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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립 Oct 18. 2024

늦은 청혼

BGM
IU - 그 애 참 싫다



술을 거나하게 먹은 네가 나를 데려다준다고 한다. 허리에 감은 손은 네 차로 끌고 간다. 결국엔 택시를 타고 귀가할 것을 알면서도 네 손에 내 몸을 맡긴다. 적막이 흐르는 차 안에서 네가 내 턱을 그러쥐고 입을 맞춘다. 감정 섞이지 않은 혀가 나를 마구 휘젓는다.


차 안엔 온통 욕망의 공기로 가득하다. 옷을 걷어올리는 너의 손엔 알코올 냄새뿐이다. 그런 너를 바라보는 내 눈에서도 알코올이 쏟아져 흩어진다. 술이 감정을 집어삼킨 것인지, 감정이 술을 집어삼킨 것인지 서로의 감정 따위는 안중에 없다. 네가 그렇고, 내가 그렇지, 뭐.


알고 싶지 않은 너의 한숨을 뒤로하고 차에서 내린다. 전화해. 네 말에 대답도 않은 채 문을 닫는다. 세 발자국쯤 걸었을 때 너에게서 전화가 걸려온다. 나는 받지 않는다. 




네 카톡 프로필 배경 사진은 아직도 나와 함께 도망친 날 밤하늘인데 나는 그게 다 아무 의미 없다고 되새기면서도 그놈의 카톡 프로필을 바꾸고 싶으니 여행 가자던 오래된 네 말에 무게를 실었다. 넌 그 여자와 몇 번이고 다시 만났고 내겐 늘 죄책감 때문에 그 여자와 함께 산다며 던진 쓴웃음을 기억한다. 


네가 이별을 고할 때마다 손목을 긋던 그 여자를 응급실로 들처업고 달려가던 그 마음이 사랑일까 두려운 내가 차마 너에게 내가 죽으려고 하면 어쩔 거냐 묻지도 못한 채 숱한 밤 혼자 있는 방 안에서 내게 없는 너를 죽였다.




네가 그 여자와 별거를 시작하고 나서 자정을 넘길 무렵 뜬금없이 노래방에 가자고 한 적이 있다. 집 앞에 찾아와 기다릴 테니 나오라는 전화에 못 이기는 척 나가자 어쩐 일로 취하지 않은 네가 서 있었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술을 마시며 노래를 불렀다. 


너는 내가 마지막으로 불렀던 노래를 듣고 한숨을 푹 내쉬었다. 너 앞으로 이거 부르지 마. 술에 취한 장난이라 생각해 그렇게 듣기 싫었냐고 내가 웃었다. 너는 따라 웃지 않았다. 가사가 참. 너는 뒷말을 술과 함께 삼키는 듯했다.


그 노래는 아이유가 부른 ‘그 애 참 싫다’였다.


그리고 얼마 있지 않아 너는 다시 그 여자와 함께 살기 시작했다. 그 여자가 다시 한번 손목을 그었다는 말을 나는 한참 후에나 들을 수 있었다. 술에 취한 너의 전화로. 너와 나의 마지막 전화였다.




그 여자가 정신병원에 끌려갔다는 소식을 들고 찾아온 너는 나에게 왜 항상 그 자리에 있냐며 울었다. 왜 한 번도 너에게 사랑한다고 말하지 않았냐고 화를 냈다. 그럼 너는? 반문하며 내가 조소했다. 대뜸 결혼하자고 조르는 너를 내버려 둔 채 집으로 돌아왔다. 다음 날 아침이 되어서야 너는 내게 카톡을 보냈다. 살 만하냐? 나는 단 한 글자로 답했다. 꽤 시간이 흐른 후에 나는 처음으로 네게 먼저 만나자고 연락했다. 두 계절을 건너뛰어서였다. 나 걔랑 같이 있어, 미안. 


네가 필요한 게 아니라 사람이 필요한 거니까 나와. 전화도 받지 않는 네게 화가 났다. 너는 다시 한번 내게 사과했다. 너는 언제나 나를 미안해하는 사람이었다. 


잘 살아라, 개새끼야. 내가 너에게 마지막으로 보낸 카톡이었다. 우리에게 다른 마지막이 다가올까 두려워하며 보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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