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한국으로 돌아오자마자 현실적인 문제에 직면했다. 남자친구가 외국인이다 보니, 거주 비자가 없으면 한국에서 오래 머물 수가 없었다. 그래서 비자 발급을 위해 결혼식 전에 혼인신고부터 해야 했다. "어, 이거 좀 순서가 이상한데?"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우리에겐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렇게 우리는 혼인신고를 했다. 혼인신고를 마쳤을 때 솔직히 ‘이게 끝이야?’라는 생각이 들었다. 특별한 감정이 들 줄 알았는데, 막상 신고서에 도장 찍고 나니 그냥 행정 절차 하나 끝낸 것 같은 기분이었다. 하지만 조금 나중에 혼인증명서와 가족증명서를 처음으로 떼어봤을 때, 내 이름과 남편의 이름이 함께 적힌 것을 보는 순간 모든 것이 달라졌다. ‘아, 이제 진짜로 내가 누군가의 아내가 됐구나!’라는 생각이 온몸을 휘감았다. 그때야 비로소 만감이 교차했다. '헉, 더 이상 싱글이 아니야!'라는 묘한 섭섭함과 동시에 내 옆에 남편이 있다는 든든함이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만큼 따뜻하게 밀려왔다. 이제 우리는 법적으로도 진짜 부부가 되었다는 사실이 실감 나기 시작했다. 나는 누군가의 아내가 되었고, 남편은 누군가의 남편이 되었다. 이런 날이 나에게 올 것이라고는 정말 꿈에도 몰랐는데, 이 순간이 너무 신기하고 낯설었다. ‘인생이란 정말 예측 불가구나!’라는 진리를 새삼 깨닫는 순간이었다.
바쁜 일상 속에서 남편의 장기체류 비자(F-6)를 준비하는 과정은 정말 전쟁 같았다. 비자 신청서부터 각종 증명서, 함께 찍은 사진, 이메일, 통화 내역까지, 우리의 혼인생활을 입증할 수 있는 모든 서류를 철저히 준비해야 했다. 마치 우리의 관계가 진짜임을 서류로 설명해야 하는 기분이랄까? 실수할 여유가 없었기에 우리는 전문 행정사를 고용했다. 행정사의 조언대로 A4 용지 3cm 두께로 서류를 정리했는데, 그 모습을 본 남편이 "이건 비자준비 서류가 아니라 졸업 논문 아니야?"라며 놀라워했다. 종로 출입국외국인청에 드디어 서류를 제출했을 때, 직원이 우리 서류를 보고 깜짝 놀라며 말했다. "뭘 이렇게 많이 준비해 오셨어요? 이렇게까지는 안 해도 되는데..." 순간, 조금 어이가 없긴 했지만, '그래도 덜 준비하는 것보단 낫겠지..' 하고 스스로를 위안했다. 모든 서류가 제대로 갖춰져 있었기에 다행히 절차는 순조로웠다. 일주일쯤 뒤 마침내 결과가 나왔고, 남편은 1년간 장기체류가 가능한 비자와 외국인 등록증을 발급받았다. 함께 고생한 보람이 느껴지던 그 순간, 그는 "나 이제 한국에서 살아도 되네~"라며 안도하며 미소 지었다. 그때 남편이 농담 삼아 “이제 나도 한국 사람 다 됐어!”라고 말했을 때, 그동안의 고생이 한순간에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이미 혼인신고는 끝났지만, 결혼식은 따로 하기로 했기 때문에 정식으로 상견례를 할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시부모님께서 1월 말에 한국을 방문하기로 결정! 남편과 나는 이번 방문을 정말 특별하게 만들기로 마음먹었다. 마침 평창 올림픽이 열리는 시기라, 스키점프와 바이애슬론을 좋아하시는 시부모님을 위해 올림픽 티켓을 서프라이즈 선물로 준비했는데, 이미 상상만으로도 시부모님께서 깜짝 놀라 환호하시는 모습이 눈에 선했다.
한국 방문이 처음인 시부모님을 위해 철저한 계획도 세웠다. 방문할 모든 관광명소와 음식 리스트를 만들고 시부모님께 한국 문화를 완벽하게 소개하고 싶어 진짜 초집중 모드로 준비를 마쳤다. 시부모님께서 한국의 매력에 푹 빠지시고, 우리의 노력도 알아주시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상상하며 설레는 마음으로 그들의 방문을 손꼽아 기다렸다. 이 특별한 만남을 통해 가족 간의 관계가 더 돈독해질 거라는 기대감으로 가득 차 있었고, 모든 준비가 끝난 지금, ‘이제 남은 건 시부모님께서 오셔서 행복한 시간만 보내시는 일뿐!’이라고 서로를 응원하며 그날을 기다렸다.
드디어 1월 말, 시부모님이 한국에 도착하셨다! 아쉽게도 많은 휴가를 낼 수 없었던 나는 공항에 마중 나가지 못했고, 주중에는 일을 해야 했기 때문에 시부모님을 직접 모실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남편이 자연스럽게 시부모님의 전담 가이드로 나서야 했다. 다행히 남편은 열정적인 가이드 모드로 변신해 부모님을 완벽하게 이끌어 드릴 준비가 되어 있었다. 우리는 시부모님을 위해 집 근처 근방의 호텔을 예약해 두었고, 남편은 주중 내내 부모님과 함께 서울의 핫플레이스를 누볐다. 남편은 전에 나와 함께 가봤던 명소들을 안내하며 추억을 떠올렸고, 시부모님은 서울의 다양한 매력에 감탄하셨다고 했다. 특히 가장 인상 깊었던 장소는 바로 DMZ. 남편이 DMZ 방문 후 들뜬 목소리로 전해주길, 시부모님은 휴전선이라는 역사적 장소에서 남북한의 긴장감을 직접 느끼며 여러 생각에 잠기셨고, ‘왠지 예전 독일을 보는 것 같다..’라고 말씀하셨다고 했다. 아버님은 이내 진지한 표정으로 "다음에 북한에도 여행 가는 날이 올까?"라고 하셨고, 남편은 웃으며 "글쎄요. 나중에 통일되면 같이 가요!"라고 대답했다는 후일담이 이어졌다.
낮에는 시부모님을 제대로 안내해 드리지 못했기 때문에, 저녁이 되면 나는 서둘러 퇴근해 시부모님과 함께 저녁 식사를 하려고 노력했다. 서울의 바쁜 퇴근길 속에서도 그들과의 저녁 시간이 기다려져 발걸음이 가벼웠다. 시부모님은 생각보다 훨씬 한국을 잘 즐기셨고, 그런 모습이 귀여우셨다. 마치 어린아이처럼 새로운 것들을 보고 신나 하시며 여기저기 사진을 찍으시고 나에게 보여주셨다. 여행하는 걸 좋아하시고, 하루 종일 걸어도 피곤해하지 않으시는 걸 보니, 꼭 남편을 보는 것 같았다. 남편도 어디를 가든 지치지 않고, 매번 "한 군데만 더!"를 외치며 나를 데리고 다니는데, 그 모습이 고스란히 전해진 듯했다. 역시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는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니었다. 나이가 있으신데도 불구하고 두 분 다 항상 활기차셔서 "혹시 에너지를 따로 충전하시나요?"라고 농담을 던지자, 시아버지께서 활짝 웃으며 "이건 여행에 대한 열정으로 충전된 거야!"라고 하셨다. 남편이 그 말을 듣고 "내가 왜 이렇게 여행을 좋아하는지 이제 알겠지?"라며 장난스레 윙크를 했다.
우리는 한국의 다양한 음식을 나누며 도란도란 대화를 나눴다. 시부모님은 특히 닭갈비와 김치찌개의 매력에 푹 빠지셨고, 그들의 아들과 마찬가지로 감자탕을 아주 좋아하셨다. "어쩜 이렇게 매콤한 게 중독적이지?"라며 젓가락을 놓지 않으셨다. 한국의 반찬 문화를 처음 접한 시부모님은 매번 반찬 접시를 보시며 "이거, 진짜 계속 리필되는 거 맞아?"라고 물으셨고, "네! 무한 리필입니다!"라는 내 대답에 "와, 어떻게 돈을 따로 안 받지?"라며 한국식 서비스에 감탄을 금치 못하셨다. 시부모님은 한국 음식뿐만 아니라 한국 자체에 대한 호기심도 가득하셨다. "한국에 대해선 잘 몰랐는데, 이렇게 직접 와보니 정말 매력적이네!"라며 감탄하시더니, "사람들도 친절하고 거리도 깨끗하고, 전통과 현대가 어우러진 이 모습이 너무 아름답다."라고 하셨다. 나는 속으로 '이게 바로 한국의 매력이지' 하며 뿌듯해졌다.
드디어 우리가 예매한 평창올림픽 경기가 코앞으로 다가왔고, 시부모님께 이 깜짝 선물을 말씀드렸다. '스키점프와 바이애슬론을 현장에서 볼 수 있다니!' 시부모님은 깜짝 놀라시며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으셨다. 평소 겨울철이 되면 독일 선수들이 스키 코스를 달리거나 슬로프를 내려갈 때, 항상 TV 앞에 앉아 환호하던 열혈 팬이셨던 시부모님! 그 순간, 눈이 반짝이며 마치 어린아이처럼 좋아하시는 모습에 나와 남편은 절로 웃음이 나왔다. 우리는 그들의 반응이 너무 귀여워서 '이것만으로도 깜짝 선물 성공!'이라며 기뻐했다.
설렘 가득한 마음으로 우리는 모두 함께 KTX를 타고 평창으로 출발했다. 현지에서 이동이 편리하도록 미리 렌터카까지 예약해 놓은 상태였다. 평창의 겨울이 서울보다 훨씬 춥다는 소문을 들었기에, 나이 드신 시부모님을 위해 내복을 챙겨드리고, 핫팩도 잔뜩 준비해 갔다. 하지만 평창에 도착하자마자, 그 추위는 정말 상상을 초월했다. 기온은 영하 10도였지만, 매서운 바람 덕분에 체감 온도는 영하 20도 같았다. 우리는 먼저 대관령 양떼목장으로 향했다. 매우 추웠지만 그래도 계획대로 꼭대기까지 올라가 보기로 했다. 산책로를 따라 한 발 한 발 걸어가며, 시부모님은 "여기 진짜 자연 그 자체네!"라며 감탄하셨지만, 그 와중에 나와 남편은 코끝이 빨개지고 발만 동동 굴렀다. 결국 꼭대기에 다다랐을 때, 추위 때문에 야외에서 풀을 뜯는 양들은 없었고 사육장에 가서 양들을 만나보았다. 그땐, 양털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다. 시부모님은 직접 양들에게 먹이를 주시면서 "이 녀석들, 엄청 귀엽네!"라며 즐거워하셨고, 그 모습에 나도 미소가 절로 나왔다. 하지만 추위가 더 깊이 파고들기 전에, 서둘러 하산했다.
그날 스키점프 경기가 있는 날이었고 경기 시간은 조금 많이 남아 있었지만 올림픽의 분위기도 느끼고 저녁도 거기서 해결하기 위해 경기장이 있는 곳으로 바로 향했다. 스키점프 경기가 열리는 곳에 가려면 지정된 주차장에 차를 세워야 했고, 거기서 경기장까지 가는 셔틀버스를 타야 했다. 주차장은 마치 평창의 얼음벌판 같은 공터에 쫙 펼쳐져 있었고, '가', '나', '다' 구역으로 구분돼 있었다. 차에서 내리기 전, 핫팩을 바르듯이 붙인 우리는 완벽한 준비 태세였다. 시부모님은 핫팩 덕분인지 '이제야 따뜻하다'며 웃으셨지만, 정작 버스에 타기 전까지 우리는 모두 펭귄처럼 어기적거리며 추위와의 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셔틀버스에서 내린 우리는 경기장 입구를 찾아 헤맸지만, 어찌 된 일인지 입구는 굳게 닫혀 있었다. 경기 시작까지 3시간 남았으니 곧 열리겠지 하며 우리는 추위 속에서 발을 동동 굴리며 기다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상황은 묘하게 돌아갔다. 입구는 여전히 잠겨 있고, 인파는 점점 늘어가며 우리 주변은 사람들로 북적였지만, 거기서 일하는 자원봉사자들조차 정확한 개방 시간을 몰라 우왕좌왕하는 분위기였다. 기다리던 시간이 길어지니, 배는 고프고 손발은 얼어붙기 시작하면서 하나둘씩 짜증이 올라왔다. '그래도 곧 열리겠지!'라는 희망으로 버틴 2시간 후, 드디어 입장이 시작되었다. 하지만 기대에 부풀었던 우리의 마음은 경기장에 들어서자마자 와르르 무너졌다. 경기장 내부는 생각보다 휑했고, 먹을 곳을 파는 곳은 작은 매점 하나뿐이었는데 심지어 그곳도 닫혀 있었다. 주변에 따뜻하게 몸을 녹일 대피소가 마련되어 있었지만 인파에 비해 너무 작고 의자도 별로 없었다. 배고픔과 추위에 시달리며 '이거 제대로 망했다'는 생각이 머릿속에 확고해지는 순간이었다. '시부모님께 좋은 추억을 만들어드리겠다고 했는데 이게 뭐람….' 죄송함에 마음이 무거워지기 시작했다. 결국 우리는 시부모님을 대피소에 모셔두고, 남편과 나는 매점 앞에서 열리기를 기도하며 또다시 추위 속에서 대기하기로 했다. '올림픽은커녕 이건 생존 퀘스트인가'라는 생각이 슬며시 들었다.'
30분 후, 매점이 열렸지만, 판매되는 음식은 컵라면, 어묵국, 그리고 몇 가지 간단한 스낵들뿐이었다. 열악한 환경에 나는 점점 화가 나기 시작했고, 이렇게 전 세계 사람들이 모인 큰 행사 준비가 미흡하다는 점에 더욱 부끄러움을 느꼈다. 결국, 컵라면 4개와 어묵국, 스낵들을 사서 대피소로 돌아갔지만, 대피소는 이미 만원이라 의자도 없어 콘크리트 바닥에 앉아 컵라면을 먹어야 했다. 그 모습은 마치 난민처럼 처참해 보였고, 그날의 상황은 기대와는 너무나 다른 참담한 경험으로 남았다.
겉으로는 표현하지 못했지만 한껏 화가 나 있던 나와는 달리, 시부모님은 오히려 미소를 잃지 않으셨다. 컵라면으로 겨우 끼니를 때웠지만, 시부모님은 라면을 드시며 '너무 맛있는데?'라며 좋아하셨다... 담담한 척하면서도 속으로는 완전 쥐구멍에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그분들의 긍정적인 반응 덕분에 나도 마음을 조금씩 추슬렀다. 경기가 시작되자 우리는 대피소를 나와 야외 경기장으로 나갔다. 하지만 밖은 더 추워졌다. 내 발은 점점 감각을 잃었고, 내 몸이 마치 남의 몸처럼 느껴지기 시작했다. 애써 미소는 짓고 있었지만 입술은 파랗게 질려가고 속으론 '이 추위 속에서 경기 보는 게 무슨 의미야'라는 생각이 자꾸 들었다. 그런데, 시부모님은 여전히 불평 한 마디 없이 '괜찮다'며 경기를 즐기고 계셨다.
경기가 끝난 후 사람들이 버스를 타기 위해 몰릴 것을 예상하여 미리 나가자고 제안했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비슷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기에 나가는 과정도 쉽지 않았다. 들어왔던 입구 쪽으로 나가서 버스를 또 1시간 넘게 기다려야 했다. 이미 시간은 밤 11시 정도였고 추위와 기다림의 연속으로 사람들은 많이 지쳐 있었고 짜증이나 있었다. 그 와중에 그런 짜증을 죄 없는 자원봉사자 안내요원에게 불평하는 남자가 있었고 그 자원봉사자도 이미 너무 지친 듯 흐느끼며 안내를 하고 있었다. 그 짜증 내는 사람에게 또 다른 남자가 소리를 버럭 질렀다. “이 분이 무슨 죄에요?! 이 추운 날에 국가를 위해 자원봉사를 하면 감사할 줄 알아야지!” 나를 포함한 주변 사람들이 다들 그 말에 동의하며 한소리씩 했고 그 불평하던 남자는 입을 닫았다. 이렇게 추운 곳에서 몇 시간씩 자원봉사를 하는데 사람들에게 욕도 먹으니 너무 안되어 보였다. 그리고 그 봉사자들이 그런 상황에 처하게 한 올림픽 관계자들이 더 원망스러웠다. 그렇게 2시간이 지나서야 우리는 주차장에 다시 도착할 수 있었다.
버스에서 내리는 순간, 눈발이 날리며 칼바람이 몰아쳤다. 공터에서는 바람을 피할 곳이 전혀 없었기에, 찬바람이 몸속 깊이까지 스며들었다. 태어나서 처음 겪는 극한의 추위였고, 추위에 떨며 차를 찾는 것도 하나의 시련이었다. 알고 보니 주차장에는 같은 가나다 싸인들이 여러 개 있었고 그 어둡고 넓디넓은 공간에서 어디에 차를 뒀는지 가늠하기 어려웠다. 차를 찾지 못하면 이대로 얼어 죽을 것 같다는 끔찍한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나는 초인의 힘을 발휘해, 그 어둠 속에서 차키 버튼을 눌러대며 뛰어다녔다. 마침내 “띠딕” 하는 소리와 함께 그 넓은 주차장에서 우리 렌터카를 발견했다.
차에 타서도 손이 부들부들 떨려서 운전대를 잡는 것조차 힘들었고, 차 안의 온도계는 무려 영하 20도를 가리키고 있었다. 지금 생각해도 아찔한 순간이었다. 나와 남편은 시부모님이 괜찮으신지 먼저 체크했고 괜찮다고 하셔서 손이 진정되는 대로 출발했다. 시간은 자정을 넘어 이미 깊은 밤이었다. 모두가 지쳐 쓰러질 듯한 상태였고, 눈길로 인해 미끄러워 천천히 운전해야 했다. 차 안에서 서서히 몸의 감각이 돌아오는 것을 느끼며 한숨 돌렸다. 1시간이 걸려 예약해 둔 숙소에 도착했을 때, 다행히도 숙소는 따뜻하게 데워져 있었다. 그러나 다음 날, 시부모님이 그날 겪었던 혹독한 추위로 인해 아프실까 봐 걱정이 되어, 불안한 마음으로 잠이 들었다.
다음날 아침, 나와 남편은 시부모님의 컨디션을 체크하는 것부터 시작했다. 다행히도 시부모님은 아프신 곳 없이 괜찮아 보이셨고, 그 모습을 보니 마음이 한결 놓였다. 하마터면 상견례도 못 할뻔했다. 원래 계획은 바이애슬론 경기를 관람하는 것이었지만, 전날의 악몽이 머릿속에 스치며 모두의 건강을 고려할 때 '이번엔 포기하는 게 좋겠다'라고 의견을 제시했다. 남편과 시부모님도 그 전날 추위에 호되게 당한 터라, 내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해 주셨다. 우리는 상견례를 앞두고 무리하지 않기로 하고, 대신 동해 쪽 투어를 계획했다. 평창에서의 힘든 체험을 뒤로하고, 동해의 아름다운 경치를 만끽하며 기분을 전환하기로 했다. 바다의 푸른 물결과 함께 우리의 우울한 기분도 씻겨 내려가길 바라며, 동해로 향했다. 이렇게 평창에서의 난민 체험기를 마치고 동해 투어를 즐긴 후, 서울로 돌아오면서 아이러니하게도 한층 더 돈독해진 가족의 유대감을 느낄 수 있었다.
서울로 돌아온 후, 미디어에서 평창올림픽의 좋은 점만 부각하여 자랑스럽게 보도하는 모습을 보며, 미디어의 일방적인 보도에 대한 신뢰 부족을 다시 한번 느꼈다. 마치 '모든 것이 완벽했다'는 듯한 기사를 읽으며, 실제로 우리가 경험했던 고된 순간들이 무시되고 있다는 생각에 씁쓸함이 밀려왔다. 특히, 추운 날씨 속에서 자원봉사자들이 겪었던 어려움을 보며 화도 많이 났고 '고위 관계자들이 자신들이 직접 해봐야 변화를 꾀할 텐데..'라는 생각이 계속 맴돌았다. 한편으로는 자원봉사자들이 보여준 헌신을 떠올리며, 그들의 노고에 다시금 감사함을 느꼈다. 그들이 혹독한 추위를 이겨내며, 불평하지 않고 최선을 다했기에 올림픽이 무사히 진행될 수 있었던 것임을 잊지 말아야겠다 싶었다. 이런 큰 행사를 준비하면서 미처 챙기지 못한 것들이 많았다는 사실도 인정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로 인해 희생된 이들의 노력에 더욱 귀를 기울여야 할 필요가 있다. 앞으로는 이러한 목소리들이 더 많이 들리길 바라며, 다양한 시각에서 이야기가 전해지기를 희망한다.
드디어 상견례 날이 찾아왔다! 우리는 시부모님과 함께 포천에 있는 부모님 댁으로 향했다. 긴장이 조금 되긴 했지만, 서로가 말이 잘 통하지 않는 상황이 오히려 나를 안심시켰다. 통역 덕분에 드라마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말실수는 없을 것이라는 생각에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우리 아버지는 평소에는 잘 웃지 않으시지만, 이날만큼은 내 걱정과 다르게 환하게 웃으시며 시부모님을 맞이해 주셨다. 무뚝뚝한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시부모님을 챙기려는 노력과 배려가 그 어느 때보다 빛났다. 새어머니께서도 정성스럽게 차린 만찬을 시부모님께 대접하셨고, 시부모님께서는 그 음식을 맛있게 드시며 감사함의 미소를 지으셨다. 그 모습을 보며 우리 부모님의 지극한 정성이 시부모님께도 깊은 감동을 주었음을 알 수 있었다. 특히, 우리 시아버지께서는 더 나이가 있으신 탓에 더욱 극진한 대우를 받으셨다. 한국에서 얼마나 대우받았는지, 아직도 독일에 있는 주변 사람들에게 자랑스럽게 얘기하시곤 하신다. 그렇게 서로 말이 통하지 않아도, 가족애가 마음으로 전달된 듯했다. 이 특별한 경험은 우리 가족 사이에 새로운 연결고리를 만들어 주었다.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면서 우리 결혼식은 5월 말에 한국에서 하기로 합의했고, 시부모님께서 그때 다시 한국으로 방문하시기로 결론지었다. 그때는 제주도에 계신 어머니와 새아버지도 만나기로 했다. 먼 걸음을 해주신 시부모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리며, 독일이 아닌 한국에서의 결혼식을 반대하지 않고 지지해 주신 그 마음에도 깊은 감사를 느꼈다. 이제 새로운 가족으로서의 첫걸음을 내딛게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