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한 건 나였다.
고등학생, '고'독하게 '등'교하는 '학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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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는 2004년 3월, 개학 첫날. 정확히는 고등학교 입학실 날 아침. 나는 좀처럼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질질 끌며 학교로 향하고 있었다.
정말 도무지 믿기지 않았다.
공부에 별 뜻이 없어서 벼락치기로 연명했던 16년 시험 인생은 아주 애매한 성적을 만들어냈고, 자연스럽게 인문계 고등학교로 나를 인도했다. 공부에 뜻이 없는데 학생으로 사는 것이 웬 말인가 싶었지만 잔뜩 무서운 얼굴을 한 엄마의 등쌀을 나는 결국 이기지 못했다.
마지못해 고등학교 지망 원서 작성에서 마음이라도 편하게 다니고자 여고 세 곳을 써서 냈으나 불행 콜렉터답게 하나같이 몽땅 떨어지고 결국 집 앞 10분 거리의 남녀공학에 배정받고 만 것이다.
망했다. 그냥 다 망한 것 같았다. 게다가 그 등굣길 10분이 체감상 어찌나 긴지..
모처럼 기분을 내라고 엄마가 사준 새 운동화를 신은 내 두 발은 마라톤이라도 뛴 직후인 것처럼 욱신거리고 시큰거렸다.
'그래도 학교 가보면 막상 어떨지 모르잖니. 일부러 부정적인 생각만 하진 말고, 가서 보고 직접 겪어 봐.'
막상 가보면 다를 수도 있다던 엄마의 말을 곱씹으며 교실로 들어서자, 낯설고 긴장된 얼굴들이 나를 맞이했다. 아는 친구가 단 하나도 없었다.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교실 뒷자리 한편에 자리 잡은 나는 고개를 돌려 주위를 확인했다. 교실 벽면의 환경 게시판에는 벽보처럼 커다란 시간표가 자리 잡고 있었다.
0교시, 1교시, 2, 3, 4, 5, 6, 7, 8교시(보충 1), 9교시(보충 2), 야자 1, 야자 2
기다란 숫자의 나열은 나를 압도하기에 충분했다. 그럼 도대체 몇 시에 집에 간다는 건가. 교실 시계는 아침 8시를 가리키고 있었고 시간표의 야자 2 마침 시간은 오후 9시 10분이었다.
망했다.
그 말인즉슨, 잠자는 시간만 빼고 나는 이제
이곳에서 살아야 한다는 말이었다.
아, 이제 알겠다.
고등학생이란,
'고'독하게 '등'교하는 '학생'이란 거구나.
고독하게 등교해서 학교에서 살아야 하는 존재이구나.
역시나 확실히 망했다.
나는 조용히 책상 위로 엎드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