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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표지에 속는...

- 토마스 만의 <베네치아에서의 죽음, 토니오 크뢰거>를 읽고

by 준 원 규 수

- <베네치아에서의 죽음, 토니오 크뢰거> / 토마스 만 지음 / 김인순 옮김 / 휴머니스트 / 2022



오랫동안 이름만 알고 읽지는 않았던 독일 작가 '토마스 만'의 소설을 읽었다.

어겹스레 책장을 턴 것은 아니지만 - 내 책장에 있던 책은 아니므로 - 머릿속에 오랫동안 자리했던 작가의 작품을 읽었으니 뭔가를 털기는 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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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마스 만의 작품 중 가장 유명한 <마의 산>은 대부분 벽돌 두께를 자랑하거나 (상), (하) 두 권으로 나뉘어있는데 이 책은 얇고, '토니오 크뢰거'라는 제목도 많이 들어봤기에 도서관에서 냉큼 들고 왔다.


더구나 책의 뒤편에 내놓은 발문이 매력적이었는데

사랑하는 사람이 사랑받는 사람보다 더 신적일세.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속에는 신이 있지만, 사랑받는 사람의 마음속에는 신이 없기 때문이지.

뭔가 말랑말랑한 사랑이야기가 담겨있을 것만 같았다.


더구나 이병률 시인의 추천사 역시 낭만적이었는데

... 당신이 설계한 이번 삶은 그다지 어렵지 않은 쪽으로, 불멸의 감정을 저만치 대칭으로 놓아둔 채 생의 마지막 페이지를 접었습니다. 사랑할 힘은, 그 아름다움의 힘은 다음 생으로 넘기세요. 그것도 아름답습니다.

막상 책장을 넘기며 아무리 기다려도 소설이 끝날 때까지 '아름다운 사랑'은 보이지 않았다.

오직, '아름다움'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우선 소설 '베네치아에서의 죽음'은 우발적으로 떠난 여행에서 사랑에 빠지 노(老) 소설가 야셴바흐의 사랑이야기이다.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사고를 바탕으로 한 소설들을 쓰고, 그 작품성을 인정받아 금전적 고민 없이 여행을 다닐 수 있을 만큼의 경제적 여유를 가지고 있는 야셴바흐. 그의 일평생 자신의 이성을 뒤흔들 감정을 허용한 적이 없었던 그는 베네치아에서 만난 사랑에 자신을 온전히 맡기고 그곳에 감염병이 돌고 있다는 것을 눈치채고도 그곳을 떠나지 않다가 결국 베네치아에서 죽음을 맞는다.


그런데 이 소설을 사랑이야기로 보기 어렵다고 생각한 이유는 대상이 폴란드의 귀족가 영식으로 보이는 타지우라는 소년이었기 때문은 아니었다. 74세의 괴테가 19살의 울리케를 사랑했었다는 실화는 유명하고, 그에 한 술 더 떠 상대가 동성이라는 것이 괴테의 사랑과 무어 그리 다를까 싶다는 생각이다.

야셴바흐의 말하는 사랑에는 우리가 흔히 이성 간의 사랑을 바탕으로 이야기할 때 들어가는 성적인 요소가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게 더 큰 이유일 것 같다. 타지우의 외양이나 옷차림, 혹은 물놀이하는 모습 등을 묘사하는 시선에서 성애적 느낌이 없다. 그저 완벽한 아름다움을 간직한 존재, 완벽한 아름다움과 순수함을 가진 존재로 그려진 타지우를 쫓는 야셴바흐는 자신의 감정을 인정하고, 그에 대한 집착적인 관심을 자신의 것으로 수용하며 사랑에 대해, 아름다움에 대해, 예술에 대해 지치지 않고 생각하고, 갈등하며, 고민한다.


<베네치아에서의 죽음>에서 작가 야셴바흐가 익숙했던 여행지 베네치아에서 만난 낯선 열풍 같은 감정을 기반으로 타지우를 추구할 아름다움의 대상으로 생각했다면 <토니오 크뢰거>에서 주인공 토니오가 갖고 싶어 했던 아름다움은 좀 다르다. 여기에서도 동성애로 오해될 만한 관계가 나오는데 그 대상은 주인공과 동갑의 학교 친구 한스. 금발의 푸른 눈동자, 학교 선생님들이 바라는 모범생 그 자체의 한스를 토니오는 동경한다.

이름부터 외모까지 완벽하게 독일의 상류층에 어울리는 한스에 이어 토니오의 사랑을 가져단 상대는 잉게. 그녀 역시 금발의 푸른 눈을 가진 이상적인 외모의 소녀였다.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가풍을 가진 사업가 집안의 아버지와 자유로운 예술가적 기질을 가진 어머니(그녀의 출신이 정확하게 나오지는 않지만 이탈리아나 동유럽 쪽이 아닐까 싶다)를 둔 토니오는 현실적으로는 어머니의 영향을 받아 예술가적 기질이 많지만 아버지가 보여주는 이성적이고 질서 있는 모습을 동경한다.

이성적인 '시민'으로의 모습과 질서나 규제에 순응해서만은 성장할 수 없는 예술가적 기질 사이에서 소년 토니오가 동경했던 아름다움은 한스나 잉게로 보이는 사회가 원하고, 사회적인 틀에 맞춰진 것들이었다.


토니오는 결여되었던 것들에 대한 미련과 작별하며 예술가로 성장했고, 야셴바흐는 집착에 가까울 정도로 바라보던 그 사랑 속에서 어떤 성과 - 사랑에 꼭 성과가 있어야 하는지는 모르겠지만-도 없이 전염병으로 죽는다.

토니오에 비해 야셴바흐의 결말은 여러 생각을 갖게 하는데 어떤 이는 속절없는 사랑에 허무하다고 할지 모르겠고 어떤 이는 늦게나마 강렬한 사랑의 감정이 할퀸 열병을 알게 된 야셴바흐의 삶이 그로 인해 좀 더 완전해졌다고도 할 수 있을 것 같다. 나는 후자 쪽인데, 베네치아로 향하는 배 안에서 술에 취해 사랑에 대해 큰소리로 떠들던 늙은 남자를 경멸하듯 바라보았던 야셴바흐를 떠올리면 더욱 그렇다. 전염병에 대해 눈치채고 베네치아를 떠나는 타지오를 마지막까지 바라보며, 야셴바흐 역시 얼마나 그 사랑에 대해 세상에 외치고 싶었을까.

사람이 전에는 이해할 수 없던 타인을 이해할 수 있을 정도의 경험을 한다는 것은 전혀 몰랐던 다른 우주를 경험하는 것과 같은 일일 것이다.

야셴바흐가 병으로 죽지 않았다면 기존에 그가 보여줬던 세계와는 전혀 다른 명작이 하나 탄생하지 않았을까...


철학적 사유가 지속되는 진지한 서술의 소설은 무척 오랜만이어서 적응하기까지 시간이 좀 걸렸다. 하지만 인물에 대한 탁월한 묘사와 진지한 내적 고민들의 묵직한 울림은 나쁘지 않았다. 간만에 영양식을 먹은 기분이랄까.

그 영양식이 맛도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건강에 좋은 맛만 나는 건 좀 아쉽기는 했다.





#토마스만#베네치아에서의죽음#토니오크뢰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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