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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호근 Nov 20. 2024

어른의 사춘기 11화. 나이 들수록 멋지게 사는 방법

   이 달 들어 벌써 세 번째 부고를 접했다. 아무래도 나이 지긋한 어르신들의 비율이 높은 동네에 살고 있다 보니, 면역력이 떨어지기 쉬운 환절기가 가까울수록 누군가의 죽음도 따라오곤 한다. 그러나 최근 하루 이틀 간격으로 연이어 전해지는 부고 앞에서 고인과 비슷한 연배의 어르신들은 할 말을 잃었다. 내 나이도 어느덧 나이 사십 중반에 접어들었다. 하나 둘 익숙한 얼굴들이 사라져간다. 특별해서가 아니라 아직 순서가 아닐 뿐이어서 나는 오늘도 살아 있다.


   멀게만 느껴졌던 삶의 한 지점이 어쩌면 그리 멀리 있지 않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사람이 태어나듯 우주의 일부로 되돌아가는 죽음 역시 자연스러운 일일 테지만, 아직은 의연히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의 준비는 되어 있지 않다. 만약을 가정하며 부디 나의 마지막이 남은 이들에게 짐이 되거나 부끄럽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하지만 엄숙하고 진지하고 무겁게만 여기는 그날을 어떤 이들은 그냥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도 한다.




   몇 달 전부터 가까운 문화센터에서 캘리그래피를 배우고 있다. 파란 하늘을 한가운데 울림이 있는 글귀를 새긴 누군가의 SNS를 보고 조금은 충동적으로 수강 등록을 했다. 갓 한글을 배우기 시작한 어린아이처럼 기역 니은 같은 자음부터 시작해 단어를 거쳐 한 문장을 쓰는 단계에 이르렀다. 마음먹은 만큼 글씨가 단정하게 써지지 않아 자주 속상하고 풀이 죽는다. 그럴 때마다 건너편 자리에 앉은 시니어 학생 두 분이 폭풍 칭찬으로 기를 채워주신다. 으레 하는 인사치레인 줄 알면서도 ‘배운 기간에 비해 잘 쓴다, 소질이 있다’는 말에 괜히 우쭐한다. 


   수업이 끝나면 자리를 옮기며 서로의 결과물을 돌려보는데, 80대 어르신 두 분의 솜씨가 심상치 않다. 한 분은 오랜 세월 서예를 한 경력이 고스란히 단정한 글씨에 담겼다. 늘 우아한 차림새와 닮았다. 다른 한 분은 나보다 한 달 일찍부터 캘리그래피 수업을 듣고 계신 선배신데, 매일 꾸준히 연습하신다던 말씀이 그냥 하는 소리가 아니었다. 다소 서툴지만 성실한 성품이 반듯한 글씨에 드러난다. 숙제를 하지 못해 수업에 빠질까 고민하다가도 일주일 사이에 훌쩍 향상되었을 두 분의 실력을 기대하며, 마음을 다잡고 문화센터로 향한다.




   캘리그래피 수업이 기다려지는 또 다른 이유는 두 분이 나누는 매운 맛 토크 때문이기도 하다. 강사님께 던지는 질문도 많고 당신들 사는 얘기도 주거니 받거니 하며 술술 풀어놓으신다. 처음에는 끊임없이 이어지는 대화 소리가 거슬리기도 했는데, 어느 순간부터는 한 손에는 붓을 들면서도 저쪽으로는 귀를 쫑긋 세우 경청하게 되는 지경에 이르렀다. 어느 지점에서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없이 맞장구를 치기도 한다. 그만큼 특유의 중독성과 재치가 넘친다. 


   하루는 어르신 한 분이 엄살을 부리신다. 좀처럼 몸이 따라주지 않는 나이인 만큼 욕심을 부리지 않아야 하는데, 배우면 배울수록 더 잘 쓰고 싶은 마음이 들어서 하루 종일 펜과 종이를 붙들게 된다고 말이다. 그러자 맞은편에서 묵묵히 글을 써내려가던 어르신이 무심히 대답하신다. ‘그 나이에 욕심 부리면 일찍 죽어’ 그러자 이때부터 폭포처럼 터져 나오는 티키타카. 


- 이 정도 살았으면 일찍도 아니지. 이 나이 되면 죽어야 돼.


   곁에서 지도를 하고 계시던 강사님이 무슨 그런 소리를 하느냐고 당황스러워하는 가운데, 정작 두 사람은 태연하다.


- 그러는 자기는 이번에 자격증도 땄으면서, 누구한테 보여주려고 그래?

- 그 말도 맞네. 자랑할 만한 사람들은 벌써 다 죽었는데 말이야.

- 나 혼자 쓰고 나 혼자 보는 거지, 뭐. 

- 맞아. 나는 알잖아. 내일 가더라도 오늘 즐거우면 됐지.


   그리고 두 사람은 한바탕 호탕하게 웃는다. 다른 사람들은 따라 웃어도 될지 어째야 할지 안절부절못하는 와중에도, 당사자들은 소녀처럼 해맑다. 내일 하늘이 불러간다 해도 오늘은 행복하니까. 이 또한 세월이 주는 연륜일까. 따지고 보면 사람은 누구나 살면서도 죽었었다. 예전의 나를 버리고 새로운 내가 되는 순간이 그렇다. 나 역시 나에게만 관대하고 남에게 엄격했던 시절은 흐려지고 조금은 타인에게 귀 기울일 줄도 아는 지금이 되었다. 단언컨대 옛날이 그립지는 않다. 앞으로도 나는 더욱 새로워질 것이고,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갈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짐작에 불과하지만 두 분은 나보다 더 많은 변곡점을 거쳐 왔을 것임에 틀림이 없다. 부딪히고 깨지고 다시 일어나면서도 죽음마저 삶의 일부로 수용하고 즐길 줄 아는, 인생 선배들의 의연함을 배운다. 


   그들에게는 죽음이란 것도 별거 아니다. 수업에 집중하느라 고픈 배를 채우러 뜨끈한 콩나물해장국 한 그릇 비우듯, 순리에 따라 마주하게 될 상황에 불과하다. 그러니 아직 오지 않은 미래를 걱정하느라 손을 놓고 있을 수는 없다. 매순간 끝없이 분주하다. 나이가 많다고 하고 싶은 일을 흘려보내지 않는다. 하루하루 해야 할 일을 충실히 매듭짓는다. 매일 성실하게 숙제를 소화한 사람은 갑작스러운 시험에도 당황스러워하지 않듯, 오늘을 아낌없이 살아낸 사람은 어제가 될 오늘에 미련이 없다. 다가올 내일도 새로운 오늘일 뿐이니까. 80대 매운 맛 토크를 통해 내 미래의 예고편을 본다. 어딘가 닮고 싶은 삶의 빛깔을 발견한다. 그냥 그런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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