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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립 Oct 11. 2024

없는 번호

BGM
Alexander Jean - Whiskey and Morphine



그 모텔 앞엔 보신탕집이 있었다. 허름해 보여 폐업한 곳인 줄 알았으나 유리창에 붙은 싸구려 조명이 WELCOME이란 글자를 밝히며 식당의 생명을 환영하고 있었다. 중년 여성이 곧 부러질 것처럼 낡은 굽을 밟으며 비슷한 연배의 남성에게 기대어 걷고 있었고, 남성은 피우다 만 담배를 길가에 휙 집어던지곤 여성의 허리에 팔을 걸치며 그 모텔로 들어갔다.


담배가 처음으로 쓰다고 느껴져 피우다 말고 발로 지져 껐다. 그것을 본 남자는 내 어깨에 걸쳐진 가방끈을 붙잡고 나를 질질 끌어 그 모텔로 들어섰다. 예약은 내 이름으로 되어있었다. 땀에 젖은 내 셔츠를 찢을 듯이 벗겨내곤 나를 욕실로 밀어 넣었다. 수면제를 여러 알 삼켜야 보낼 수 있는 밤이었다.


알람 없이 캄캄한 아침을 맞았다. 내 머리채를 낚아채 다짜고짜 제 가슴팍에 묻어버리는 남자의 심장소리를 들었다. 어제 벗은 속옷을 주워 입곤 태연히 그 남자와 마주 앉아 밥을 먹었다. 어쩐 일로 그릇을 다 비웠냐는 남자의 질문에 가운뎃손가락을 올려 보여주었다. 먹어도 먹어도 허기가 채워지지 않았다. 무엇이든 먹어 치워야 채워질 것 같은 공허한 주말이 지나가고 있었다.




술 대신 차를 마시며 본인들이 얼마나 불행한 인생을 살고 있는지 떠드는 모임에 참석했다 나오는 길에 남자의 메시지 한 통을 받았다. 이곳으로 오겠다는 단문의 메시지를. 그것을 읽은 그 자리에 하염없이 우뚝 서 있었다. 두어 시간 후에 민트색 코트를 입은 남자가 내 옆에 서선 말없이 담뱃불을 붙였다. 내가 어디에 있는지 말해주지 않았다는 사실을 그때서야 깨달았다. 


술을 전혀 먹지 않는 남자가 내게 술을 권했다. 높은 건물 꼭대기층에 위치한 술집이었다. 주는 족족 받아마셨다. 남자는 가끔씩 상체를 기울여 내게 혀를 내밀어 보라고 시켰다. 내가 눈알을 뒤집고 혀를 내밀면 남자의 눈알이 성욕으로 뒤집어졌다. 나와 남자의 눈알이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면 다시 술을 먹었다. 내가 헤네시 한 병을 다 비울 동안 남자는 겨우 코로나 반 병을 먹었다. 먹지도 못할 술을 왜 먹자고 했냐며 내가 화를 내자 남자는 그래야 내가 앞에 앉아있을 것이 아니냐고 함께 화를 냈다. 우리는 서로 다른 양의 화를 내고 술을 먹으며 자정을 끈질기게 붙잡았다. 


남자가 담배를 피우러 가는 틈에 화장실로 뛰쳐가 모두 토해냈다. 다른 이유는 없었다. 그래야 술을 더 먹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끔찍하게 시끄러웠다. 전신을 뒤흔드는 음악소리를 애써 무시하며 드문드문 알아듣는 외국어를 귀에 쓸어 담았다. 방금 전 함께 테킬라를 섞어 마셨던 이 흑인은 자연스레 내 허리에 팔을 감고 좋은 바를 소개해주겠다는 말을 귓가에 속삭였다. 오늘이 마지막일 텐데, 뭐. 무작정 따라나섰다.


계속해서 입에 물려지는 담배를 빨아댔다. 알 수 없는 맛이 났다. 많은 담배를 피워봤다고 생각했으나 이것마저 자만이었구나 싶어 또 한 번 내가 우스워졌다. 술을 피우는 것인지 담배를 마시는 것인지 모를 정도로 질척이며 젖었다. 종종 혀도 함께 섞었던 것 같다.


서로의 술기운을 입술로 확인하던 와중 눈을 떴을 땐 멀지 않은 거리에 서서 나를 쳐다보는 남자가 서 있었다. 다른 남자와 잠자리를 하는 것을 보고 싶다는 말을 자주 했던 그 개새끼가. 내가 그 개와 눈을 마주치고 나서 가장 먼저 확인한 것은 구역질 나게도 남자의 벨트 아래 어딘가쯤이었다.


정신 차리고 보니 또 남자의 배에 그려진 문신이 눈앞에 있었다. 반쯤 채워진 문신이 하찮고 꼴 보기 싫어 취향도 아닌 것으로 고르고 골라 연장한 네일팁으로 있는 힘껏 할퀴었다. 남자는 내 인생을 꼭 망쳐버리겠다고 선언했다. 대답하지 않은 채 집으로 왔다. 


집은 너무도 말끔했다. 꼭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는 것처럼. 눈에 보이는 것들을 모조리 집어던졌다. 그제야 좀 사람 사는 집 같았다. 곧장 창문을 열고 뛰어내렸다. 착각인 듯한 사람 비명소리가 들렸다.




다리가 부러진 채로 병원에서 나왔다. 사는 것만큼 죽는 것도 어려웠다. 남자에게 전화를 걸어 바다에 가자고 말하며 울었다. 무슨 일 있냐는 남자의 질문에 또 대답하지 않았다. 전에 같이 죽자고 했었지. 대신 반문했다. 이번엔 남자가 대답하지 않았다. 병신새끼. 내가 토하듯 욕설을 읊조리자 남자가 웃음을 터뜨렸다. 그거 알아? 너는 욕할 때 제일 귀여워. 내가 웃으면서 울었다, 울면서 웃었다 하는 것을 한참 듣더니 이윽고 한 마디를 내뱉었다. 


기다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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