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도에서 온 사나이_피빛 운석과 복수의 화신
여기는 조선 총독부다.
넓은 대지에 커다란 석조 건물이 그 위세를 자랑했다. 중앙에는 웅장한 둥근 지붕이 솟아올랐다. 지붕 꼭대기에는 첨탑이 있었다. 기다란 첨탑이 땅을 내려다봤다.
이곳은 총독부의 수뇌부가 모이는 일제의 심장이다. 총독부 주변에는 군인이 많았다. 모두 철통같은 경비를 섰다. 정문으로 많은 사람과 차량이 들락거렸다.
“휴우~!”
큰 숨소리가 들렸다. 실망한 소리였다. 신우였다. 곧 무척 어렵다는 표정을 지었다.
총독부 근처에 신우와 명호가 있었다. 둘이 몸을 숨기고 일제의 삼엄한 경계 태세를 살폈다.
원수인 다나카와 부관인 야마모토는 헌병대 총사령관과 수석 부관이었다. 둘이 업무를 처리하러 총독부로 올 게 뻔했다.
둘은 총독부를 살피며 원수를 제거할 허점을 찾았다. 하지만 이곳은 거사를 치르기에 너무 넓고 번화한 곳이었다. 가장 좋은 공격인 기습이 불가능해 보였다.
낙담한 표정을 짓던 신우가 명호에게 말했다.
“명호야, 이제 헌병대 사령부로 가자.”
“그래, 이만하면 됐다. 가자.”
명호가 길을 안내했다.
헌병대 사령부는 총독부에서 좀 떨어진 곳에 있었다. 군부대라 경계가 삼엄할 게 뻔했다. 그래서 헌병대 사령부보다는 총독부를 노렸지만, 총독부는 만만한 곳이 아니었다.
신우와 명호가 걸음을 재촉했다. 인적이 드문 곳을 찾아 움직였다.
헌병대 사령부 근처로 가자, 군 차량이 계속 보였다. 차 안에 병사 수십 명이 소총을 들고 매의 눈초리로 사방을 살폈다.
5분 후, 신우와 명호가 헌병대 사령부 근처에 다다랐다. 저 멀리에 헌병대 사령부 깃발이 보였다. 강한 바람에 세차게 펄럭였다. 근처 도로에는 출입을 통제하는 보초들이 서성였다.
“여기는 더 하군.”
“맞아, 신우야. 그래서 군부대는 처음부터 아니라고 생각했잖아.”
둘이 고개를 끄떡였다. 바짝 날이 선 칼날 같은 경계에 위축되고 말았다.
보초들이 한 군데만 있는 게 아니었다. 주요 길목마다 무장한 보초들이 서 있었다. 모두 총을 장전했고 초소에는 순식간에 수십 발을 발사할 수 있는 기관총도 보였다.
사방을 조심히 둘러보던 신우가 낙담한 듯 주저앉았다. 그리고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기 시작했다.
명호가 입을 열었다.
“사령부에 수백 명은 상주하는 것 같은데 ….”
그가 답답한 듯 말을 흐렸다.
“…….”
신우는 말이 없었다.
명호가 말을 이었다.
“중무장한 1개 분대도 상대하기 버거운데. 적이 너무 많은 거 같아. 기관총을 어떻게 상대해. 그건 불가능한 일이야.”
신우가 고개를 끄떡였다. 명호가 말을 이었다.
“신우야, 정면 돌파는 어려울 거 같아. 아무리 네가 강해도 혼자서 집중 사격을 견딜 수 없어. 내 생각엔 근무지보다는 이동하는 차량이나 관저를 치는 것이 나을 것 같다.”
명호의 말에 신우가 오랜 침묵 끝에 입을 열었다.
“좋은 생각이야. 놈들이 사는 곳도 만만치는 않겠지만, 여기보다는 수월할 거야. 차량을 공격하는 것도 좋은데,
대신 정확한 정보가 필요해. 어느 차를 탔는지 알아야 해.”
“그래, 생각해 보니 차량을 치는 것도 쉽지 않겠구나. 놈들이 정보를 흘릴 리가 없잖아.
단 한 번에 실수 없이 놈들을 처리해야 해. 만약 실패하면 경계가 더 강화될 거야. 그러면 복수하기가 훨씬 어려워져.”
“맞는 말이야. 이제 관저로 가자!”
신우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
둘이 걸음을 재촉했다. 헌병대 총사령관 관저가 그려진 약도를 들고 길을 찾았다. 약도는 명호가 부지런히 수소문해서 찾은 귀한 정보였다.
둘이 언덕배기 길을 한참 동안 올랐다.
신우의 얼굴에 점점 당혹감이 서리기 시작했다. 길이 낯설지 않았다. 예전에 에리카와 함께 걸었던 길이었다.
‘이, 이게 대체!’
불안감이 엄습하기 시작했다. 신우가 점점 불안함을 느꼈다.
혹 에리카와 헌병대 총사령관 다나카가 무슨 관련이 있는 거 같아 내심 두려웠다.
그때, 명호가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멀리 보이는 저택을 가리켰다.
“어?”
신우가 깜짝 놀랐다.
그곳은 에리카가 들어갔던 집이었다. 그는 뒤통수에 쇠망치를 맞은 듯 멍해지고 말았다.
“저곳이 헌병대 총사령관 관저야. 근처에 경호 부대도 있어. 사령관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즉시 놈들이 달려올 거야.”
명호가 사방을 둘러보며 신우에게 조용히 말했다.
“…….”
정신이 멍해진 신우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경비병을 확인한 명호가 약간 풀이 죽은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경비 병력이 헌병대 사령부보다는 적은 것 같지만, 이곳도 만만치 않은 것 같다.”
“…….”
신우는 여전히 아무런 말이 없었다.
“신우야! 왜 그래? 자신이 없는 거야? 여기서 포기할 생각이야?”
“…….”
명호가 이상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복수를 반드시 하겠다는 신우가 넋이 나가 있었다.
“신우야, 왜 그래? 어서 말을 해봐.”
말이 없던 신우가 어쩔 줄 몰라 했다. 낯빛이 창백해졌다. 침을 꿀컥 삼키더니 힘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명호야, 그만하고 … 이제 집으로 돌아가자.”
“그래. 돌아가자. 오늘 할 일은 다 했어.”
둘이 다시 걸음을 옮겼다.
신우가 고개를 푹 숙였다. 그리고 깊은 생각에 잠겼다.
“신우야, 힘내!”
명호는 신우가 낙담한 거 같아 기분을 풀어주고 싶었다. 그가 말을 이었다.
“괜찮아, 신우야. 기회는 분명히 있어. 시간을 갖고 기다리자. 22년을 기다렸는데 30년을 못 기다리겠어.”
명호가 애써 밝은 표정을 지으며 신우를 달래기 시작했다. 신우는 여전히 묵묵부답이었다.
집으로 돌아온 신우는 말없이 방안에 틀어박혀 있었다. 의기소침한 표정이었다.
이에 명호는 신우를 달래기 위해 재미난 얘기도 하고 신나는 노래도 불렀지만, 친구는 전혀 반응이 없었다.
“아이고, 모르겠다.”
결국, 명호는 두손 두발을 다 들었다. 신우를 달래기보다는 혼자 두는 게 낫다고 생각하고 집을 나섰다. 동대문 시장을 향해 걸어갔다. 맛있는 눈깔사탕을 사서 신우의 마음을 달래고 싶었다.
방안에 혼자 남은 신우는 복잡한 심경에 사로잡혔다.
삼엄한 경계를 펼치는 일본군과 무시무시한 기관총, 아름다운 에리카의 얼굴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특히 에리카가 난공불락의 요새와 같은 적들과 관련이 있는 거 같아 착잡한 심정을 감출 수 없었다.
에리카는 일본인이었다. 이는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신우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가 급히 생각했다.
‘그래, 에리카는 놈들과 별 사이가 아닐 거야. 집에 상주하는 가정 교사 같은 건가? 에리카는 영어 선생님이야. 충분히 가능한 일이야. 그런데 … 만약 아니라면 어떡하지? 혹 다나카의 딸이나 친척인가? 그건 으으으으!’
신우가 속으로 별의별 생각을 다 했다. 이마에서 식은땀이 쭉 흘러내렸다. 심란한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한 가지는 확실했다. 직접 확인하지 않고서는 그 진실을 알 수 없었다.
어제 에리카와 요시코가 집에 다녀갔다. 남자 둘만이 사는 집이라 먹는 게 부실하다며 반찬거리를 바리바리 싸 들고 왔었다.
오늘은 어제 깜박한 우메보시(매실장아찌)를 갖고 온다고 말했다. 우메보시는 일본 사람이 사랑하는 음식이었다.
신우는 지나치게 짜고 쓴 이 음식을 먹고 싶지 않았지만, 에리카의 정성을 거부할 수 없었다.
‘그래, 오늘 물어보자.’
신우가 결심했다. 오늘 저녁에 에리카가 찾아오면 그녀에게 진실을 물어야 했다. 헌병대 총사령관 다나카와 무슨 관계인지 확인해야 했다.
저녁이 되기엔 시간이 일렀다. 두, 세 시간이 남았다.
그는 방안을 서성이며 불안한 마음을 다독였다.
한편 그 시각, 에리카는 부엌에서 우메보시를 그릇에 담았다. 요시코가 옆에서 일을 거들었다.
사실, 에리카는 어제 우메보시를 챙길 생각이었지만, 요시코가 꾀를 냈다. 내일도 찾아갈 핑계를 만들자며 일부러 우메보시를 챙기지 않았다.
그 꾀를 듣자, 에리카 감탄했다. 역시 연애 도사라며 엄지척했다.
요시코가 실실 웃으며 말했다.
“연애 도사가 아니라 그건 기본이에요. 언니는 공부만 해서 연애에 대해 너무나도 몰라요. 대학에서 연애는 안 가르쳐주는 모양이네요.”
“당연하지. 대학에서 무슨 연애를 가르쳐!”
“아이. 비싼 등록금 받으며 너무한다. 그게 가장 중요한 건데 ….”
“맞아, 그렇긴 해. 연애가 참 중요한 데 말이야.”
에리카가 방긋 웃었다.
처자 둘이 우메보시를 그릇에 듬뿍 담으며 깔깔 웃었다.
웃음소리가 크게 들렸다.
지나가던 하녀 수장 나나코가 웃음소리를 듣고 쓴웃음을 지었다. 요시코가 에리카를 믿고 위세를 떤다는 듯 윗니로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업무를 마친 사토는 퇴근하기 전 에리카의 얼굴을 보고 싶었다. 그래서 1층으로 내려갔다. 1층 부엌에서 항상 옆에서 듣고 싶은 목소리가 들렸다. 이에 부엌으로 향했다.
에리카와 요시코가 우메보시를 그릇에 담고 보자기로 잘 감싸고 있었다.
이 모습을 사토가 쳐다봤다.
그때 나나코가 사토에게 다가와 말했다.
“사토 중좌님! 주인님이 찾으십니다.”
다나카의 명이었다. 사토가 고개를 끄떡였다. 그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답했다.
“알았어. 곧 올라가지.”
사토가 아쉬움을 뒤로 하고 걸음을 옮겼다. 에리카와 요시코가 부엌에서 나와 현관문으로 향했다.
‘이거 이상한데 ….’
사토가 2층으로 올라가며 불길함을 느꼈다. 다나카는 업무 시간이 끝나며 부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오늘을 그렇지 않았다.
모든 보고를 마쳤고 특별한 일은 없었다. 이는 분명 에리카 때문에 부르는 거 같았다.
“휴우~!”
사토가 크게 숨을 내쉬었다.
저번에 담판을 짓고 결론을 냈는데 다시 부른다는 건 불길한 징조였다. 보통 약속을 깰 때 다음날 만나곤 했다.
그가 문 앞에서 옷매무새를 고치고 정중하게 노크했다. 들어오라는 소리가 들리자 안으로 들어갔다. 정중하게 인사하고 다나카를 똑바로 바라보며 입을 뗐다.
“부르셨습니까? 총사령관님.”
“왔구먼! 어서 자리에 앉게.”
다나카가 밝은 표정으로 사토를 맞이했다. 자리에 앉기를 권했다.
“기뻐하게. 자네에게 좋은 소식이 있어.”
“기쁜 소식이라고요?”
“응, 자네를 본토 헌병대 사령부 작전 참모로 추천했네. 영전이지. 하하하!”
다나카가 억지로 웃으며 사토의 안색을 살폈다.
사토가 무척 의외란 듯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러다 다나카에게 감사의 뜻을 표했다.
“정말 감사합니다. 총사령관님!”
조선 총독부에서 본토 헌병대 사령부 간다는 것은 엄청난 영전이었다. 장군으로 진급할 수 있는 지름길이었다.
커다란 기쁨에 떨리는 가슴을 달래던 사토가 말을 이었다.
“그러면 아가씨도 함께 본토로 가는 겁니까?”
“아니, 그냥 자네만 가야지.”
다나카가 고개를 흔들며 단호한 목소리 말했다.
순간, 사토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사령관님 말씀은 … 아가씨를 포기하라는 겁니까?”
사토가 무서운 표정으로 다나카를 쏘아붙였다.
다나카가 부드러운 표정을 지으며 답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자네와 에리카는 서로 맞지 않아. 그냥 좋은 보직으로 영전하는 것만 생각해. 그러면 출셋길을 타는 거야. 탄탄대로를 내가 약속하지.
자네가 에리카를 포기하는 게 무척 힘들겠지만, 출세하면 에리카 같은 여자를 만나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야. 다 자네를 위해서 하는 소리야. 새겨듣게.”
다나카가 거짓말을 하기 시작했다. 사토를 단념시키기 위해 그를 위한다는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지껄였다.
사토가 단호하게 말을 받았다.
“아가씨와 함께 가지 않는다면 … 본토로 돌아가지 않겠습니다.”
“뭐라고? 여자 때문에 이런 좋은 기회를 포기하겠다고? 지금 제정신이야?”
다나카가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사토에게 되물었다.
사토가 이를 악물고 다나카에게 말했다.
“전 아가씨를 절대 포기할 수 없습니다. 총사령관님, 아가씨에게 사실대로 말해도 괜찮겠습니까?”
사토의 말에 다나카의 흰자가 번들거렸다. 엄청난 분노가 그의 몸을 순식간에 감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