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드디어 남자친구 부모님을 만나 뵐 차례였다. 독일에 거주하고 계신 그분들과 직접 만나 결혼 이야기를 나누려면 독일까지 가야 했는데, 일정을 조율하려면 시간이 좀 필요했다. 그래서 우리는 먼저 영상통화로 인사를 나누기로 했다. 솔직히 말해, 통화 버튼을 누르기 전까지 손에서 땀이 삐질삐질 났다. 마치 면접을 앞둔 지원자처럼 마음이 조마조마했다. 영상통화가 연결되자마자, 예비 시부모님은 환한 미소로 우리를 맞이해 주셨다. 그 미소 뒤에 숨겨진 마음을 읽으려 눈을 가늘게 뜨고 화면을 바라보았다. '안녕하세요! 만나서 반가워요!' 그들의 인자한 표정에서 다행히 따뜻함이 느껴졌다. 나는 속으로 '휴~' 하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독일어를 하지 못하는 나를 위해 남자친구가 통역해 줬고 통화 내내 내 머릿속은 "이거 말해도 되나?" "저거는 괜찮을까?" 하며 복잡하게 돌아갔다. 외국 시댁도 시댁은 시댁인지라 엄청 긴장이 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남자친구는 그 고민을 눈치챈 듯, 자신이 리드하며 이야기를 이끌어 갔고 예비 시부모님께서 '독일 오면 직접 만나서 더 얘기하자'라고 하시며 영상통화를 마무리하였다.
그렇게 짧고도 긴 영상통화를 마치고 나서, 우리는 결론을 냈다. 직접 만나서 인사를 드리기 위해 12월 초에 아헨을 방문하기로 한 것이다. 첫 만남은 비록 화면을 통해 이뤄졌지만, 첫인상은 아주 좋았다. 예비 시부모님은 우리의 결혼에 대해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셨고, 남자친구와 나의 결정을 존중해 주셨다. 양가 부모님 모두 결혼에 반대하지 않으셔서 한숨 돌리긴 했지만, 아헨으로 향할 생각만 하면 다시 심장이 쿵쾅거리고 긴장감이 밀려왔다. 비행기 티켓을 예약하면서도 ‘이게 진짜 현실이구나’ 하는 생각에 묘한 기분이 들었다. 그래도 그들의 따뜻한 환영의 말들 덕분에 설렘이 가득했고, 다가올 만남이 점점 더 기대되었다. 마침 크리스마스 시즌이라, ‘독일의 크리스마스 마켓도 볼 수 있겠구나!’라는 생각에 여행자 모드로 상상 속에서 이미 독일 거리를 걷고 있었다. 남자친구는 나에게 아헨의 명물 ‘프린텐’을 맛보여 주겠다고 자신만만했고, 나는 속으로 ‘이걸로 나를 긴장 푸는 거겠지?’ 하며 미소를 지었다. 그래도 나를 만나기도 전에 그분들께서 아들을 믿고 우리의 결혼을 축복해 주신다는 사실에 정말 깊은 감사의 마음을 품게 되었다. 독일에서 펼쳐질 이 대모험이 과연 어떻게 흘러갈지, 이제는 긴장 반, 설렘 반으로 기다려지기 시작했다.
12월이 되어 드디어 독일의 예비 시부모님을 뵈러 갈 차비를 하였다. 회사에 휴가를 냈지만, 그전까지 처리해야 할 업무가 산더미였고, 당연히 전날까지 야근이 예정되어 있었다. 남자친구는 그런 나를 안쓰러워하며 '회사 근처 좋은 호텔에서 하룻밤 자고 아침에 바로 공항으로 가자'라고 제안했다. 사실 처음엔 '괜찮아, 그냥 집에서 자고 가면 돼'라고 말했지만, 남자친구의 다정한 설득에 결국 수락하게 되었다. 그의 배려 덕분에 마지막까지 일에 에너지를 쏟아부을 수 있었다. 남자친구는 미리 호텔 체크인을 해두고 내가 일에서 빠져나오는 시간에 맞춰 마중을 나왔다. 정장차림으로 온 그에게 왜 정장을 입고 나왔냐고 하니 좋은 호텔이라 차려입었다고 해서 웃음이 터졌다. 그의 귀여운 행동에 미소가 절로 나왔고 고단했던 하루에 대해 재잘재잘 얘기하며 호텔로 향하는 길, 약간은 지친 몸이었지만 그의 손을 잡고 나니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그리고 드디어 호텔 객실 문을 여는 순간, 나는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눈앞에 펼쳐진 건 마치 로맨틱한 영화 속 한 장면처럼 꾸며진 방이었다! 그 방엔 형형색색의 풍선들과 우리의 사진들, 그리고 꽃다발과 와인이 놓여 있었다.
'이게 말로만 듣던 프러포즈구나...'라는 생각이 들면서 울컥했다. 모든 풍경을 눈에 담고 남자친구를 봤는데, 그는 굳은 채 떨고 있었다. 손에 들고 있던 반지 케이스를 만지작거리는 그의 손은 미세하게 떨렸다. 정적이 흘렀다. 그 순간, 심장이 두근거리면서 '드디어 그 순간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남자친구가 갑자기 한쪽 무릎을 꿇더니 간신히 입을 열었다.
"음… 여기…"
그런데... 반지 케이스를 열지도 않고 떨리는 목소리로 이 말을 하는데, 나는 너무 귀여워서 참을 수 없었다. 그 상황의 긴장감이 무너져 내리면서 나도 모르게 짓궂게 물었다.
"무슨 할 말 있어?"
남자친구는 한참 뜸을 들이더니, 드디어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말을 꺼냈다.
"응… 나랑 결혼해 줄래?"
그 순간 반지 케이스가 드디어 열렸는데, 반지보다도 남자친구의 떨리는 손과 진땀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나는 웃음이 터질 뻔했지만, 마음은 이미 벅차올랐다. 그 어설프지만 진심 어린 모습에 나도 울컥해서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응… 당연하지."
그가 안도의 한숨을 쉬며 환하게 웃는 순간, 나도 같이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리고는 내가 먼저 장난스럽게 말했다.
"다음에는 반지 케이스는 열고 시작하는 걸로 해!"
둘 다 그 상황이 너무 웃기기도 하고 감동적이기도 해서, 한참 동안 웃음과 눈물이 뒤섞인 감정 속에서 얼싸안고 있었다. 어설픈 프러포즈였지만, 그래서 더 완벽했다.
그제야 남자친구가 차려입은 이유를 알게 되었고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프러포즈에 감동이 어마어마하게 밀려왔다. 남자친구가 그리 로맨틱한 스타일도 아니고 이미 결혼을 약속했기 때문에 아무런 기대도 안 하고 있었는데, 이런 프러포즈를 받게 될 줄이야... 그의 프러포즈는 몇 마디 없이 소박했지만, 오히려 그런 수줍음 가득한 모습이 더 진심으로 다가왔다. 항상 자신감 넘치고 말 잘하는 그가, 떨리는 목소리로 "나랑 결혼해 줄래?"를 겨우 내뱉었을 때 그 수줍음이 너무나 사랑스러웠다. 솔직히 그의 고백이 예상 밖으로 어설프고 말이 짧았지만, 그 어설픔이 오히려 형용할 수 없는 감동으로 다가왔다. 특히 평소 드라마나 영화에 로맨틱한 장면이 나오면 손발이 오그라든다며 잘 보지도 않던 남자친구가, 정말 떨면서 이 깜짝 이벤트를 준비했다니! 내 안에 쌓였던 피로와 스트레스는 마치 봄볕에 눈 녹듯 사라지고, 그 순간 나는 세상에서 가장 특별한 사람이 된 것처럼 느껴졌다. 더 웃긴 건, 평소에 장난치기 좋아하는 내가 그에게 말했다. "그렇게 떨면서 고백하는 모습, 다시 볼 수 있을까?" 하자 남자친구는 "두 번은 못하겠어..."라며 긴장감을 표출했고 나는 그 자리에서 깔깔대며 웃었다. 창밖으로는 눈부신 흰 눈이 내려앉은 서울의 거리와 반짝이는 남산 타워가 완벽한 배경이 되어주고 있었고, 그 순간은 그야말로 로맨스 영화 한 장면처럼 느껴졌다. 나는 그를 향해 장난스럽게 "다음 프러포즈는 좀 더 스무스하게 부탁해"라고 했지만, 사실 마음속으로는 이렇게 서툴렀던 프러포즈가 그 어떤 로맨틱한 영화보다도 더 완벽했다는 걸 이미 깨닫고 있었다. 이 특별한 하루는 앞으로도 두고두고 추억할 최고의 장면으로 남을 것 같았다.
전날의 행복에 젖어 달콤한 꿈을 꾸며 깨어났다. 이제 가슴속 설렘을 안고 독일로 떠날 준비를 마친 우리는 인천공항으로 향했다. 공항에 도착해 체크인 절차를 무사히 마치고, 비행기에 오르기 위해 티켓과 여권을 내밀었는데, 티켓을 스캔하던 직원이 환한 미소와 함께 “축하드립니다, 좌석이 업그레이드됐습니다!”라며 새 티켓을 건네는 것이 아닌가! 순간 둘 다 눈이 휘둥그레졌다. 믿기지 않는 마음으로 확인해 보니, 이코노미 클래스에서 비즈니스 클래스로 업그레이드된 것이었다. 그 순간 우리는 ‘설마 이게 진짜야?’ 하며 서로를 바라보았고 나는 속으로는 "꺄~~~~~아아아아아악!!" 내적 비명을 지르며 방방 뛰고 있었다. 알고 보니 이코노미 좌석이 만석이었고, 내가 그동안 출장을 많이 다닌 덕에 쌓인 마일리지가 이 특별한 행운을 불러온 것이었다. 하지만 업그레이드가 이렇게 쉽게 되는 일은 아니라서, 그 순간 마치 하늘도 우리의 결혼을 축하해 주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비행기에 탑승하자마자 우리는 비즈니스 클래스의 넓고 편안한 좌석에 앉았다. 그 순간, 승무원이 건네준 샴페인을 받아 들고 “와우!” 하며 서로 눈을 마주치며 웃었다. 그 샴페인잔을 부딪히며 우리는 서로에게 말했다. "결혼 축하해!" 둘 다 평소 기내에서 이렇게 럭셔리하게 시작하는 여행은 상상도 못 해봤기에, 이 순간이 믿기지 않았다. ‘이게 신혼여행의 프리뷰인가?’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12시간 넘는 긴 비행이었지만, 편안하게 발을 쭉 뻗고 누워 마치 왕과 왕비처럼 구름 위를 날았다. 영화 보랴, 고급진 기내식 먹으랴, 중간에 편하게 잠도 자니 시간이 정말 쏜살같이 지나갔다. 남자친구는 비행 중간에 "이거 뭐야.. 너무 좋은데?"라고 말했고, 나도 “아, 우리 이번 생은 정말 성공했어!”라며 맞장구를 쳤다. 모든 게 완벽하게 아름다워 보였고, 사실 비행을 더 하라 해도 할 수 있을 거 같았다. '이래서 돈을 많이 벌어야 하는구나..'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이 특별한 여정의 시작을 온몸으로 만끽했다. 왠지 그와 함께라면 뭐든 해낼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고, 앞으로 우리에게 좋은 일만 가득할 것 같다는 느낌적인 느낌에 사로잡혔다. ‘이게 시작이야’라는 설렘을 안고, 독일로 향하는 비행은 어느새 최고의 추억으로 남아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