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고 여행 <조지아> 1
백만 송이, 백만 송이, 백만 송이 장미를......
콧소리로 흥얼거리듯 나오는 가수 심수봉 씨의 이 노래의 원곡이 러시아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 노래의 모티프가 조지아의 화가 니코 피로스마니의 사랑 이야기라는 것은 처음 알았다. 조지아에서 가장 유명한 화가라는 것도. 검색해 보니, 이 피로스마니의 생애가 고흐와 비슷한 점들이 있는데, 사후에 작품들이 인정받았다는 것, 하여 생전에는 가난으로 힘들어했다는 것, 순탄하지 않았던 사랑, 원만하지 못한 인간관계 등이 그렇다. 물론 고흐에게는 동생 테오가 있었지만.
낭만적인 사연의 피로스마니 흉상이 있고, 혼인 신고를 24시간 내내 받는 곳이라서일까. 시그나기는 ‘사랑의 도시’라고 불린다고 한다.
검색기를 돌리면 하루에 다 돌아볼 만큼 작은 도시라고 한다. 18세기 황제의 명으로 도적이나 외침의 방어를 위해 세웠다는 방벽과 함께 마을의 건축물들이 세워졌다고.
조지아는 동쪽 지역과 서쪽 지역의 역사가 살짝 다르지만 그래도 쉬지 않고 주변 강대국의 지배는 이어졌고, 최근까지 전쟁으로 많은 이들이 희생되었다. 그래서 시그나기 시내 중심부에 있는 ‘전사의 벽’ 역시 그런 아픔을 담고 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소련군에 의해 강제 편입되어 전사한 조지아 인들을 추모하기 위해 조성된 것이라고 한다. 여러 그림과 조각들이 추모와 평화의 메시지를 담고 있다는데 이 전사의 벽을 따라 시그나기 중심지를 차근차근 걷는 것으로 시작해도 좋을 것 같다.
그래서 시그나기 여행의 첫날에는 조금 비가 내려도 좋을 것 같았다. 우산에 떨어지는 빗소리를 들으며 한층 더 차분해진 분위기에 이 작은 마을이 속삭이는 이야기들을 더 잘 들을 수 있는 방법일 것도 같았다.
여행의 반은 날씨가 아닐까 한다. 특히 시간도, 경비도 많이 드는 해외여행일수록 모든 것이 다 좋기를 바라는 기대치가 높다. 아무리 준비를 해도 날씨는 내가 어찌할 영역이 아니므로 그 운이 더욱 필요한 것 같다.
내 여행 시기에는 날씨가 좋은 날도 있었고, 비가 계속 내리는 때도 있었고, 무척 추운 날도 있었다. 처음 갔던 여행도, 자주 다녔던 국내 여행도 늘 날씨가 좋았다.
제일 처음 날씨 운이 없었던 여행은 비행기를 10시간(경유였으니까) 정도 타고 간 유럽 여행에서였다. 3월 말이었음에도 갑자기 기온이 뚝 떨어진 유럽은 무척이나 추웠고 맑은 날씨가 무색할 만큼 날카로운 바람이 자꾸 어깨를 움츠러들게 했다.
거기다 내 몸 상태도 정상이 아니었다. 여행 출발까지는 멀쩡했던 몸상태가 몸살 직전의 것처럼 갑자기 안 좋아졌고, 나중에는 체하기까지 했었다. 엔간해서는 약도 잘 먹지 않고, 친구가 싫어할 만한 일은 조심하는 내가 중간에 통역자가 되는 걸 좋아하지 않는 친구에게 통역을 부탁해서 현지 약국에서 약을 사 먹어야 할 정도였다. 반나절은 숙소에서 누워있었다. 그러니 여행의 질이 좋기만 할 리는 없지 않은가.
당연히 ‘비싼 돈 들이고, 귀한 시간 들여 여기까지 와서 지금 이게 뭐지?’하는 허망함이 밀려왔었다.
사고 여행을 하면서 내 머릿속의 날씨는 내리 맑음이었다. 만나는 사람들은 모두 친절하고, 동행이 없어도 신나며 돌아다녔다.
하지만 실제 여행은 그런가. 대부분 친절한 사람들이었지만, 내가 동양인이라는 이유로 무례한 농담을 던지고 도망치듯 사라진 프랑스 소년도 있었고-심지어 길을 물어봤었던 아이였는데 굳이 내가 있는 곳까지 쫓아와서 한 짓이었다.- 뭘 그런 걸 묻느냐는 눈빛으로 일부러 빠른 말로 대답하는 스위스 인, 일본어를 못한다는 것을 확인했으면서 일본말로 길게길게 말을 늘여 질문을 하고 바보취급하듯 ‘이에’하며 계산을 끝내던 일본인도 있었다. 더 심하게는 테러를 당할 수도 있고, 교통사고를 당하는 불행이 나만을 피해 갈 이유는 없다.
그럼에도 실전처럼 해보자, 했던 사고 여행에서 나는 더없는 날씨 요정에, 어려움이 하나 없이 쓱쓱쓱 여행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조금 웃음이 났다.
이봐요, 글쓴이 양반. 이러면 상상이야!

그래서 비 내리는 여행을 상상하던 중 시그나기가 눈에 들어왔다.
시그나기를 생각하면서 여행 중 비가 온다면, 이곳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진을 찍기 무척 번잡하고 힘들겠지만 대신 마음에 도록도록 떨어지는 풍경들이 더 잘 스며들 것 같다. 붉은 지붕도, 그 사이를 채운 초록도, 성벽의 회색도, 그 안에 담긴 슬픔의 역사와 비 사이로 번지는 작은 가게들의 불빛도 얼마나 다정할까.
물론 이것도 상상일 뿐이다. 진정 사고 여행이라면 이런 낭만적인 비가 아니라 장대비가 쏟아져 아무것도 못하는 난감한 하루에 빠져 보아야겠지. 폭우를 만나 숙소까지 가는 길에 쫄딱 젖을 수도 있고, 그 빗기운에 감기에 걸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넓고 번잡한 도시가 아니라 작고 자연이 가까운 곳에서 만나는 비는 나쁘지만은 않을 것 같다.
비가 잦아들거나 그치고 난 다음 성벽을 오르는 길에는 살짝 한기가 돌지도 모르겠다.
씻은 후 말간 얼굴을 보여주는 저 멀리의 코카서스 산들을 보며 뜨거운 커피 한 잔이 간절해질지도. 보드베 수도원에 다다를 때는 깨끗한 햇살에 선크림을 덧바를지도 모를 일이다.
파리 여행에서처럼 성당 내부를 둘러보다 예배 시간에 맞닥뜨려 가톨릭과는 다른 성사의 경험을 하게 되는 것도 좋을 것 같다. 세계 공통인 가톨릭 예배 형식 덕에 파리에서는 무난하게 미사를 드렸지만, 정교회의 예배는 어떨지. 무척 궁금해졌다.
또, 와인으로 유명하다는 조지아 그중에서도 와인의 중심지라는 시그나기에 왔으니 와인아이스크림을 먹어야겠다. 그러려면 날이 덜 추워야 할 텐데... 날이 춥다면 아마 나는 뜨거운 커피도 한 잔 더 시키겠지? 와인아이스크림 먹다 추워지면 커피로 몸 덥히기

숙소에 돌아와 살짝 젖은 운동화 속에 휴지를 뭉쳐 넣어두고, 따뜻한 물로 씻은 후 침대에 누워 돌아보는 시그나기의 하루는 무척 맛있는 만찬처럼 기억될 것 같다.
조금은 무거운 몸으로 컵라면을 하나 뜯어 뜨거운 물을 부으며 흥얼흥얼 노래를 부를지도...
백만 송이 백만 송이 백만 송이 장미를 아낌없이 아낌없이 아낌없이 시그나기
으어으어 응야냠냐 후루룩 후루룩 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