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서호근 Oct 13. 2024

결심

시험관의 시작

어느덧 17번째 채취를 앞두고 병원 대기실 침대에 누워 순서를 기다린다. 대기가 길기로 유명한 주치의가 수술실에 도착하길 기다리며, 간호사님이 언제나처럼 노래하듯 밝은 목소리로 말을 건다. ‘오늘은 선생님이 언제 오실까요?’에서 ’까요‘를 길게 늘이며 세심하게 긴장한 마음을 살피는 사람. 덕분인지 수액을 놓기 위한 혈관도 통증 없이 잘 잡힌다. 토요일인 오늘도 진료와 시술 모두 빽빽하게 잡혀있다고 했다. 몇 년 동안 난임 병원에 다니며 기다림에 익숙해졌다고 하니, 간호사님이 화들짝 놀라며 단호하게 답한다. 익숙해지지 말라고, 순응하게 된다고.


엄격한 말투에 잠시 흠칫했지만,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수긍이 된다. 하루라도 빨리 난임에서 벗어나라는 응원의 의미였을 테니. ‘그래도 하다 보면 되긴 되는 것 같다’는 내 말이 자조적으로 들렸던 모양이다. 간호사님이 내 담당 선생님 역시 절대 안 된다 하는 법이 없다고 토닥여준다. 그러고 보니 17번의 채취를 거듭하면서도 나 역시 스스로도 안 된다고 단언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수시로 ‘이번에도 안 되면 어쩌지’ ‘이 생활이 더 길어지면 어쩌지’ 걱정하긴 해도. 다만 그 끝이 언제 올지 막막해서, 자주 흔들렸었다.




시험관을 시작하고 첫 채취를 하게 되었을 때는 그런 걱정을 하거나 불안해할 할 새도 없었다. 우리가 난임 부부가 되었다는 처지에 몰두해 있었을 뿐. 난임에 들어선 대부분의 사람들이 하는 말이겠지만, 우리 역시 ‘임신은 원하면 언제든지 할 수 있는 줄 알았다.’ 우리는 쭉 딩크부부였다. 우리 태도가 얼마나 단호했는지, 양가 가족들도 신혼 때만 넌지시 떠보았을 뿐 임신에 대한 별다른 언급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지인들 반응이 더 격렬했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인물은 10년 넘게 갑상선기능항진증을 관리해 주시던 병원 선생님이다. 우리가 딩크인 줄 뻔히 알면서도 더 나이 들기 전에 아이를 가지라며 진료실에 들어갈 때마다 잔소리를 하셨다. 처음 만난 자리에서 딱 하나만 낳으라며 그렇지 않으면 나이 들어 서럽다고 재촉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우리에게는 아직 한참 남은 노년을 상상한다는 게 비현실을 넘어 초현실적이었다. 조언과 잔소리의 차이는 그 말을 듣는 사람이 그것들을 원하는지 아닌지 여부라고 했던가. 주변인들의 관심들이 귀찮기만 했다.




우리는 돌연 딩크를 졸업하기로 했다. 이유는 나 때문이었다. 몇 년간 경과를 지켜만 보고 있던 다발성 근종을 제거하기로 결정하자, 병원에서는 수술 후 자궁이 깨끗할 때 가급적 빨리 임신을 하도록 권유했다. 근종은 재발 가능성이 높은 데다 내 나이가 이미 임신에 불리한 고령이라는 것이었다. 언제라도 아이를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할 때와 아이를 가질 수 없을지도 모르는 상황, 임신의 주도권이 어디에 있느냐에 따라 마음가짐도 달라진다. 승기를 잃은 입장은 초조했다. 조급해졌다. 당시 인공수정과 시험관 시술의 차이도 모르던 우리는 얼렁뚱땅 아이 갖기 프로젝트에 돌입했다.


배란테스트기도 써보고, 자궁을 따뜻하게 해준다는 쑥팬티도 입어봤다. 임신을 잘 되게 해준다는 날도 노려보고, 인터넷에서 찾은 꿀팁들도 두루 시도해 봤지만 소용은 없었다. 불타는 의욕과는 달리 반 년 넘게 임신은 되지 않았다. 내 몸의 문제는 알고 있었으니, 남편 쪽 건강 상태를 확인해 보기로 했다. 유명한 선생님을 수소문해 진료 예약을 잡았다. 의외로 남편 쪽 결과가 좋지 않았다. 정자의 운동성과 정상 정자 비율이(3%) 현저히 떨어졌고, 대부분이 라지헤드라(large head) 모양 역시 양호하지 않았다. 의학적인 소견에 따르면, 자연임신은 기대하기 어렵다고 했다. 이후 시험관을 하면서 안 사실이지만, 남편의 정자들은 난자에게 달려가지 않고 제자리에서 푹 쉬길 즐기는 느긋한 녀석들이었다. 아무래도 주인인 남편의 성격을 꼭 닮은 것 같다고 속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이 정도 수치로도 시험관을 하면 얼마든지 아기를 가질 수 있다고, 시험관에 대한 높은 신뢰를 보였다. 그 후로 찾아다닌 모든 병원의 선생님들의 답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우리가 시험관을 시작하기로 마음먹은 건, 엄연히 말해 자의는 아니었다. 그래서 결심이라는 표현은 어쩌면 적절치 못하다. 떠밀리듯 시작한 시험관 시술은 당황의 연속이었다. 가장 익숙해지기 어려웠던 건 주기를 시작할 때마다 생리 2~3일차에 병원을 방문하는 일이었다. 생리 혈이 나오는 기간에 일회용 치마만 입고 병원 의자에 누워 있기가 부끄럽고 피 묻은 자리를 정돈할 간호사님께 미안했다. 그러나 담당 선생님도 간호사님도 그런 나를 무안하게 하는 법이 없었다. 뭐가 됐든 별일 아닌 듯 잔잔했다. 다행히 두렵기만 했던 과배란 주사와 난포 터트리는 주사도 모두 맞고, 첫 채취도 무사히 해냈다.


내 첫 난임 병원의 수술실 천장에는 라벤더 꽃밭 사진이 붙어있었다. 채취 전 내 몸에 마취약이 돌며 흐릿해지는 시선 끝에 평화로운 풍경의 라벤더 꽃밭이 있었다. 편안히 잠들고 나면 아가와 한 걸음 가까워졌을 거라고 부드럽게 속삭이는 듯했다. 이유를 불문하고 필연적으로 떠남이 전제되어 있는 곳, 나와 남편은 난임이라는 별에 불시착했다. 솔직히 조금, 사실 아주 많이 서러웠다. 뭣도 모르고 울적했고, 뭣도 모르고 희망에 차올랐다. 시험관은 남의 일이라고만 치부했던 내가 당사자가 되고 보니, 채취를 위해 누워 있는 내 모습이 처연하기도 했다. ‘내가 왜 이렇게 되었을까’ 시험관을 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시험관을 할 수밖에 없는 스스로가 안 되어 보일 때, 사진 속 꽃밭이 조용히 어루만졌다. 그렇게 우리는 둘이서 왔지만 셋이서 떠나는 날을 꿈꾸며 전에는 몰랐던 세계로 발을 들여놓고 있었다. 난임을 통해 작은 배려에 일어나고 큰일에 대범해지는 법을 배우기 시작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