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어 교수에서 한국어 교수로
언어 선택의 혼선
대만에 와서 처음에는 대만 남부에 있는 사립대에서 만 3년간 일본어를 가르쳤다.
사립대에서 일본어를 가르치는 동안 우연한 기회로 겸임으로 같은 지역에 막 개설된 국립대 신설 학과에 가서 한국어 한 과목을 담당한 것이 인연이 되어 그 학교에 전임 조교수로 들어가게 된 것이다. 언어를 가르친다는 점에서 큰 차이가 없었다. 다른 점이 있다면 내가 학생을 대하는 마음이 많이 달랐다. 내 모국어인 한국어, 한국 문화에 관심과 열정을 가진 학생들이 너무 예뻐 보였고, 사랑스럽기까지 했다. 그리고 그들을 도와주고 싶은 마음이 우러나왔고 사명감 같은 감정도 생겨났다. 이러한 감정들은 일본어를 가르칠 때는 거의 느껴보지 못했다. 실로 이러한 감정들이 나를 일본어 교수에서 한국어 교수로 변신하게 해 준 동기가 되었다. 일본 유학 시절에는 내가 대만에서 한국어 교수가 되리라고 꿈에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일주일에 한 번 한국어를 가르치러 이 국립대로 향하던 그때의 기분을 아직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그 학교로 향하는 내 발걸음은 너무 가벼웠고, 그곳에서의 2시간의 강의 시간은 나로 하여금 중국어도 아닌, 일본어도 아닌, 오로지 ‘모국어’와 같이 하는 시간이기도 했다. 한국에서 계속 사는 사람은 내가 지금 무슨 소리를 하고 있나 생각하겠지만, 당시 나는 내 모국어를 쓸 기회가 없었다. 학교에서는 일본어와 중국어로, 집에 돌아오면 중국어로, 간혹 남편과는 일본어도 썼다. 그렇기에 한국어를 사용할 기회가 유일하게 일주일에 한 번 한국어를 가르치러 갔을 때 생기는 것이다. 일본 유학 시절에는 한국 유학생들이 주위에 있어 한국어를 쓸 기회가 적지 않았다. 그러나 대만에 오고 나서는 친구도 선후배도 가족도 주위에 없어서 한국어를 쓸 기회가 거의 없었다. 그래서 그날은 차 안에서 한국 노래 CD를 크게 틀어 들으며 그 학교로 향하곤 했다.
그런데 한국어를 가르치며 내 머릿속은 가끔씩 혼란에 빠지곤 했다. 내 입에서 나오는 말이 한국어인지, 일본어인지, 중국어인지 순간적으로 인지 판단이 안 될 때가 있었다. 그러한 증상은 내 몸이 피곤하거나 긴장할 때 혹은 무의식 중에 나타났다.
이것은 내가 막 국립대에 들어간 지 얼마 안 되었을 때의 일들이다. 한국어 강의 중 한국어 문법을 설명할 때 일본어가 튀어나왔다. 뭔가를 곰곰이 생각할 때 무의식 중에 일본어가 나온다. 그렇다고 내가 일본인처럼 일본어가 유창해서 그런 것은 결코 아니다. 11년간 일본에서 생활하며 자주 사용했던 말들이 무의식 중에 튀어나오는 것이었다.
그 당시 우리 학과는 1학년 때는 일본어를 필수로 이수하고, 2학년이 되면서 일본어, 한국어, 베트남어 중 하나를 전공어로 선택했다. 그래서 내가 한국어 강의에서 무의식 중에 일본어를 쓰면 학생들이 다 알아듣고 웃곤 했다. 이런 실수를 자주 범하다 보니 내가 하는 말에 극도로 예민해지고 조심스러워졌다. 만약 이곳이 일본이라면 전혀 문제되질 않을 일이었다. 무의식 중에 튀어나올 일본어를 억누르고, 떠오르지 않는 중국어를 머릿속에서 조합하며 말을 해야 했다. 내 머릿속은 언어 선택을 둘러싸고 쉴 틈 없이 가동 중이어야 했다. 강의를 끝내고 강의실을 나갈 때, 언어 선택에 실수하지 않으면 오늘 성공했다며 안도했던 기억이 떠오른다.
하루는 한국어 강의를 하러 다른 학교에 가는 날이었다. 태풍이 와서 비바람이 세차게 불고, 도로가 여기저기 폐쇄되어 버렸다. 내가 운전해서 가는 길도 폐쇄되어 다른 길로 돌아가야 했다. 그 길은 내가 처음 가는 길이었다. 내비게이션도 없던 때라서 나는 비바람 속에서 한참을 헤매었다. 결국 강의 시간 30분이 지나서야 강의실에 들어갈 수 있었다.
그날은 개강 첫날이라 처음 마주하는 학생들이었다. 30분이나 지각해 낯선 교탁에서 낯선 학생들을 마주하며 자기소개를 시작했는데, 10분간을 전부 일본어로 말해 버린 것이다. 대만에서 한국어 강의에 나가서 대만인 학생들에게 일본어로 자기소개를 한 것이다. 정말 웃지 못할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그 당시 나는 모국어인 한국어도 완전하지 못했았다. 한국에서 방문하는 한국 학자들에게 “한국어, 참 잘하시네요!”라는 칭찬을 받기도 했다. 그 칭찬은 내가 한국어를 잘하는 외국인으로 보였다는 의미였다. 내 한국어가 부자연스럽다는 것을 나 자신도 알고 있었다. 일본어학교를 거쳐 대학, 석사, 박사 과정을 포함해 총 11년 동안 일본어로 생각하며 일본어로 생활했던 언어 습관이 이곳 대만에서 한국어를 가르치고 중국어로 생활해야 하는 데 걸림돌이 되고 있었다.
한국어로 논문 투고를 하면 부적절한 표현이 있다는 심사 의견도 나왔다. 직접적으로 표현하지 않고 돌려서 표현하는 일본어 특유의 표현 방식이 한국어 학술지에서는 선호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자신의 모국어가 어색하다는 것은 창피해서 어디 가서 꺼낼 수도 없는 이야기였다. 간혹 학술회의 등에서 만나는 학자들이 “교수님은 3개 언어를 능숙하게 잘하셔서 좋겠어요”라는 말을 할 때면 나는 줄곧 이렇게 대답한다. “아뇨, 제대로 하는 언어가 없어요.”. 남들은 내가 겸손 떠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지만, 그건 사실이다.
한국어를 가르치고 연구하면서 의도적으로 4년 정도 일본어 논문과 책을 멀리했다. 일본어 표현에서 벗어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 노력 덕분에 한국어는 모국어라서 많이 되찾았지만, 일본어는 많이 퇴보되었다. 유득유실(有得有失)이라는 말이 있듯이, 얻는 것이 있으면 잃는 것도 있는 법이다. 괜찮다.
일본어로 살아가던 유학 생활을 마치고, 대만에서 한국어 교수로 새롭게 출발했을 때, 나는 학교에서는 한국어, 중국어, 일본어라는 세 언어 사이에서 혼란을 겪었고, 집에서는 가족들이 사용하는 중국어와 대만어의 혼용, 그리고 내 부족한 중국어 실력에 끊임없는 피로감을 느끼며 지내야 했다. 그 당시 내 앞에 놓인 언어의 장벽은 거대하고도 높게만 보였다.
언어에 천부적인 재능이 있는 사람이라면 세 가지 언어 정도쯤은 수월하게 다룰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내게는 참으로 힘든 과제였다. 특히 익숙한 일본어와 부족한 중국어 사이에서 헤매는 자신을 마주하며, 언어 혼용으로 인한 피로감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