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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후의콘파냐 Sep 26. 2024

아이가 태어나 처음으로 홀로 비행기를 탔다

[D-day] 안 올 것 같은 날은 어김없이 온다. 그것도 매정하게

비행기가 밤 11시 출발이라 감사하게도 함께할 수 있는 하루를 덤으로 받은 기분이다.

마지막 밤이라 잠을 설친 건지 할 일이 있었던 건지 큰 딸은 늦잠을 자다가 겨우 일어나서 아침을 먹는다.  오전 내내 각자의 책상에서 각자의 볼 일을 보다가 문득 시계를 보니 12시가 넘었다. 손녀의 갑작스러운 유학 소식에 내내 울컥하시는 엄마는 결국 어젯밤 다시 집으로 오셨고 하루 내내 딱히 입맛 없는 우리 사정보다는 엄마 끼니를 챙겨드려야 한다는 사명감에 아이에게 뭐 먹고 싶냐고 부추겼다. 그렇게 어렵게 얻어낸 대답은 자장면. 서둘러 외출 준비를 하고 백화점으로 향했다. 그렇게 백화점 지하 중국집에 마주 앉은 삼대 모녀는 자장면 2개, 짬뽕, 찹쌀탕수육을 여느 날의 외식처럼  나눠먹었다. 서로가 떠나기 전 마지막 식사라는 걸 들키지 않으려는 듯 최대한 자연스럽게.

새로 샀던 바지가 사이즈가 맞지 않아 환불하는 미션까지 끝내고 집으로 가려는데 문득 아이의 머리가 눈에 들어왔다. 손질을 좀 하고 가지 않으면 혼자서 더 손질을 못할 것 같은 느낌에 조금이라도 손을 덜어줘야겠다 싶어 당골 미용실에 전화했는데 당일 예약이 꽉 차서 안된단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오며 가며 보이던 백화점 꼭대기층 미용실을 갔더니 다행히 바로 가능하단다. 머리 감고 있는 아이를 두고 엄마와 에스프레소를 마시러 아래층으로 내려왔다. 바체어에 앉아서 커피 마시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아이 폰에 저장된 이름을 보는데 이쁜 우리 엄마가 mommy하트로 바뀌어 있어서 살짝 서운해하는 와중에 엄마는 '제일 사랑하는 암미'로 저장되어 있다. 엄마에게 슬쩍 보여주니 훅 들어오는 감동에 또 코끝이 찡해지신다. "그래 나도 담이 제일 사랑해" 나직한 코맹맹이 소리로 올라오는 감정을 애써 누르는 엄마를 보면서 생각해 본다. 얼마나 진실된 사랑을 받았기에 이렇게 제일이라는 단어를 고를 수 있는 걸까. 그런 사랑을 주는 엄마도 대단하고 그렇게 사랑받는 걸 아는 아이도 기특하다. 한편으로는 깊고 넓게 주지 못한 엄마의 사랑에 대한 죄책감도 슬며시 접어 넣는다.


다시 미용실에 올라오니 거의 머리손질이 끝나간다. 첫 방문 쿠폰덕에 저렴하게 빠르게 무엇보다 깔끔해진 머리스타일에 흡족한 나와는 다르게 아이는 표정이 살짝 묘하다. 2+1 커팅이라 살짝 고민하던 나를 조용히 눈치 주던 딸은 미용실과 멀어지자 조용히 커팅이 마음에 안 든다는 속내를 비친다. 머리 하는 동안 에스프레소 마시는 코스가 딱 좋았는데... 앞으로 또 갈 일은 없겠구나.


집에 와보니 어젯밤에 쿠팡으로 급하게 주문한 실험복과 고글이 도착했다. 실험복을 입어보니 단추구멍이 단추와 안 맞다. 디테일을 요구할 수 없는 퀄리티임은 당연하다. 결국 우리 집 물건이지만 나는 단 한 번도 사용한 적 없는 엄마 전용 반짇고리통이 등장했고 이참에 아이는 이니셜 수도 놓아달라고 부탁한다. 뭔가 의도는 작은 나만의 상징, 내 거라는 표시 정도? 를 상상하지 않았을까. 한참 후 와보니 아주 큼지막한 이니셜이 존재감을 뽐내며 가슴팍에 박혀가고 있었다.

A L I C E

아이들의 영어 이름이 필요하던 유치원시절, 미지의 세계를 탐험하는 용감하고 무한상상력을 가진 소녀를 떠올리며 큰애에게 지어준 이름이 alice였다. 초등 고학년이 되면서 너무 오글거린다고 한동안 저 멀리 던져두었던 alice가 뜬금 등장한 거다. 그 어떤 새 이름보다 엄마가 어릴 적에 지어준 이 이름을 선택했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말하지 않아도 가만히 와닿는다...

이니셜 아래 캐릭터 와펜까지 붙은 실험복은 세상 유일 아이템이 되었다. 우리 암미가 수놓아준 내 이름에 내가 좋아하는 와펜까지. 살짝 웃음이 나오지만 엄마는 안다. 누가 뭐래도 당당히 입을 아이라는 것을. 세상제일사랑하는 암미가 수놓아주신 엄마표 이름에 본인픽 와펜까지. 삼대가 공존하는 실험복은 뭔가 상당히 강한 기운을 가진 유니폼으로 탄생했다. 부디 베트맨의 망토처럼 아이의 꿈을 단단히 지켜주기를!


퇴근하는 남편이 도착하자마자 공항으로 출발하자고 연락이 왔다. 한 시간 남짓... 뭘 해야 하지 생각하다가 급 떠오르는 생각에 컴퓨터 앞에 앉았다. 방문에 붙여둘 외출하기 전 확인해야 하는 것들, 일상에서 꼭 지켜야 하는 그래서 습관으로 만들어야 하는 것들, 결국 나의 잔소리를 한 장에 담아 벽에 붙여놓고 수시로 볼 수 있는 종이 한 장이 필요했다. 내내 아이에게 했던 이야기들을 모았다. 비록 엄마가 옆에서 따라다니면서 육성으로 전할 순 없지만 이 글들이 부디 꼭 내 아이를 지켜주기를 바라면서. 두 장을 출력해서 L홀더에 넣어 부적 같은 느낌으로 전달했다. 꼭 열일해라 내 부적아!


남편이 도착하고 집을 나서려는데 워치가 없다고 난리다. 그렇게 이곳저곳을 뒤지는데 못 찾는다. 아이는 찾기 전까지는 출발하지 않을 태세고 마지막에 쓰고 어디 뒀는지 기억해 보라는 우리의 요구에 전혀 기억이 안 난다는 늘 그랬던 매번 똑같은 멘트에 가서 혼자 잘할 수 있을까 공항 가기도 전부터 다시 걱정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결국 아날로그시계 집어 들고 공항으로 향했다. 차를 타고 가면서 충전기를 백팩에 넣고 그걸 다시 캐리어에 넣었다는 이야기를 하길래 내가 "그럼 워치도 거기 같이 넣었겠네"했더니 그제야 "아하"하며 미소가 번진다. 한바탕의 소동이 해피엔딩으로 마무리되어 평화로운 분위기로 공항에 가나 싶던 순간, 남편의 잔소리가 시작된다. 낮에 있었던 거래처 직원의 무책임한 실수와 그로 인한 신뢰도 상실에 관한 에피소드를 이야기하면서 약속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긴 이야기, 그랬다. 남편도 나도 조금이라도 잔소리를 주입하고 싶은 사명감이었다. 몸이 같이 못 가니 말이라도 얹어서 보내고 싶은 부모의 마음... 얼마나 어깨나 머리 언저리에 얹어졌을지 알 수는 없지만 그렇게 공항에 왔고 나란히 짐 하나씩 밀고 벌써 훌쩍이는 엄마의 시선을 돌리고자 카메라 촬영 역할을 맡겼다. 데스크에서 짐을 맡길 때까지는 여느 여행과 다름이 없었다. 그냥 다 같이 여행 가는 듯했다. 보통 때였으면 라운지 가느라 뛰어들어가기 바빴을 텐데 오늘은 최대한 늦게 들어가는 게 목표라 수속대 앞 빵집 테이블에 자리 잡고 앉아서 스마트심사 앱, 유심 설치 등 마무리해야 할 소소한 것들을 아주 천천히 함께 하고 있었다. 전광판에 탑승준비라는 문구가 떴고 정말로 가야 할 시간이 왔다. 최대한 쿨하게 씩씩하게 보내주고자 했던 내 다짐이 거의 완성되어 가는 시점에 아이를 끌어안고 있는 내 시선에 초등 저학년으로 보이는 남자아이 가족이 들어온다. 온 가족이 펑펑 울고 남자아이도 어깨를 들썩이면서 울고 옆에선 항공사 직원은 익숙한 풍경인 듯 덤덤히 서있다. 내내 절제하던 감정선이 크게 요동을 치면서 순간 울컥 눈물이 솟구쳤다. 들키지 않으려 했는데 아이에게 들켜버렸다. 다시 애써 감정을 쓸어 담으면서 사진도 찍고 아이는 계속 그래왔듯 씩씩하게 홀로 들어갔다. 엄마는 계속 우셨다. 옆에 있어서 울고 옆에 없어서 우셨다.

집으로 가는 차에서 아이의 전화를 받았다. 탑승 게이트 앞에 도착했는데 사람이 너무 많아서 앉을자리가 없단다. 화장실을 가고 싶은데 캐리어를 놓고 갈 수가 없어서 못 갈 것 같다길래 그냥 가지고 들어가라고 하고 끊었는데 마침 전화 온 친구랑 통화하느라 결국 못 갔단다. 비행기가 뜨기 전까지 영상통화도 하고 전화도 하다가 이륙직전이라길래 카톡을 주고받고 있는데 갑자기 숫자 1이 없어지지를 않는다.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그러다가 다시 숫자가 사라지면서 톡이 올라오면 또 주고받고 멈추고 몇 번 이어지다가 결국 숫자 1이 남았다. 무사히 경유지까지 잘 도착해서 바로 연락 주기를... 잠이 안 올 것 같다는 아이처럼 나도 낮과 같은 긴 밤일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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