볕 좋은 일요일 오후 네시.
길게 자빠져있던 그림자를 데리고 외출을 한다. 사거리 신호등 밑에 서있던 중년 여자가 대낮에 귀신을 본 듯 놀라며 아는 척을 했다.
누구일까? 나는 빠르게 기억해 본다.
맞다!
아주 오래전 짧은 시간이었지만 거의 동거를 하다시피 했던 숙영이었다.
연애하기엔 장점만 가지고 있는 사람이지만 결혼하기엔 단점투성이라며 비수를 꽂고는 늦가을 속으로 차갑게 등을 돌렸던 여자.
그해 겨울나는 섹스와 사랑과 결혼은 별개라는 것을 알았고, 내가 얼마나 가난한 인간인지 뼈저리게 느꼈으며, 상실감에 치를 떨었다.
더러는 함박눈 내리는 새벽, 역전 여인숙 늙은 매춘부의 손에서 나의 청춘이 거세당하는 날도 있었다.
변해버린
숙영은 오렌지주스 나는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키오스크에 주문한다.
한 달 전 개업한 카페 뭉크.
mz 세대를 겨냥한 세련된 인테리어와는 달리 주 고객들은 중, 장년층이다. 그래서인지 카페에는 주야장천 올드팝만 리플레이되고 있었다. 오늘은 진추하가 원써머나잇을 부르고 있다.
그때의 추억을 말하기가 민망해서일까, 그도 저도 아니면 지우고 싶은 기억일까, 마치 매일 보는 사람처럼 앉자마자 호들갑을 떨며 안부를 묻고는 알아도 그만 몰라도 그만인 남편과 자식 자랑을 한다. 무엇을 기대한 것은 아니지만 나는 잠시 당황한다.
남편의 퇴직금으로 세컨드하우스를 샀다거나, 치과의사 아들이 사준 명품 백이 맘에 안 든다는 것 4살 손녀는 한국말보다 영어를 더 잘한다는 것과 올겨울엔 한 달 일정으로 딸과 함께 유럽여행을 갈 거라고 한다.
난 자식도 없고 집도 없지만 쪽팔리거나 부럽지는 않았다. 숙영에게서 빨리 도망가고만 싶었다.
이 여자가 그 옛날에도 이렇게 수다스러웠을까.
우리들의 뜨겁던 그날을 말하지 않더라도 오랜 세월 지나 나에게 할 말이 자랑밖에 없었는지. 혼란스럽고 씁쓸했다.
한 시간이나 숙영의 자랑을 듣다가 밖으로 나오자 멀리서 올여름 마지막 참매미가 악을 쓰며 울고 있었다. 매미소리와 숙영의 목소리가 뒤섞여 귓구멍에서 짜증스럽게 공명한다.
저녁 먹자는 숙영에게 약속이 있다는 핑계를 댔다 연락처를 물어본다. 난감했다. 인연이 되면 만나자는 통속적인 말로 마지막 인사를 했다.
내 딴에는 매너 있게 말했는데 숙영이 기분 나빠한다.
전철역으로 가는 그녀의 뒷모습에서 내 청춘의 흔적을 찾으려 애썼지만 끝내 보이는 건 그녀가 들고 있던 샤넬 가방밖에 없었다.
저물어 가는 Gloomy Sund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