 이것을 꼬투리 잡아 즉시 대포 발사를 명령하고, 기병들에게 말을 몰고 잉카 진영으로 돌격하도록 했다. 대포나 총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었고, 또한 거대한 말들의 질주에 놀라 황제 호위병들은 우왕좌왕했고, 불과 1~2시간 만에 7,000여 명의 호위병들이 몰살됐다. 이 틈에 피사로는 황제 아타우알파를 생포했다. 이후 아타우알파는 자신이 감금된 방을 두 번 채울 정도로 금과 은, 보석을 줄 테니 풀어달라고 요청했고, 피사로는 이를 수락했다. 그러나 피사로는 금 200 상자, 은 20 상자, 보석 60 상자를 얻고는 얼마 후 아타우알파를 처형했다.
(잉카제국의 수도 쿠스코에 있는 황제 동상)
첫째, 신분 상승과 일확천금을 갈망하던 에스파냐 군인 출신 피사로를 비롯한 원정대의 정복욕과 에스파냐 정부의 보상시스템의 동기부여이다. 이에 피사로의 원정대는 불과 168명의 소수 병력으로 7,000명의 호위병을 일거에 섬멸한 후 황제 아타우알파를 생포했다. 둘째, 당시 잉카제국 황제 아타우알파의 외부세계에 대한 완전 무지이다. 피사로가 잉카제국을 침략하기 전에 이미 에스파냐 세력이 아즈텍과 마야문명의 근거지인 중앙아메리카를 참혹하게 약탈하고 있었다. 그러나 잉카제국은 이러한 외부세계에 대해 전혀 알지 못했다. 따라서 외부의 침입자들에 대한 방비가 전무했다. 셋째, 내부의 심각한 분열이다. 즉 제위 계승과 영토 확장의 이유로 형제, 부족 간의 살육전이 계속돼, 수많은 정예 병력이 사라졌다. 또한 황제에게 정복당하면서 사무친 원한을 갖게 된 타 부족들이 피사로 원정대에게 길 안내, 군사정보 제공 등을 자청해서 도왔다. 이에 황제 아타우알파는 외부 침입 세력인 피사로 원정대를 초기에 제압하지 못했다. 넷째, 국가 지도자의 자질 부족이다. 피사로에게 포로가 된 아타우알파는, 그에게 황금 보화를 잔뜩 안겨주면 물러갈 것이라고 오판했다. 그래서 아타우알파는 포로에서 탈출하거나 반격하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이러는 사이 피사로는 원정대 병력을 보강해서 세력을 한층 강화할 수 있었다. 뒤늦게 이를 깨달은 아타우알파는 반격을 모색했지만, 때는 이미 늦었고, 그 결과는 비참한 죽음이었다. 결국 아타우알파의 잘못된 판단으로 엄청난 금은과 보석을 빼앗기고 목숨마저 잃은 처참한 결과가 됐다. 한 국가를 이끌어 가는 지도자의 자질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잉카제국 멸망 후, 에스파냐제국은 1535년 누에바에스파냐, 1543년 페루에 부왕청(副王廳)을 설치하고 잉카제국 영토를 식민지로 편입했다. 이후 지역명인 페루가 국가명이 됐다. 식민지 시대 동안 페루는 에스파냐제국의 중요한 경제적 중심지로, 특히 은과 금의 채굴이 활발하게 이뤄졌다. 그러나 억압적인 통치와 원주민의 착취는 많은 사회적 문제를 야기했다. 이러한 억압적인 통치 아래, 페루인들은 점차 독립을 향한 열망을 키워갔다. 잉카의 땅인 페루를 300여 년 지배한 에스파냐제국을 상대로 페루의 독립운동가들은 '잉카의 후예'라는 기치를 내걸고 에스파냐제국의 통치자들과 맞서 싸웠다. 이에 페루인들은 몇백여 년에 걸친 에스파냐제국의 탄압에도 불구하고 잉카의 신년의식이나 전통들을 보존하면서 잉카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 노력했다. 페루 학계에서도 잉카의 수도인 쿠스코가 지금의 페루 영토 안에 있고, 페루 국민들 중 잉카제국의 구성원인 케추아족(일명 잉카족)의 비율이 50%가 넘는 것을 근거로 페루가 가장 정통성 있는 잉카제국의 후계국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칠레나 에콰도르, 아르헨티나 등 여타 남미 국가들은 잉카제국이 단순히 페루뿐만이 아니라 여러 국가와 민족들에 걸친 다민족 제국이었으므로 오직 페루만의 역사로 보는 것은 옳지 않다고 반박한다.
(페루의 원주민들)
피사로가 아니어도 이미 카리브 연안과 중앙아메리카에 터 잡은 에스파냐인 세력들은 멀지 않은 시기에 잉카제국을 침략했을 것이다. 아울러 아즈텍이나 마야의 정복 사례에서 보듯이 잉카제국의 운명 또한 별반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잉카제국의 최후는 오늘날 우리에게 많은 것을 시사한다. 즉 한 국가의 지도자가 자질이 부족하거나, 외부 세계에 대한 정보(국제 정세)에 무지하면, 해당 국가에 어떤 비극적인 결과가 오는지 깊이 새겨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