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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호근 Oct 20. 2024

너에게 주고 싶은 것

시험관 비용과 과정에 대한 회고


   우리 집에는 두 권의 백과사전이 있다. 하나는 난임 병원을 다니며 쌓인 영수증, 다른 하나는 전원을 위해 발급해둔 진료기록지다. 시험관을 하다 보면 통상 한 차수에 병원을 찾는 횟수는 4~5회 정도가 된다. 생리 2~3일차부터 3~4회 정도 병원을 방문해 초음파로 난포 크기를 재고, 정해진 날짜에 잘 자란 난포를 채취한다. 병원 횟수에서 짐작하듯이 시험관 주기를 한 번만 지나도 금세 영수증들이 두툼해진다. 내가 다녔던 분당구 소재의 병원은 영수증이 모이는 속도가 확연히 빨랐다. 진료 전 초음파를 볼 때 한 장 진료 보고 한 장, 하루에 최소 2장의 영수증을 안겼으니, 그동안 몇 장의 영수증을 받았을지 나머지는 각자의 상상에 맡긴다.


   시험관을 하며 알게 된 단톡방에서 우스갯소리로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영수증도 진료기록지도 하나도 버리지 말고 간직했다가 나중에 각자의 아이에게 책으로 엮어 보여주자고. 고차수만이 가능한 초월의 경지랄까. 호환마마보다 무섭다는 중2병을 잠재우는 필살기로 써야겠다고 입을 모았다. 남편은 책장에 떡하니 자리 잡은 백과사전을 보며 한숨을 쉰다. 그동안 시험관에 들어간 비용이면 고가의 중형차 한 대는 충분히 뽑고도 남았을 거라며. 태어나기도 전에 이렇게 과소비를 하면 어떡하느냐고 꼭 자식에게 경제 교육을 시켜야겠다고 구시렁댄다.



 

  최근에는 난임 시술을 위한 정부와 지자체에서 지원하는 횟수가 늘어났지만, 몇 년 전까지만 해도 횟수가 현재 수준에 훨씬 못 미쳤고 그마저도 나이 제한이 존재했다. 아이를 갖고 싶어도 경제적 사정으로 시술을 중단하는 경우들도 없지 않았다. 난임 시술 지원금이 적용된다고 해도 채취 한 번에 적게는 20~30만원에서 100만원 넘게 자기 비용이 들어간다. 특히 PGT 같은 비급여 검사를 하게 된다면 배아 당 약 30만원의 추가 비용이 든다. 한 번에 정상배아를 얻는다면 다행이지만, 여러 번 PGT를 할 수밖에 없다면 잔고는 금세 바닥나기 십상이다. 처음 PGT 검사를 마치고 채취부터 PGT 검사 비용까지 도합 500만원이 넘는 돈이 들었다. 난임 시술비 지원 차수가 늘어나기 전에는 신선이식 차수를 소진하고 100% 자비로 진행한 적도 몇 차례 있다. 그런 경우 차수마다 과배란부터 채취까지 300만원 가까운 비용이 들었다. 시험관 한 차수를 마무리하고나면 구멍 난 가계부를 메우느라 한동안 허리띠를 조여야 했다.


   재미있는 건 난임 병원을 다니면서 통이 커졌다는 거다. 평소에는 몇 백 원 몇 천원을 아끼려고 기를 쓰면서 병원에서는 백만 원 넘게 쓰는 데 무덤덤해진다. 경제관념에 고장이 난 모양이다. 몇십만 원 정도야 우습다. 예전 담당 선생님이 옮겼다는 병원을 지날 때면 남편이 이야기한다. 저기 보이는 유리창들은 다 자기가 해줬다며 엄살을 부린다. 어이없지만 동의할 수밖에 없다. 그래도 우리는 웃는다. 언젠가는 그보다 더 귀한 선물을 받을 테니까. 가치를 매길 수 없이 소중한 존재와 만나게 될 테니까.




   처음으로 전원을 하려고 진료기록지를 떼던 날, 넘치다 못해 터질 것 같은 봉투를 받고 당혹스러웠던 기억이 난다. 2년 뒤에는 그보다 더 두꺼운 봉투가 추가됐다. 전원을 할 때마다 진료기록지를 챙기며 생각했다. ‘아, 이건 나라도 읽기 싫겠다.’ 한정된 진료 시간을 알뜰하게 활용하고 싶어, 차수별로 처방받은 약과 주사, 채취 개수, 배아 개수와 등급, 이식 결과 등을 한 장의 표로 정리했다. 효과는 있었다. 초진 상담 때부터 막연한 질문과 대답이 아닌, 내 상태에 대한 의학적 소견과 나에게 맞는 시술 계획을 들을 수 있었다.


   다행히 여태 만났던 선생님들 두 분 다 나의 백과사전을 못 본 척하지 않으셨다. 한 분은 다음 번 진료 때까지 천천히 살펴보고 돌려주겠다고 했다. 새로운 환자를 유치하려는 전략이려니 했다. 그런데 다음 번 진료를 마치고 간호사님이 들려준 진료기록지에는 어떤 흔적들이 보였다. 중요한 부분은 줄을 긋고, 표시도 되어 있었다. 그냥 하는 말이 아니었다. 나는 그 분께 2년간 의지했다. 지금의 담당 선생님은 진료 기록지를 한 장 한 장 넘기며 내게 질문을 하고 어떤 내용은 차트에 옮겨 적기도 하셨다. 비록 원하는 목표에 이르지는 못했지만, 그 여정에 담긴 의미를 찾고자 했다.



   우리의 지나간 시간들이 거기 있었다. 우리는 간절했고,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다했다. 포기하지 않고 끈질기게 매달렸다. 그래서 백과사전이라 불릴 만큼 불어난 영수증과 진료기록지들을 버리지 못했다. 엄마 아빠가 이렇게나 애타게 기다렸다고, 너를 만나기 전부터 깊이 사랑했다고 말해주려고 마음먹었었다. 그러나 요즘은 더 이상 영수증을 받지 않는다. 귀찮아져서는 아니다. 아이에게 주고 싶은 건 그런 게 아니었다. 우리가 초대했으니 우리에게 와준 것만으로도 기뻐해야지, 아이에게 사랑이라는 짐을 지우지 않기로 했다. 듬뿍 설레며 기다리기로 했다. 그저 마음껏 안아주기로 결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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