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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_간도에서 온 사나이 1_46_각서와 신우의 갈등

간도에서 온 사나이_피빛 운석과 복수의 화신

by woodolee

“하하하! 그래 말해봐라. 에리카가 네 말을 믿을 것 같냐? 이젠 나도 물러설 수 없다.”


다나카도 사토에게 지지 않고 으르렁거렸다.


사토가 송곳니를 드러내며 차갑게 말했다.


“정 이렇게 나오신다면 어쩔 수 없군요. 이것만큼은 끝까지 우리 사이의 비밀로 하고 싶었는데 ….”


사토의 말에 다나카가 순간 움찔했다. 사토가 말을 이었다.


“저에게는 그날 사령관님이 직접 쓰신 각서가 있습니다. 이게 언론과 경찰에 폭로된다면 …. 과연 어떻게 될까요?”


각서라는 말에 다나카가 분을 더는 참을 수 없는지 두 손으로 탁자를 탁! 내리치며 소리 질렀다.


“이, 이놈의 자식이 감히! … 13년간이나 나를 협박하더니 아직도 나를 협박할 거리가 남은 거냐? 그게 폭로되면 너도 끝장이야. 너도 공범이라고!”


“괜찮습니다. 이왕 죽을 거면 같이 죽는 것도 나쁘지 않지요. 하하하!”


사토가 호탕하게 웃었다.


웃음소리가 들리자, 다나카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사토에게 달려갔다. 사토의 멱살을 잡고 마구 흔들어댔다.


멱살이 꽉 잡힌 사토가 이를 악물었다. 그가 말을 이었다. 목이 조이는 고통 속에서도 할 말을 다 토해냈다.


“사령관님, 에리카와 혼례를 치르고 본토에 가겠습니다. 제 말을 들어주시면 사령관님 보는 앞에서 각서를 태워버리겠습니다.”


사토의 말에 다나카의 핏대가 곤두섰다.


“으으으~! 좋다, 그렇게 해.”


결국, 다나카가 사토의 협박에 굴복했다. 두 눈을 질끈 감고 그의 청을 수락했다. 멱살을 풀고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잠시 시간이 흘렀다. 사토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고개를 푹 숙였던 다나카가 한 손을 들더니 문을 가리켰다. 그리고 크게 소리 질렀다.


“그만 가 봐!”


“그럼, 그렇게 알고 가보겠습니다. 총사령관님. 편안히 주무십시요.”


사토가 다나카에게 정중히 예를 표했다.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저승사자도 울고 갈 냉기가 다나카의 몸에서 퍼지기 시작했다.


그가 무서운 표정을 짓기 시작했다. 미간이 좁아져 눈썹이 닿을 거 같았다. 그가 이를 갈며 크게 외쳤다.


“사, 사토! 이젠 더는 ….”


“더는!”



*



이후 집무실에 무거운 침묵이 감돌았다. 다나카가 커다란 굴욕을 참을 수 없는지 씩씩거리기 시작했다.


다나카는 13년 동안 사토한테 협박받아왔다. 이제 그 한계점에 다다랐다. 더는 참을 수 없었다.


에리카의 부모가 같이 죽던 날, 바로 그날!


자기가 직접 쓴 각서 때문에 사토가 원하는 건 다 들어줬다. 오늘 최고의 보상을 하고, 사토를 본토로 보내 그와의 관계를 끝내려 했다. 최고의 자리를 약속해서 에리카를 포기시키려 했다.


하지만 사토는 결코, 에리카를 포기하지 않았다. 오히려 각서를 폭로하겠다고 협박했다.


사토의 집착은 다나카의 집착에 못지않았다.


각서는 대형 폭탄과 같았다.


각서가 폭로되면 다나카가 쌓아온 모든 것이 일순간에 무너질 수 있었다. 그래서 그는 오랜 세월 동안 사토에게 저자세로 일관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제 다나카의 인내심이 한계에 다다랐다. 결단을 내릴 때가 됐다고 생각했다.


헌병대 총사령관이라는 막강한 권력과 그동안 악착같이 모은 재산을 이용해 각서와 싸우겠다고 마음먹었다.


자기 마음대로 주무를 수 있는 헌병대를 이용해 사토를 반역자로 뒤집어씌우고, 사법부와 언론은 인맥과 재력을 총동원하면 막을 수 있다고 판단했다.


“휴우~!”


다나카가 크게 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두 손을 꽉 쥐고 두 입술을 무겁게 다물었다.


한동안, 방안을 서성이다가 책상 위에 있는 전화기를 쳐다봤다. 이내 전화기로 손을 뻗고 수화기를 들었다.


“총사령관이다. 야마모토 대좌보고 안으로 들어오라고 해.”


다나카가 떨리는 목소리로 최측근인 야마모토 대좌를 집무실로 불렀다.



**



늦은 저녁 에리카와 요시코가 우메보시를 들고 신우의 집을 찾아갔다.


두 처자는 기분이 좋은지 노래를 흥얼거리며 길을 걸었다.


신우는 약속 시각에 맞춰 집 밖에서 에리카를 기다리고 있었다.


잠시 후, 저 멀리에 에리카와 요시코가 보였다. 신우는 반가운 나머지 그들을 향해 뛰어갔다.


“어머! 신우씨.”


에리카가 자기도 모르게 소리쳤다. 급하게 뛰어오는 신우를 보고 환하게 웃었다. 신우가 근처에 오자, 그녀가 나지막하게 목소리로 말했다. 방긋 미소를 짓고 눈웃음을 쳤다.


“이렇게까지 나오실 필요가 없는데 ….”


신우가 짐을 받으며 말했다.


“아닙니다. 이렇게 찾아오셨는데 마중 나가야죠. 요시코도 오셨네요. 반갑습니다.”


신우가 요시코에게 가볍게 인사했다.


“명호 오빠도 안에 계세요?”


요시코가 명호를 찾았다. 자연스러운 모습이 마치 오래 사귄 남자친구를 찾는 듯했다.


“명호는 지금 집에 없어요. 찬을 사러 밖에 나갔어요. 그새 명호와 친해지셨네요.”


요시코가 부끄러운 듯 작은 목소리로 대했다.


“빵집에서 만난 후, 서로 친구 하기로 했어요.”


“아! 친구요?”


요시코의 말에 신우가 잘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떡였다.


어제 에리카와 함께 요시코가 집에 왔을 때, 명호와 요시코가 서로 눈빛을 주고받았다.


그래서 ‘혹시나?’하고 의심했었는데 이제 둘의 사이를 확실히 알게 되었다.


“명호는 좀 있으면 올 겁니다.”


신우의 말에 요시코가 활짝 웃었다.


셋이 걸음을 옮겼다. 현관문을 열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5분 후 명호가 찬을 사 들고 집으로 돌아왔다.


넷이 다 모이자 웃음꽃이 피기 시작했다. 넷 다 저녁을 먹지 않았다. 이제 식사 준비를 해야 했다.


식사 당번은 명호와 요시코였다. 둘이 밥을 짓고, 반찬을 준비했다. 둘 다 요리에 일가견이 있었다.


신우와 에리카는 방을 치우고 밥상과 그릇, 수저 등을 준비했다.


된장찌개가 보글보글 끓었다. 고등어를 굽는 냄새가 진동했다. 신선한 채소를 버무리는 소리도 들렸다.


에리카가 그릇에서 우메보시를 꺼내서 접시에 가득 담았다.


그렇게 식사 준비가 모두 끝났다. 넷이 자리에 앉았다.


소박하지만, 정성이 듬뿍 담긴 저녁 식사를 시작했다.


“신우씨. 고등어가 참 맛있어 보이네요.”


에리카가 말을 마치고 젓가락으로 고등어를 먹기 좋게 잘랐다. 신우 밥그릇에 커다란 고등어 살점을 착 올렸다.


그러자 요시코도 질세라 더 큰 고등어 살 점을 집어서 명호 밥그릇에 턱 하니 올렸다.


“이럴 실 필요가 없는데 ….”


“저희가 알아서 먹겠습니다.”


신우와 명호가 민망한 듯 머리를 긁적였다. 그들은 두 여인의 애정 공세에 민망했지만 사실, 행복한 시간이었다.


그들은 만주에서 아주 힘들게 살았다. 아무것도 없는 밑바닥부터 시작해, 온몸으로 발버둥 치며 22년간을 악으로 깡으로 버텼다.


그래서 나이가 꽉 차도록 여자를 만나지 못했다. 그들에게 여인은 사치에 불과했다.


신우는 독립군과 내통했다는 누명을 뒤집어쓰고 있었다. 명호는 이를 숨기는 자였다. 일본군이나 만주국 관리가 이 사실을 알면 둘을 가만둘 리 없었다. 그래서 둘은 숨죽이며 22년간을 조용히 살아왔다.


에리카가 우메보시를 먹기 좋게 잘라서 신우의 숟가락에 살포시 올렸다.


신우는 우메보시를 좋아하지 않았지만, 에리카가 주는 음식이라 그런지 나름 맛있게 먹었다. 에리카의 정성이 들어가서인지 별로 짜지도 시지도 않았다.


‘괜찮은데 …. 내가 그동안 맛없는 우메보시를 먹었구나.’


우메보시를 씹으며 신우가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그렇게 화기애애한 저녁 식사가 끝났다.


늦은 저녁을 먹은 후, 명호와 요시코가 설거지를 자처했다. 이에 신우와 에리카는 산책하러 밖으로 나갔다.


그렇게 한 쌍은 집에서 다른 쌍은 집 밖에서 데이트를 즐겼다.


시원한 바람을 받으며 신우와 에리카가 길을 걸었다.


저 멀리에 동대문이 보였다.


둘이 산성길을 따라서 언덕 위로 올라갔다.


이곳은 종로 일대와 광화문, 명동까지 보이는 경치 좋은 곳이었다.


이제 날이 완전히 어두웠다.


많은 연인이 신우와 에리카처럼 낭만적인 야경과 시원한 바람을 즐기러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신우가 주춤했다. 그는 아까부터 할 말이 있었지만 차마 입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다 경성의 야경을 즐기는 에리카의 얼굴을 쳐다봤다.


참 아름다운 옆 모습이었다. 부드러운 긴 머리칼이 바람에 나부끼며 백옥같은 피부를 쓰다듬었다.


에리카가 하얀 손을 들어 올렸다. 바람에 휘날리는 머리칼을 연신 쓸어 올리며 시원한 찬 바람을 마음껏 즐겼다.


“저 ….”


신우가 힘들게 입을 뗐다. 그러다 말을 흐렸다.


“무슨 일이 있는 거예요? 지금 안색이 안 좋아 보이는데 … 다시 아픈 것 아니죠?”


에리카는 걱정 어린 표정을 지으며 신우에게 말했다. 남자친구의 기색을 유심히 살폈다.


“그게 ….”


신우가 용기를 내어 말을 이었다. 하지만, 어려운 얘기라 에리카의 얼굴을 쳐다보지 못하고 먼 산을 바라보며 말했다.


“오늘 몸은 … 괜찮습니다. 그냥 물어볼 게 있었어요. 저 … 부모님이 어떤 분인지 물어봐도 괜찮을까요?”


“…….”


에리카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아! 제가 괜한 걸 물어본 것 같네요. 정말 죄송합니다.”


에리카가 곤란해하는 것 같아 신우가 급히 사과했다.


그러자 에리카가 입을 열었다. 슬픈 기억이 떠오르는 듯 의기소침한 표정으로 말했다.


“아니에요. 사실, 저의 부모님은 … 모두 예전에 돌아가셨어요.”


“네에? 이, 이런!”


에리카의 부모님이 모두 돌아가셨다는 말에 신우가 깜짝 놀랐다. 그리고 생각했다.


‘그러면 총사령관 다나카하고는 부녀 사이가 아니란 말이잖아!’


그는 속으로 다행이라고 여겼지만, 자기처럼 부모님이 모두 돌아가셨다는 말에 가슴이 무척이나 아팠다. 동병상련이었다.


에리카가 고개를 떨구었다. 부모님 생각을 하자, 가슴에 아픈 게 분명했다.


신우가 침을 꿀컥 삼키고 질문을 이었다. 왜 다나카와 같은 집에 사는지 알아야 했다.


“그런데 지금 사시는 곳이 무슨 관저 같은데요.”


에리카가 고개를 들었다. 신우의 두 눈을 바라보며 답했다.


“맞아요, 헌병대 총사령관 관저에 살아요. 헌병대 총사령관님이 제 후견인이세요.”


“후견인이요?”


신우가 놀란 나머지 에리카에게 좀 더 가까이 다가갔다.


“총사령관님은 아버지의 친한 친구였어요.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 고아인 저를 받아주셨어요. 미국으로 유학도 보내주셨고 … 현재 관저에서 같이 살고 있어요.”


에리카가 과거를 회상하며 담담하게 말했다.


다나카가 에리카의 후견인이라는 말에 신우의 가슴이 철렁했다. 불안한 마음을 애써 감추며 에리카에게 계속 물었다.


“그러면, 총사령관님을 … 아버님처럼 생각하는 건가요?”


“뭐, 그 정도는 아니지만, 아무튼 저한테 고마운 분이세요. 하지만 친한 사이는 아니에요.”


에리카가 다나카를 떠올리기 싫은 듯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을 이었다.


“뭔가 그분하고는 왠지 거리감이 있어서 ….”


에리카가 속내를 조심스럽게 털어놨다. 다나카는 고마운 사람이지만, 한편으로는 무척 부담스러운 존재였다.


“아, 그렇군요.”


신우가 말을 마치고 고개를 끄떡였다.


그는 다나카와 에리카가 혈연관계가 아니라는 사실에 안도했다. 하지만 다나카를 은인으로 생각하는 에리카를 제대로 쳐다보기 힘들었다.


다나카는 신우가 반드시 처단해야 하는 원수였다. 어머니를 죽인 원수였다. 그런데 사랑하는 에리카가 고맙게 여기는 후견인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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