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리사랑은 있어도 치사랑은 없다는 말이 있다. 자식이 부모를 사랑하는 일은 어렵지만, 윗사람이 아랫사람을 아끼고 사랑하는 일은 자연스럽다는 뜻이다. 나의 첫 어른이었던 친정어머니는 자식에게 엄격했다. 우리 사이에는 윗사람을 무조건 따르고 존경해야 하는 아랫사람의 도리만이 존재했다. 나이를 먹고서도 나에게 어른이란 어렵고 불편한 대상이었다. 낯선 어른과 한 공간에 있을 양이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이리저리 재기만 하다 정작 입 한 번 떼기 힘들었다. 상대방의 눈치를 살피느라 눈알 굴리는 소리가 들릴까 조마조마했다.
그런데 나의 시할머니와의 첫 만남은 실로 파격적이었다. 당시 손주의 여자 친구였을 뿐이었던 나를 처음 보는 자리에서 혹여나 함부로 다루면 닳을 새라 조심히 내 이름을 불러주셨다. 당신보다 키도 덩치도 큰 나를 안아주던 품은 작지만 포근했다. 갈피를 잡지 못하고 허공에서 맴돌던 내 손도 어느 새 그의 품에 안겨 갸날픈 등을 감싸 안았다.
연애가 길어지자 자연스럽게 결혼 이야기가 나왔다. 시어머니는 나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다. 가난한 친정도 고분고분하지 않은 심성의 며느리도 눈에 들지 않았다. 반대로 나를 아는 지인들은 고된 시집살이를 걱정했다. 그때 나나 남편이나 둘 다 콩깍지가 씌었는지, 흔들리지 않았다. 오히려 조만간 우리가 결혼하리라는 확신만 굳건해졌다. 다만 갖춰진 게 없는 만큼 몇 년 동안 자금을 모아 두 사람의 힘으로 결혼식을 올리기로 했다.
그런데 어느 날, 그런 시어머니에게서 당장 결혼하라는 통보를 받았다. 예단도 혼수도 다 필요 없으니 당신이 정해준 날에 얼른 식을 올리라고 말이다. 그 전까지만 해도 하나하나 따지고 재던 모습은 온 데 간 데 없다. 역으로 나와 남편은 어쩌면 인생에서 제일 중요한 결정을 이렇게 대충 내릴 수 있냐고, 펄펄 뛰었다. 이제는 시어머니 쪽에서 몸을 낮추고, 하루빨리 상견례를 진행시키길 원했다.
어떻게 하루아침에 사람이 이렇게나 달라질 수가 있었을까? 시어머니에게도 시어머니가 있었기 때문이다. 가난한 친정 상황이며 우리 둘이서 준비해서 결혼하겠다는 계획을 전해들은 나의 시할머님은 그날로 머리를 싸매고 자리에 누웠다. 자신의 어머니를 세상 으뜸으로 여기는 시아버지는 ‘난 쟤 아니면 싫다. 나 죽기 전에 우리 손주 결혼하는 모습이나 보자.’라는 어머니의 말을 듣고, 이러다 노모가 혹시라도 잘못되지는 않을까 덜컥 겁이 났다. 평소 온화한 성품이었던 시아버지는 시어머니를 설득했다. 사실 설득이라기보다는 엄포에 가까웠다. 언제 돌아가실지 모르는 집안 어른의 부탁 하나 못 들어 주느냐고 말이다.
그렇게 우리는 요즘 같으면 한창 어리다 하는 20대 후반의 나이에 결혼식을 올렸다. 그런데 결혼식을 치르고 3개월 뒤 내 손을 잡고 식장에 입장했던 친정 아버지가 돌아가겼다. 애도 기간 중에 시댁에서 첫 설을 쇠게 됐다. 깊은 슬픔으로 표정을 잃고 있던 내게 시어머니가 던진 모진 말을 지금도 잊지 못한다. 하지만 내 아버지를 욕되게 할 수 없다는 일념으로 꿋꿋이 차례 음식을 만들고 집안을 정리했다. 한바탕 소란이 지나가고 고요해진 거실에 앉아 있자니, 그제야 시할머니가 계신 방문이 살짝 열려 있는 게 보였다. 혹시나 주무시지는 않을까 문을 닫아드리려고 다가가 보니, 시할머니가 열린 문 뒤에 앉아 나를 보고 계셨다. 눈이 마주치자 말 없이 이리 오라 손짓하신다. 그 앞으로 다가가 앉으니 처음 만났을 그날처럼 내 할머니는 나를 꼭 끌어 안아주셨다. ‘네 마음을 내가 안다.’ 할머니는 온몸으로 그렇게 말하고 계셨다. 그리고서는 괜찮은 척 강한 척 하느라 내내 묵히고 있던 울음을 대신 울어주셨다. 나도 소리 없이 할머니 어깨를 적셨다. 우린 눈물이 멈출 때까지 오래도록 서로를 끌어안았다.
꼬박꼬박은 아니었지만, 결혼한 뒤로 우리 부부는 휴가를 받으면 시할머니가 계신 시골로 갔다. 낮에는 다 같이 가까운 장터에 나가 국밥으로 점심을 떼우고, 저녁에는 할머니가 끓여주신 된장찌개를 싹싹 비운 뒤에 동동한 배를 두드리며 느긋하게 TV를 봤다. 보고 싶은 프로그램이 있는 건 아니지만 셋이 도란도란 붙어 앉아 시답잖은 이야기들을 나눴다. 그리고 밤이 되면 할머니를 사이에 두고 셋이 나란히 잠이 들었다. 누가 먼저 말을 하지 않아도 할머니가 내 쪽에 손을 뻗으면 자연스럽게 그 품에 안겼다. 낯선 곳에서 잠을 설치곤 했던 나지만, 그 안에서는 아침까지 내내 꿀잠을 잤다.
아, 어른이란 이렇게 따뜻하고 사랑이 솟아나는 샘 같은 존재인 거구나.
그 품에 안길 때마다 그런 생각을 했다. 내 인생의 어떤 전환점은 내 시할머님이다. 그 분을 통해서 내 어린 시절은 치유 받았다. 한 사람의 온도가 내 안에 살던 아이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쓰다듬으면, 주변의 어둠도 함께 물러났다. 나 역시 아무 이유를 따지지 않고 있는 그대로 사랑받을 수 있는 존재라는 걸 알았다. 이렇듯 사랑에는 힘이 있다. 한 사람의 세상을 바꾼다. 세상을 달리 보게 한다. 나도 다른 누군가에게 내가 받은 사랑의 일부를 나누게 한다. 내 주위에 있는 좋은 사람들을 알아챌 수 있는 시력을 준다.
향년 9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할머니는 내게는 여전히 그 품으로 기억된다. 감히 할머니 이름 석 자를 입술로 옮기면 품 안에서 맡던 살 냄새가 떠오른다. 내 안의 여백을 끌어안아주던 그에게 나는 기꺼이 끌렸다. 지금 할머니는 곁에 없지만, 그의 다정함을 닮은 이가 나의 남편으로 살아가고 있다. 우리는 함께 한 사람을 그리워한다. 개천에서 잡은 개구리를 구워 먹으려다 빈 논밭에 불을 낸 손주는 등짝을 맞으면서도 자신을 걱정하는 진심을 느꼈고, 생전 마지막으로 머물렀던 요양병원을 찾을 때마다 몰래 숨겨놓은 간식을 한껏 내어놓던 주름진 손에서 나는 외려 큰 위로를 받았다. 할머니를 만날 수 있어서 어떤 의미로 내 인생은 성공했다. 나는 참 복이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