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가 또 유산을 했다.
임신한 줄도 몰랐던 상황에서 유산을 했던 첫 번째,
임신 확인을 하고 8주쯤에 유산이 되었던 두 번째.
이번에는 오 개월 정도 머무르다 갔으니 다음에는 아이의 얼굴을 볼 수 있을까.
하지만 아내는 이제 마흔이 넘었다.
세 번째 유산이니 습관성 유산으로 볼 수 있다며, 아내의 나이까지 고려하면 자연임신과 출산은 더욱 어려울 수 있다던 의사의 말이 떠올랐다.
눈을 감은 채 누운 아내의 얼굴이 무척 지쳐 보였다.
눈꺼풀 아래로 동자가 움직이는 게 보이는 걸 보면 자고 있지는 않은 것 같다.
아내 역시 말을 하고 싶은 마음이 아닌가 보다.
- 저녁 먹고 와요.
물을 건네주고 싶은 마음이 들게 메마른 목소리다.
내가 굶는 것이 걱정되는 게 아니라 혼자 있고 싶다는 의미일 게다.
나는 집에 다녀오겠다며 필요한 것은 없는지 물었다. 아내는 잠시 생각하다
- 엄마한테 연락하지 마요.
하고는 눈을 감았다.
11월에 접어든 늦가을의 저녁해가 재빨리 사라지고 있었다.
차창을 내리니 오싹한 찬 바람이 잽싸게 들어왔다.
"그래도 이런 찬 바람 맞으면 정신이 번쩍 들어서 좋더라."
오랜만에 열어본 서랍에서 발견된 오래 전 사진처럼 그녀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늘 나의 불행과 붙어 다니는 그녀의 기억.
나도 모르게 욕이 나온다.
- 씹할, 이제 나를 좀....
하다 말을 삼킨다. 당치 않은 원망은 의미가 없다.
병원 앞에서 신호에 걸렸기 때문일까. 첫 사거리에서 또 신호에 걸렸다.
시야 저편까지 모두 빨간 빛을 바라보다 한숨을 쉬었다.
그녀는 아내와 무척 친하게 언니, 동생 하는 회사 동료였다.
그녀가 나와 사귀었다는 걸, 회사에서 가깝게 지낸 사람들은 모두 알고 있었다.
그녀와 아내가 친한 사이였다는 건 더 많은 사람들이 알았다.
그녀가 아내를 좋아했기에 우리 데이트에 아내는 종종 함께 했었다.
그녀가 다른 지역에 있는 회사로 이직을 하며 우리 관계에 변화가 생겼다.
그녀가 이직한 직후 그녀와 친하게 지내던 최 선배와 금전적 관계가 있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
나는 그녀가 내게는 청하지 않았던 도움을 그에게 받았다는 게 불쾌했다.
그녀도 나도 부모가 저질러 놓은 빚갈망을 하느라 경제적 여유가 없었다는 걸 감안해도 무언가 괘씸했다.
그 선배가 그녀를 좋아했고, 그녀 역시 나와 그 선배 사이에서 잠깐 고민했었노라는 이야기는
아내가 해 주었다.
그녀에 대해 물어볼 말이 있어 시작된 아내와의 만남은
육개월 가까이 반복되면서 조금씩 변질되었다.
여섯 살 연상의 아내는 경제적으로 그녀보다 안정되어 있었고,
이것저것 하고 싶은 게 많은 그녀보다 나를 우선시해 주었다.
아내와 감정이 깊어가면서 사내에서 우리 관계를 눈치챈 사람들이 나왔고
주변에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듣던 아내는 힘들어 했다.
나는 아내에게 장거리 연애를 시작하면서부터 그녀가 변해갔다고 이야기했다.
그녀가 먼저 변심했으므로 우리는 떳떳한 관계라고 생각하도록 이야기한 게 맞았다.
그러나 최 선배는 그녀가 퇴사한 후 삼개월 정도 지났을 때 결혼했다.
7,8개월 전에 맞선을 봐서 만난 여자라고 했다.
그녀는 우리 사이가 결혼을 앞두고 있다는 걸 전혀 모르는 채 아내와 연락을 이어가고 있었다.
"유민 씨가 뺨이라도 때리면 나는 그냥 맞아야겠죠?"
우리가 사귀는 사이라고 그녀에게 말할 생각이라며 아내는 걱정을 했다.
그녀가 아내의 뺨을 때릴 만큼 나를 사랑했을까.
확실한 건 아내에게 배신감을 느낄 만큼 그녀는 아내를 믿고 의지하기는 했다.
"그럼 내 핑계 대요. 나한테 욕하고, 맞아줄 테니까 찾아와서 나를 때리라고 해요."
그 순간 우리는 악다구니를 쓸게 분명한 나쁜 여자 앞에 선 불운의 연인이 된 기분에 젖어있었다.
그녀가 그럴 사람이 아니라는 생각은 아내도, 나도 하지 않았다.
"유민 씨가 우리 결혼식 사진 찍어주면 회사 사람들이 뒷말 못할 텐데."
아내는 친한 사람들에게, 그녀도 우리 관계를 알고 있었으며 충분히 축복해 줬다고 말해둔 상황이었다.
그래도 믿는 사람은 없는 것 같았다.
아내는 그녀에게 결혼 선물로 우리 결혼식 사진을 찍어달라고 부탁할 생각을 했다.
그녀가 우리 결혼식에 와서 한 번이라도 웃는다면 친한 동생 남자 뺏어 결혼한다는 뒷말은 없어질 것이다.
- 운명처럼 너무 자연스럽게 우리가 사랑하는 사이가 되어 있었어.
아내의 말에 그녀는 '아, 운명?'하더니 아무 말 없이 아내가 하는 말을 계속 듣기만 했다고 했다.
그래도 축하한다고 했다니 아내가 부탁하면 들어줄만하다고 생각했다.
"경미 씨가 부탁하면 들어주지 않을까요?"
하지만 아내가 그녀에게 들은 답은 거절이었다.
여전히 무덤덤한 얼굴로
- 언니, 내가 그 결혼식에 나타나면 사람들이 나를 뭐라고 생각할까?
물었다고 했다.
아내는 대답하지 못했다고 했다. 그저, 너 내 결혼식 안 봐도 돼?, 라고 후회하지 않겠냐고 물었지만 그녀는 웃기만 했다고 했다.
결혼하고 한두 차례 더 아내는 연락을 했던 거 같았다.
우리 인연이 이것뿐이냐, 이렇게 끝내고 싶냐, 전화를 걸어 만나자고 했지만
우리 관계는 이미 예전에 끝났는데 언니가 그걸 몰랐다니 조금은 의외라고 했다고 한다.
첫 아이를 유산하고 아내는 그녀에게 메일을 보냈다고 했다.
그녀의 회신을 받고, 아내는 한동안 컴퓨터 화면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화면을 들여다봐도 아내는 아무런 말도 없었다.
'나는 언니를 잊고 살고 있어요. 언니도 내 생각이 나지 않도록 평안하게 잘 살아요.'
그녀는 알고 있었을까.
미안하다는 말을 아끼고, 우리가 떳떳하기 위해 그녀가 악역을 해주기를,
주변의 시선으로부터 자유롭기 위해 그녀가 바보가 되어주기를 바랐던 만큼
우리는 그녀를 완전히 지우고 살기 어려울 거라는 걸.
우리 부부가 살아가는 동안 만나게 될, 이유를 알 수 없는 불행을 만날 때마다
그녀를 떠올리게 될 거라는 걸.
우리의 밑바닥을 그대로 비추는 그녀를 우리만 기억하며 살게 될 거라는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