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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루미나라 Oct 26. 2024

13) 내 편이 생긴다는 건...

남편과 동거를 시작할 때, 나는 내 직장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그는 원격 근무자, 즉 '디지털 노마드'라는 멋진 타이틀 아래 전 세계 어디서든 노트북만 있으면 자유롭게 일하는 반면, 나는 매일 아침 출근길 전쟁에 나서는 평범한 회사원이었다. 그가 1년에 6주씩 휴가를 즐길 때, 나는 2주짜리 휴가도 병가로 쪼개 써야 하는 게 현실이었다. 특히 아침잠이 많은 나는 아침마다 전쟁이었다. 알람이 5분마다 울릴 때마다 '딱 5분만 더...' 하며 침대에서 나오지 못한 채 실랑이를 벌이곤 했다. 결국 다섯 번도 더 울리는 알람 소리에 항복하고는 허겁지겁 집을 나서면, 그다음은 지옥철이다. 지하철 문이 열리면 마치 그날의 첫 번째 대결이 시작된 것처럼 항상 사람들 사이로 비집고 들어가야 했다. 출근하는 40분 내내 마치 고등어 통조림 속 고등어가 된 기분이었다. 자연스럽게 남편의 자유로운 삶과 대비되는 나의 직장 생활을 비교하게 되었고, 이런 삶의 방식 차이에서 오는 불만과 피로감을 더욱 실감하게 되었다.


회사를 다니며 스트레스받고, 자주 아프기도 했지만, 열심히 성실하게 다닌 덕택에 그 와중에 돈은 나름 꽤 모았다. 8할은 내 '소비 안 하는' 성향 덕분이었다. 비싼 명품? 그런 건 나랑 거리가 멀었다. 남들은 하나씩 들고 다닌다는 명품백도 하나 없었고, 자동차 같은 고가의 소비재는 눈길도 주지 않았다. 내 월급보다 비싼 가방은 사치라고 생각했고, '분수에 맞게 살자'라는 게 나의 철칙이었다. 근데 그렇다고 내가 투자를 잘했냐? 그건 또 아니다. 투자에 대해 관심은 있었지만 시간이 없다는 핑계로 공부하지 못했고 그저 저축만 열심히 했는데, 이 '차곡차곡' 모으는 습관이 뜻밖의 기회를 가져다줬다.


남편과 처음 만나기 2년 전 어느 날 아버지가 포천에 작은 땅이 나왔다며 그걸 사는 게 어떻겠냐고 제안하셨다. 그때 나는 부동산에 대해 아는 게 하나도 없었고, 회사일도 바빠서 그냥 “아버지, 됐어요!”라고 거절했다. 그런데 아버지가 포기하시지 않고 계속 “사라, 사라” 하면서 설득하셨다. 결국엔 “집 하나쯤은 있어야 하지 않겠냐? 집 짓는 건 내가 도와줄게.”라며 아버지 특유의 논리로 나를 궁지에 몰아넣으셨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서울에서는 집값이 하늘을 찔러 집을 사는 건 거의 불가능해 보였고, 어디에라도 집 하나쯤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결국 아버지 말만 믿고 있던 적금을 다 깨서 그 땅을 샀다. 나중에 생각해 보면, 그 땅이 어쩌면 내가 매일 반복하던 다람쥐 쳇바퀴 같은 일상에서 벗어나는 돌파구가 될 수 있겠다는 어렴풋한 희망도 있었다. 하지만 현실은? 회사일이 너무 바빠서 그 땅은 방치 모드로 들어갔다. 그런데 반복되는 일상이 너무 답답하고 지겨워지면서 그 땅이 자꾸 생각났다. '이 땅으로 뭔가 해볼까?'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고, 무엇보다 이 지긋지긋한 직장 생활에서 탈출하고 싶은 마음이 커졌다.


남편을 만나면서 많은 영감과 자신감을 얻은 나는 드디어 큰 결심을 하게 되었다. 바로, 포천의 그 땅에 작은 펜션을 짓겠다는 결심이었다. 작은 땅을 효율적으로 사용하기 위해 3층 건물을 짓기로 하였고 마침 아버지가 건축 일을 하고 계셔서, 토목공사부터 아버지의 진두지휘 아래 시작할 수 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내가 모은 돈이 펜션을 짓기엔 턱없이 부족하다는 사실이었다. 이쯤에서 나는 대출을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대출이라니! 그 말만 들어도 가슴이 쿵쾅거렸다. 내게 대출이란 인생의 커다란 도박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에, 아주 신중하게 고민했다. ‘만약 펜션을 다 짓고 나서 수입이 없으면 어쩌지? 대출금 갚지 못하면? 건설이 중간에 멈춰버리면? 땅과 건물이 은행에 넘어가면 난 망하는 건가?’ 이런 생각들이 머릿속을 빙빙 돌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불확실한 미래 앞에서 마음은 불안하고 초조했다. 그런데 그 와중에, 내 안에서 또 다른 질문이 떠올랐다. ‘너, 30년 동안 계속 이 스트레스 가득한 쳇바퀴 같은 삶을 살고 싶니?’ 대답은 아주 분명했다. '아니!' 리스크가 크다는 걸 알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도전하고 싶었다. 내 인생을 이렇게만 살고 싶지 않다는 열망이 가슴속에 불타올랐다. 그래서 결국, 떨리는 마음으로 대출을 받았다. 그리고 공사 과정은 전문가인 아버지께 믿고 맡겼다. 펜션을 짓는 동안 아버지께 모든 걸 맡기니, 나는 마치 펜션이 지어지는 걸 지켜보는 부동산 재벌이라도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물론, 공사 비용과 대출금 청구서가 올 때마다 그 환상은 사라졌지만 말이다.


토목 공사가 끝난 후, 건물 구조를 세우는 공사가 한창 진행 중이었고, 아버지의 건축 솜씨에 대한 믿음 덕분에 비용도 좀 아낄 수 있을 것이라 예상했었다. 하지만 현실은 마치 드라마의 반전처럼, 내 예상과는 전혀 달랐다. 숙박업소는 보통 비용 절감을 위해 조립식으로 뚝딱뚝딱 건물을 세우는 반면, 아버지는 '집은 최소 100년은 갈 수 있어야 해!'라며 두꺼운 콘크리트 벽으로 견고하게 지으셨고, 그 결과 내 예산은 순식간에 날아가 버렸다. 아버지의 마음은 이해하지만, 이미 대출받은 돈을 다 써버린 상황에서 추가 비용은 정말 난감한 소식이었다. 바로 그때, 내 사정을 알고 있던 남편이 “내가 주식으로 가지고 있는 전재산을 보탤게.”라며 마치 슈퍼히어로처럼 나타났다. 쉽지 않은 결정이었을 텐데 재정적인 도움을 주겠다고 하니 그의 배려와 사랑이 감동적이었다. 건물 준공 허가를 받으면 담보로 추가 대출도 가능하다고 하여 희망의 불씨가 피어올랐다. 당시 남편은 현재를 더 중시하는 스타일이었고 여행을 아주 많이 다녀, 모아둔 목돈은 없었지만, 위기 속에서 그 덕분에 건물을 완성해 준공허가를 받을 수 있었다.



건물을 담보로 두 번째 대출을 받아야 할 때, 내 불안감은 마치 롤러코스터처럼 치솟았다. 그러나 이 상태로 멈춘다면, 정말 죽도 밥도 안 되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두 번째 대출을 신속하게 받기로 결심하고, 남은 공사와 인테리어를 완성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이미 예상보다 훨씬 많은 비용이 들어가 버린 상태에서, 전체 3층 중 2개 층만이라도 먼저 인테리어를 끝내는 것이 현실적인 판단이었다. 두 번의 대출로 이자가 두 배로 불어난 상황에서, 무언가라도 빨리 끝내야 했다! 아버지가 공사를 전담하시는 동안, 나는 성공적인 숙박업소 운영 방법에 관한 책을 읽기 시작했다. 펜션 인테리어는 나만의 독특한 컨셉이 필요했다. 나는 고객들이 우리 펜션에 도착했을 때 마치 한국이 아닌 이국적인 유럽의 전원주택에 온 듯한 느낌을 받기를 원했다. 따라서 도시의 차가운 느낌 대신, 따뜻하고 아늑한 유럽 분위기를 강조하기로 했다. 이를 위해 유럽 인테리어 잡지들과 이미 성공적으로 운영되고 있는 유럽의 숙박업소 이미지들을 벤치마킹하며 살펴보았고 내 머릿속에 많은 아이디어가 쏟아졌다. 이 과정에서 나는 나만의 인테리어 아이디어를 구상하며 실행에 옮길 생각에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인테리어 컨셉을 준비하는 과정은 예상보다 훨씬 재미있었고, 내 적성에 딱 맞는 일이었다. 이전 직장에서 느꼈던 일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창의적으로 공간을 자유롭게 디자인하는 일에 큰 흥미와 즐거움을 느꼈다.


그 와중에 내가 다니던 회사에서는 대대적인 구조조정이 시작됐다. 당시 소팀장이었던 나는 누구를 내보내야 할지 결정해야 하는 난감한 위치에 있었다. 팀원들과의 정이 깊었던 나는 아무도 내보내고 싶지 않았고, 이 과정이 너무 괴로웠다. '왜 내가 이걸 결정해야 해?!'라는 생각이 하루에도 수십 번 들었다. 나는 개인적으로 수익이 줄어들면 그 책임은 당연히 위에서 져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신입사원들이 항상 구조조정의 타깃이 되었고 너무 불합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음 같아서는 내가 확 그만두고 싶었지만 대출원리금을 갚아야 한다는 사실에 그것도 마음처럼 쉽지 않았다.  나는 이런 현실에 너무 지쳐있었고, 당시 남편에게 이런 상황을 하소연하곤 했다. 그는 내 하소연을 듣고는 한숨을 푹 쉬더니,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래, 그 회사 진짜 문제 많네. 누구부터 욕할까? 팀장? 아니면 그 위쪽?" 그는 마치 싸울 상대를 고르는 투사처럼 내 편을 들었고, 나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나왔다. 그의 방식은 간단했다. 같이 욕해주고, 내 분노를 덜어내는 데 적극적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가 말했다.


“당신 일 때문에 너무 스트레스받고 힘들면 그만두는 것도 고려해 보는 게 어때? 나는 당신이 일을 열심히 하는 것도 멋있고 당신의 일을 존중하지만 이제 좀 쉬어가도 되지 않을까?  당신만 원한다면 이참에 정말 하고 싶은 일을 찾아보고 해 보는 것도 좋을 것 같아. 아침마다 일찍 일어나는 걸 매우 힘들어하는 걸 보니 나도 항상 마음이 안 좋아. 펜션은 아직 언제 완성될지 모르겠지만 그때까지 내가 어떻게든 지원할게.”


남편의 말에 나는 큰 감동을 받았다. 이제껏 아무런 대안이 없어 앞만 보고 달려왔는데 그의 쉬어가도 된다는 말이 나에게는 크나큰 안도로 다가왔다. 내 어깨에 있던 천근만근의 돌덩이를 그가 슬쩍 들어 올려 주는 느낌이었다. 세상에 정말 내 편이 생긴 것 같은 느낌이 드는 순간이었다. 나는 퇴사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자진 퇴사하면 퇴직금도 좀 더 받을 수 있을 텐데, 그 돈으로 펜션 공사도 보태고 새로운 도전을 시작할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꼬리를 물었다. 그런데 한편으론 퇴사와 퇴직금을 생각하는 내가 좀 웃기기도 했다. '퇴사에도 전략이 있구나!' 싶어서 말이다.


나의 퇴사 결정이 남편의 회사 상황과 긴밀하게 얽혀 있었던 그 시기에, 남편이 세운 독일 지사의 수익은 두 배로 증가하며 대기업들의 문의도 급증했다. 이에 따라 남편은 독일에 상주할 세일즈 에이전트를 추가로 고용해야 할 상황이 되었고, 남편은 이것이 기회일지 모른다며 그는 내가 독일과 한국을 오가며 생활할 수 있는지 물어보았다. 나는 독일에서 지내는 데는 큰 문제가 없지만, 그렇게 되면 현재 다니고 있는 회사를 그만두어야 하므로 남편의 회사에서 제시하는 조건에 따라 결정을 내릴 수 있다고 답했다. 남편은 내 대답을 듣고 자신의 제안을 회사에 공식적으로 전달하기 위해 회장님에게 이메일을 보냈다. 이메일에는 자신이 독일에 상주하며 대기업들과 직접 거래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라는 분석과, 그렇게 되면 아내가 한국에서 일을 그만두어야 하는 상황이 생기니 그에 대한 보상이 필요하다는 조건이 담겼다. 회장님은 독일 내 긍정적인 세일즈 상황과 큰 액수의 거래들이 걸려 있는 상황을 고려하여, 남편의 모든 제안을 신속히 수락했다.


회장님이 남편의 제안을 받아들였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나는 정말 믿을 수 없었다. 지쳐있던 나에게는 구원의 손길과도 같았다. 타이밍도 절묘했다. 나는 남편 덕분에 마음 편히 회사에 퇴직 의사를 밝힐 수 있었다. 팀원 중 누군가를 해고해야 하는 상황이 아니라 내가 자발적으로 나가게 되니 여러모로 마음이 편했다. 무엇보다 이제부터는 아침에 꾸역꾸역 일찍 일어나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에 꿈만 같았다. 펜션을 완성하기 전까진 일을 이렇게 갑자기 그만두게 될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 했는데 든든한 남편 덕분에 자유의 몸이 되었다. 남편 덕택에 힘들게 다니던 일을 그만두게 되면서, 나는 남은 결혼식 준비에 온전히 집중할 수 있게 되었다. 게다가 퇴직금으로 펜션 공사 비용에도 보태고 내가 새로 하고 싶은 일에도 투자할 수 있을 것 같아 아주 만족스러웠다. 이 모든 과정이 순조롭게 이루어지면서 나는 새로운 인생의 장을 열 수 있게 되었다. 우리는 자축했고 서로가 옆에 있음에 감사해했다. 그리고 나는 크게 외쳤다. "누가 남편을 남의 편이라 했나? 내 편 중에 최고는 내 남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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