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시험관, 남편의 이야기
난임 진단을 받고서 첫 시험관을 하기까지 3개월이 걸렸다. 막상 시험관을 돌입하려고 보니 의외의 복병이 나타났다. 그 정체는 다름 아닌 남편이었다. 남편과 나는 최고의 단짝이다. 가치관이 비슷하고 지향하는 삶의 방향성도 같아, 연애 때도 결혼 후에도 대화가 잘 통했다. 재밌는 장면에 동시에 웃는다. 우린 참 찰 맞는 짝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시험관을 하기 전까지 말이다. 유독 시험관에서만큼은 타협이나 양보는 찾아보기 어려웠다. 나는 하루라도 빨리 시술을 받길 원했고, 남편은 최후의 보루로 남겨놓길 요구했다. 여러 차례 다시 상의해도 계속되는 팽팽한 기 싸움에, 결혼하고서 처음으로 집안에 냉랭한 기운이 번졌다.
남편은 긍정적인 성격의 소유자다. 뭐가 됐든 겁 없이 덤비고, 결과가 좋지 않더라도 아님 말고 하는 식으로 미련을 두지 않는다. 쓸데없는 걱정에 골몰하곤 하는 내게는 제동을 걸고 버팀목이 되어준다. 싫어하는 곱창이나 추어탕을 먹으라고 할 때를 제외하고는 대체로 내게 맞춰주고, 내가 좋아하는 건 덩달아 좋아한다. 그런데 시험관에서만큼은 달랐다. 객관적인 수치와 의학적 소견은 일관되게 시험관을 가리켰다. 아무리 논리적으로 설명하고 상황을 이해시켜 봐도, 남편의 의지는 굳건했다. 임신은 자연적인 방법으로 시도하는 게 옳다고 버틴다. 화를 낼 수도 없고 부드럽게 타이르자니 내 속이 터지고 대략 난감한 상황. 나도 나지만 자기 쪽에도 원인이 있는데, 순순히 협조하지 않는 남편에게 서운했다. 그러나 어쩌랴. 아이는 나 혼자 갖고 싶다고 가져지는 게 아닌 것을.
남편의 의견을 존중해 주기로 했다. 대신 3개월이라는 조건을 걸었다. 남편이 원하는 대로 자연임신을 시도해 보고 그래도 안 되면, 내 뜻에 따르기로 했다. 야속하게도 약속한 기간은 금세 달음질치고 나 역시 내심 기다리던 소식은 없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그렇게 우리는 시험관 시술을 할 수 있었다. 시술을 결정하고서도 한동안 남편은 시큰둥했다. 혹시라도 남편 심기를 건드려 그만하자는 말이 나올까 봐, 주사를 맞을 때도 씩씩한 척했고 시술실에 들어가면서도 괜찮은 척했다. 어르고 달래가며 출근할 때 쥐어준 영양제를 먹지 않고, 도로 집에 가지고 왔을 때도 화내지 않았다. 채취일에 도망가지 않고, 함께 병원에 가주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했다. 그 정도로도 남편의 역할은 충분하다고, 위안 삼았다. 둘이 있는데도, 혼자서 적과 싸우고 있는 것 같았다.
돌이켜보면 그 당시 남편은 자존심을 부리고 있었다. 괴로워하고 있었다. 시험관 시술이라는 인위적인 방식이 생명의 가치를 훼손한다는 건, 일종의 핑계였다. 아이를 가질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휩쓸려, 여기가 어딘지 어디로 가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었던 거다. 그래도 내 쪽은 상대적으로 마음 정리가 빨랐다. 아이를 갖고 싶으니까 시험관을 해야 하니까, 난임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였고 해야 할 일에 충실하려고 했다. 반면 남편은 인정하고 싶지 않았고, 인정할 수도 없었다.
이후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심리학적으로 남성의 생식 능력은 남성의 정체성 그리고 자존감과 관련이 높다고 한다. 남자는 문지방을 넘을 힘만 있어도 남자라는 옛 말처럼, 여성과 달리 남성은 늙어서도 생식 능력이 유지된다. (참으로 불공평하다.) 그런데 아직 한창 나이에 아이를 가질 수 없거나 가지기 어렵다는 건, 남성으로서 자기 존재감을 무너지게 한다. 쉽게 표현하자면 남편은 자신이 ‘남성으로서 실패했다’고 여겼다. 남자도 마음이 꺾이고, 약해질 수 있다는 걸. 남편에게도 배려와 응원이 필요하다는 걸. 그때의 나는 헤아리지 못했다.
한편 산부인과에는 일명 ‘굴욕의자’라고 해서 다리걸이가 있는 진료대가 있다. 다리를 벌리고 누워 있는 자세가 굴욕적이라고 해서 붙여진 별명이다. 상대가 의사라 할지라도 타인에게 주요 부위를 보여야 한다는 게 여간 민망한 일이 아니다. 그만큼 시험관 시술을 위해 병원을 찾는 여성들은 산부인과 진료대에 오르는 일을 유쾌하게 여기지 않는다. 남편도 그렇다. 생산을 목적으로 조성된 작은 방에서 채취에 쫓기는 자신의 모습이 혼자 있어도 부끄러웠다. 자신과 아내를 골고루 빼닮은 아가를 바라지만, 사랑이 배제된 부자연스러운 방식은 싫었다.
구체적인 상황은 다르지만 두 사람의 속내는 별다르지 않았다. 내가 그랬던 것처럼 남편도 상처받았다. 아팠다. 더 깊이 이야기를 나누고, 더 가까이에서 상대를 들여다봤어야 했다. 지금은 당연하게 이해하고 있는 남편의 마음을 그때도 알았더라면, 서로 의지하며 한결 이르게 그 시기를 이겨냈으리라는 아쉬움이 든다. 지금은 앞에서 언급한 상황들 전부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있다. 시험관에 최적화된 과정과 환경일 뿐이니까. 나를 겁주고 불안하게 하려고 하는 게 목적이 아니니까. 부부가 함께 힘을 냈으면 좋겠다. 각자가 지닌 감정들을 솔직하게 터놓고 대화하다 보면, 나와 남편이 겪었던 시행착오를 줄이거나 피해갈 수 있다. 예전에는 알지 못했던 낯선 경험들도 현명하게 헤쳐 나갈 수 있다. 의연해질 수 있다.
그래도 첫 차수 로또의 희망을 갖고 시작했던 시험관은 임신 수치 4점대로 종결됐다. 채취를 하고 나서 3일 뒤에 배아 3개를 이식했었다. 배아를 냉동하지 않아서 신선이식이라고 한다. 채취 당일 수정시킨 배아를 3일간 키워 이식했다고 해서 3일 배양 배아 신선이식이다. 이식했던 배아 중 하나라도 착상 시도를 했던 걸까. 주치의는 이런 경우 배아가 자궁 내막에 붙긴 했지만 파고들지 못하고 흘러내린 거라고 했다. 정식 명칭은 아니지만 화학적 유산이라고들 부른다. 의학적으로 한 자릿수 임신 수치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러나 우리 부부는 흥분했다. 배아가 자리를 잡으려고 했다. 우리에게 오려고 했다. 특히 남편은 그토록 꺼리던 시험관을 통해 우리 사이에 생명이 움틀 수 있다는 희망을 발견했다.
아직도 우리가 시험관을 하지 않고도 아이를 가질 수 있다고 믿어?
몇 년의 시간이 흘러 남편에게 묻는다. 여전히 그렇다고 답한다. 예나 지금이나 한결같은 남자다. 달라진 점이 있다면 시험관에 매우 적극적이라는 점이다. 어쩔 때는 나보다 그 정도가 심하다. 체중 관리를 하고 영양제를 먹고, 진료 때에는 담당 선생님에게 남편이 할 수 있는 일을 질문한다. ‘우리의 아이’를 위해서 같이 노력하겠다고 다짐한다. 지난 차수에 실패했으면서도 새로 들어가는 차수마다 잘 될 것 같다고, 밑도 끝도 없이 긍정적인 기운을 내뿜는다. 남편의 2세 계획에는 자연임신과 마찬가지로 시험관이라는 선택지가 추가되어 있다. 17번의 시험관 시술을 받는 동안, 여러 다른 사례들을 접했다. 시험관을 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하게 됐다. 생명에 대한 시선도 바뀌었다. 이제 우리는 어떤 길이든 우리 아이가 걸어오는 길이 꽃길이라고 믿는다. 그래서 자연임신도 시험관도 놓지 않고, 언젠가 올 아이에게 꾸준히 초대장을 보낸다. 그게 예비 엄마아빠로서 미래의 우리 아이에게 해 줄 수 있는 일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