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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호근 Oct 23. 2024

어른의 사춘기 7화. 대화의 기술

   우리 동네에는 작은 꽃집이 있다. 지하철과 집 사이를 오가는 길목에 있어, 하루에도 몇 번씩 곁을 지난다. 햇살 좋은 시간대에 그 앞을 지나면 꽃집 주인이 내놓은 화분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다. 윤기 나는 이파리들이 물기를 담뿍 머금고,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싱그러움을 뽐낸다. 때에 맞춰 피어날 줄 아는 꽃들도 지지 않는다. 갓 태어난 강아지들이 노는 태를 지켜보듯 절로 귀여운 마음이 돋는다. 이렇게나 식물을 정성스럽게 제대로 키워내는 손길이 부럽다.



 

  나는 자타공인 알아주는 식물 킬러다. 주된 사망 원인은 과습이다. 관리가 쉽기로 유명한 선인장이나 다육식물도 내 손에 들어오면 예외가 없다. 건조한 환경을 좋아하는 식물이라고 안심하다가 존재를 잊은 나머지 말려 죽여 버린다. 몇 번이나 식물 킬러에서 벗어나고자 노력해 봤지만, 영 극복이 되지 않았다. 전문가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판단에 이르러, 발 빠르게 집에서 가까운 식물원에서 운영하는 실내 정원 꾸미기라는 원예 수업을 신청했다.


   한 달 간 이어진 수업은 유익했다. 식물의 종류부터 종류에 맞는 관리법과 같은 기본적인 원예학 이론도 익히고, 주제에 따라 실내에서 기르기 적당한 식물들로 화분도 만들었다. 보통은 미리 준비한 식물들을 화분에 옮겨심기만 하는 수준이라 수업을 따라가는 데에는 문제가 없었다. 그러나 중요한 건 역시나 관리였다. 분명 생생하던 이파리가 며칠 만에 시들해지고, 쑥쑥 잘 자라던 식물이 내 손을 타면 성장을 멈췄다. 다행히 나 말고도 같은 증상을 토로하는 초보 식물 집사들이 있어, 서로 토닥거리며 안도했다.




   고난은 방심을 틈탄다. 원예 수업 마지막 날이었다. 강사님이 무사히 과정을 마친 기념으로 수강생들에게 클루시아 화분 하나씩을 선물했다. 변함없는 사랑이라는 꽃말에 걸맞게 초록빛 이파리들은 하나같이 뱅그르르 윤기가 돌았다. 선물하는 사람의 얼굴을 환하기만 한데, 내 마음이 잿빛이다. 집으로 오는 내내 두 손에 안길 만큼 작은 화분이 어찌나 무겁게 느껴지던지, 나를 거쳐 간 수많은 식물들의 전철을 밟게 될까 봐 무섭기도 했다. 그래도 한 달간 열심히 노력했는데, 좋은 선생님의 가르침을 영양분 삼아 이번에는 정말 잘 키워보고 싶었다.


   의욕과는 달리 반전은 없었다. 예상대로 클루시아는 주인을 잘못 만났다. 볕이 잘 드는 자리를 내어주고, 거름도 바꿔주고 물 주는 주기를 달리해 보아도 소용이 없었다. 가지 줄기는 길고 얇게 웃자라고 이파리들은 맥이 없었다. 그래도 신기한 건 이렇게 간당간당한 수준으로도 끈질기게 죽지 않고 살아남는다는 거였다. 포기하는 심정이 되어 조만간 정리를 해야겠다고 마음먹을 때마다 클루시아는 악착 같이 새로운 싹을 틔웠다. 내 노력과는 무관하게 스스로 강한 녀석이었다.




   어느 날은 화분갈이를 해줘야 싶을 만큼 그 키가 훌쩍 자란 게 보였다. 대충 화분을 품에 안고 근처 꽃집을 찾았다. 한창 추운 겨울이었다. 강추위가 몰아치던 때이니 만큼 당연히 가게 앞은 화분 하나 없이 깨끗했다. 늘 열려 있던 유리문도 닫혀 있고, 두꺼운 단열 에어캡이 덧대어져 있었다. 코 끝 시린 바깥과는 달리 은은한 꽃향기와 흙 냄새 머금은 공기가 훈훈했다. 가게 문이 열릴 때 울리는 종소리에 방금 전까지만 해도 보이지 않던 주인아저씨가 느릿느릿 모습을 드러냈다. 어서 오라는 흔한 인사도 없이, 대뜸 무슨 일이냐고 용건부터 묻는다. 무표정한 얼굴에 어울리는 건조한 목소리다. 친절과 불친절 사이 그 어딘가에 있는 미묘함에 머릿속으로 빠르게 이대로 돌아나갈까 말까를 고민한다. 그런데 여기 말고 다른 꽃집까지 가자니 거리는 멀고 밖은 혹독하게 춥다. 어쩔 수 없다. 애초 목적대로 화분갈이를 하러 왔다고 말하자, 꽃집 사장님의 시선이 즉시 화분을 향한다.     


아이고, 너 추웠겠다.


   손님인 내가 아니라 화분에게 건넨 말이다. 사람인 나에게는 그렇게나 무미건조했던 표정과 목소리가 지금은 너무나 다정하고 따뜻하기까지 하다. 그리고 내게는 자세한 설명도 없이 서둘러 화분을 끌어안고 가게 저 안쪽으로 사라진다. 좁은 통로에 신문지를 깔고 앉아 조심스레 클루시아를 화분에서 꺼내고, 새 화분에 배수가 쉬운 굵은 돌부터 고운 흙을 차곡차곡 쌓는다. 클루시아 뿌리를 곱게 쥐어 새로운 집에 옮겨 심는다. 굵은 손가락으로 조심조심 클루시아 주변의 흙을 눌러 다진다. 새 봉투를 뜯어 부드러운 이끼를 덮어주고 하얀색 조각돌들을 올린다. 클루시아의 초라한 행색에 어울리지 않는 사치스러운 이사였다. 대망의 마무리는 유리창에 붙인 것과 똑같은 에어캡으로 화분을 꽁꽁 감싸주는 일이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는 오돌오돌 떨지 말라며. 그러고선 화분이나 다른 부자재는 있던 걸 썼으니, 분갈이용 흙 값만 두고 가란다. 들인 정성에 비해서 너무나 약소한 금액이었다.


   아, 이 꽃집 앞을 지날 때마다 화분들에 절로 눈이 가던 이유를 알겠다. 꽃집 사장님은 식물을 사고파는 대상이 아니라 자기 삶에 뿌리 내리며 살아가는 생명으로 사랑했다. 말이 없다고 말할 수 없는 건 아니었다. 식물이 온몸으로 드러내는 신호를 놓치지 않도록 살피고, 필요할 때 필요한 것들을 채워주었다. 그와는 반대로 나는 일방적이었다. 클루시아가 보내는 신호는 아랑곳하지 않고 내가 안다고 생각하는 것을 고집했다. 어디선가 배운 대로 제 날짜가 되었다고 물기 머금은 흙에 새 물을 적시고, 이유를 찾으려 하지 않고 죽어가는 식물에게 영양제만 줄기차게 먹여댔다.




   사람과 사람 사이가 그렇듯 모든 생명과도 소통이 중요한 줄을 깨달았다. 그날 이후 수시로 내 클루시아의 기색을 살피게 되었다. 하늘을 향했던 이파리가 아래로 처지면, 목이 마르다는 뜻이다. 그때 배부르게 물을 준다. 여름에는 시원한 물, 겨울에는 미지근한 물로 원하는 온도도 맞춰준다. 추운 계절에 이파리에 노란 빛이 돌면 빛이 잘 드는 자리로, 한창 더운 날엔 그늘로 옮겨준다. 열린 창문 앞에서 바람을 맞으며 기분 좋게 살랑이는 클루시아를 본 적이 있다. 길고 얇은 줄기에 이파리들이 간신히 매달려 있는 형상은 여전하지만, 내게는 너무나 기특한 녀석이다. 식물킬러에게서 살아남은 이 녀석에게 조만간 또 새 집을 마련해주어야 할 시기가 올 것 같다. 화분 갈이를 할 장소는 이미 정해져 있다. 내 클루시아를 포근하게 안아준 그 꽃집. 그 거칠지만 부드러운 손에 내 소중한 화분을 맡겨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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