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일 전]
오빠, 오늘은 달이 예쁘게 뜨는 날이래요. 전에 내가 그랬죠. 사랑한단 표현으론 부족한 것 같아 더 나은 표현을 찾다가 일본어로 달이 예쁘게 떴다는 말이 사랑한단 뜻으로 통용되는 것을 알았지만, 일어를 할 줄 아는 오빠는 이미 알 것 같아 할 수가 없었다고요.
내가 여태 오빠가 알아듣지 못하는 말로 사랑한다고 말해서 나를 떠났나요. 내 사랑이 모자라다고 생각했나요. 나는 아직도 이 자리에서 사랑을 위한 유서를 써요. 내가 섣부르고 모자란 건 사랑이 처음이라 그래요. 이젠 더 잘할 수 있는데.
[2주 전]
당신 없이 사는 법을 배우고 있어요. 무엇이 됐든 괜찮다는 말이 듣고 싶다면 이따금 찾아오세요. 내가 당신에게 챙겨야 할 사람이 아니라 그저 함께 가는 사람이 될 수 있을 때쯤 우리 다시 만나요. 이렇게 힘들 때마다 조건 없이 사랑하고 응원하는 사람이 멀리 있다는 것을 알아줬으면 좋겠습니다. 잘 지내요. 내가 사랑하고 있으니 행복했으면 좋겠습니다.
[3주 전]
네가 뱉은 사랑해 그 세 글자에 내가 얼마나 추락하는지 넌 모르지. 네 마음은 전혀 예측도 할 수 없는 그 별거 없는 세 글자에 나는 한참을 울었다. 전보다 마른 몸으로 창백하게 읊는 네 시간들을 하나하나 주워담으며 더 사랑하지 말아야지 내도록 다짐하다 아이처럼 잠든 네가 너무 예뻐 한참을 바라보곤 두터운 한숨을 네 집 가득 메운 채 새벽녘 택시에 몸을 실었다.
너는 늘 내가 살아가는 이유이자 죽고 싶은 순간이었다. 이렇게 영영 지울 수 없는 기억이 될까 두려워 수면제와 안정제를 섞어 마구 삼킨 채 들이미는 태양의 정수리를 견뎌야만 했다. 그럼에도 네가 다시 보고 싶은 나를 참으며.
[한 달 전]
당신은 왜 아직도 바다 같은지. 밀물과 썰물을 반복하며 나를 적시고 말리며 세계를 뒤흔든다. 수영하는 법도 모른 채 그 바다로 뛰어들었다. 사랑에 익사하고 싶었다.
그러나 당신은 여전히 바닷물 같아서 마시고 마셔도 계속해서 마시고 싶어진다. 당신과 스치는 찰나를 모두 삼켜 여생을 채우고 싶어진다.
인간이란 게 너무나 간사해서 자꾸만 바라는 게 생긴다. 그게 사랑이고 싶진 않았는데. 추악한 자정.
[세 달 전]
사랑이 두려운 이유는 한 가지 이유로 시작했다가 수십 가지 이유로 끝내기 때문이다. 시작은 미약하나 끝은 창대하다. 이유는 찰나와 결핍과 충만이 얽히고설켜 예쁘게 젠가처럼 쌓이지 못한다. 대개 그 빌어먹을 이유들은 일상 곳곳에 숨어들어 오랫동안 숨 쉰다.
우리는 사랑에 시작과 끝을 갖다붙히지만 둘 중 무엇도 스스로 택할 수 있는 것이 없다. 나도 모르는 새에 사랑이 시작되어 나도 알고 싶지 않은 새에 사랑이 끝난다. 내가 나를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것이 사랑이다.
[세 달 전]
그 있지. 나도 내가 아까워. 그런데도 자꾸만 네게 주는 건 내가 나를 하찮게 여겨서도 아니고, 피부에 닿는 온도에 어리석게 사람을 느껴서도 아니야. 나 진짜 별거 바라는 거 아니고, 나 사랑한다고 한 마디만 해줘. 내가 아니면 죽을 것 같은 그 시선 한 번만 쏟아부어줘.
[네 달 전]
이 순간에 오래도록 숨쉬고 있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영원이란 단어는 떠오르지 않았다. 내가 유일하게 좋아하는 순간마저 그놈의 익숙함이란 이유로 잃게 될까 두려운 마음에서였다. 그런 내가 조금 염세적으로 느껴졌다. 계속해서 똑딱이는 초침으로 이 찰나가 만들어지는 것인데 나는 시계의 춤사위가 왜 이리도 지겨울까. 그러다 초침 소리가 들리지 않으면 불안할 게 뻔한데도.
[다섯 달 전]
여태까지 살면서 제일 운이 좋았던 일은 너를 만난 것이고 제일 운이 나빴던 일은 너를 만난 거야. 이젠 운이 좋은 날에도 네 생각이 나고 운이 나쁜 날에도 네 생각이 나. 기분이 좋아도 네가 떠오르고 나빠도 떠오르니 미치겠어.
[반 년 전]
딱히 네게 순수한 사랑을 바란 건 아니었지만 딱히 네게 순수한 목적을 원한 것도 아니었다. 네가 무엇이든 상관없다는 마음은 금세 무엇이든 괜찮다는 사랑으로 바뀌었다. 그 금세 중에 나는 많은 것을 잃었지만 사랑이라 부르기도 뭐한 마음은 또 자라 갈망이 되었다.
네 말 한마디 한마디가 살아가는 이유이자 죽고 싶은 순간이었다.
[반 년 전]
다시금 생각해보니 나만 너와의 대화를 톺아보는 게 아니었구나 싶어 괜시리 우리가 가엽고 네가 좋았으며ㅡ 보고싶어.
[8개월 전]
짝사랑이란 게 얼마나 찌질한지. 보낸 메시지의 수신 확인조차 무서워 들여다보지 못하고 네가 뭐하고 있는지 감히 궁금해하지도 못하는 내가 너무 비참해서 다 놔버릴까 싶다가도 아무 의미 없는 메시지 한 통에 금세 입이 찢어지는 날 보며 평생 남들에겐 해본 적 없는 욕을 내게 한다.
[9개월 전]
보고 싶어요. 처음엔 오빠가 좋아하는 것만 해주고 싶었어요. 그게 다였어요. 이제는 오빠가 싫어하는 것도 안 하고 싶어요. 내가 하면 싫을 것 같은 게 많아졌으면 좋겠어요. 생각해 보니 살면서 보고 싶다고 말한 것보다 오빠한테 보고 싶다고 한 게 더 많은 것 같아요. 그러니까 이제 그냥 나랑 만나요.
[1년 전]
환영받지 못한 존재에게 쓰는 짧은 편지
시간도 아물지 못하게 하는 것들이 있지. 평생을 곪고 썩으며 숨을 죽여야 하는 것들. 나는 이미 다 줘버렸기에 마음이 가난했고, 지켜낼 수 없는 존재인 너를 내가 먼저 놔버려야 했지. 나를 사랑할 줄도 모르는 내가 감히 누구를 품어. 수백 번을 긁은 목숨줄은 질기고 질겨 나를 견뎠지만, 견디고 견뎌 겨우 결국 다시 내가 됐다. 미안해. 다 내 잘못이야. 다시는 무언가를 마음에 담지 않을게. 살려고 발버둥 치지도 않을게.
[지난 여름]
너한테 연락이 올 수 없는 시간임을 알면서도 문자 알람음이 울리면 다급하게 휴대폰을 확인해. 내게 오는 문자는 택배, 스팸. 그리고 너니까. 그러다보면 너는 뜬금없는 문자 한 통을 날리지. ‘나 돌려서 말 못하는 거 알지?’ 네가 생각 없이 보내는 문자 한 통에도 나는 꾹꾹 터치를 하며 안다고 답장해. 그럼 너는 바로 답장이 오지. ‘지금 보고싶어’ 그 말에 나는 거울 앞에 앉아서 화장을 고쳐.
[최초의 시간]
그날은 초록의 바람이 불고 햇빛이 쏟아지는 날이었다. 너는 목 끝까지 단추를 채운 셔츠를 답답해하며 담배를 태우고 있었고 그 연기에선 외설적인 의욕이 가득 서려있었다. 그걸 모조리 집어삼키고 싶었다. 글쎄, 불어오는 바람과 쏟아지는 햇빛 탓이었을까. 담배를 물고 있는 네 입술이 왜 자꾸만 아렸을까. 닿을 수 없는 유토피아가 펼쳐진 느낌이었다. 너는 그런 사람이었다. 싱그러운 초록을 입은 진득한 소용돌이. 나는 여태껏 길고 진득한 문장 속에서 살았다. 매번 잘못된 맞춤법에 넘어졌고, 알 수 없는 띄어쓰기 사이를 헤매었다. 그런 내게 그 소용돌이는 어쩌면 그 문장을 다 망쳐버릴 수 있는 수단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오늘은 숨이 막히게 비가 쏟아진다. 그날의 초록이 자꾸 붙잡고 싶어질 정도로. 그게 무엇이었든 결국 너는, 나를 망쳐버릴 수 있을까. 나를 잔뜩 휘젓고 유유히 사라질 수 있을까. 괜찮다. 때론 외설적이고 직설적인 것이 자해적 위로가 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