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내 인생에서 가장 순수하고 찬란했던 첫사랑의 기억 (1)
행운의 숫자처럼 토익 990는 모든 대학생들의 꿈의 숫자였다. 제한 시간 안에 괄호 안에 들어갈 말을 얼마나 많이 맞추냐에 따라 나의 스펙이 결정되었다. 취업난에 대학 초년생들도 방학이 되면 잘 나간다는 토익 학원에 줄을 서서 토익을 접수할 만큼 토익의 위상은 대단했다. 다들 아침부터 학원에 나오느라 모자를 푹 눌러쓴 채 피곤한 얼굴색이 만연했고 장장 4시간의 풀타임에 넋이 나가는 친구들도 많았다.
그러나 나는 달랐다. 내 옆자리에는 그 남자가 있었고 쉬는 시간이면 자판기에서 음료수를 꺼내 마시라고 나에게 건네주었다. 수업이 끝나면 같이 커피를 마시고 버스정류장까지 걸어갔었는데 그 거리가 어찌나 짧게 느껴지는지 제발 버스가 늦게 왔으면 하고 마음속으로 기도하던 내 모습이 지금도 생생하다. 사랑에 있어서 제일 긴장되고 간지러운 순간이 있다면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기 전의 순간이 아닐까. 이 사람이 내 사람이 될지 안 될지 모르는 긴장된 상태지만 누구보다 놓치기 싫은 순간이기에 최선을 다하는 것, '썸'이라고 소위 말하는 그런 관계가 토익 학원을 다니는 내내 우리 둘 사이에 맴돌았다.
'도대체 언제 고백하는 거야..? 그냥 이렇게 지내는 건 아니겠지..?'
한 달을 이런 상태로 지내다 보니 마음이 조급해졌다. 그리고 나이가 든 지금도 나는 생각한다.
여자는 관계가 불안정하면 조급해진다고. 그래서 나중에 언급하겠지만 나는 항상 결혼이라는 관계 앞에 조급해졌다. 다시 그때의 시점으로 돌아가자면 순간의 소중함이 애틋하고 소중한 것이지 이 순간이 지속되면 변화를 원하는 인간의 속성처럼 나 역시도 조금씩 불만과 불안함이 생기기 시작했다. 우리는 사귀는 건 아니었지만 서로의 일상을 공유하고 시간이 생기면 함께 맛있는 것을 먹고 시간 가는 줄 모르며 서로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마음속으로 고백을 하는 장면, 고백을 받는 장면을 상상하며 나 혼자 그렇게 몇 날 며칠을 김칫국을 들이켜던 어느 날,
"나 할 말 있는데.. 잠깐 들어줄 수 있어?"
하늘이 여자들에게 내려준 선물은 '촉'이다. 선물 받은 여자들의 주파수는 짧은 찰나의 순간이라도 그게 무엇인지 본능으로 안다.
"나 한 번도 여자 친구를 사귀어 본 적이 없어서 어떻게 말해야 할지 많이 고민했는데.. 우리 사귈래?"
그렇게 나는 생애 첫 연애를 시작했다.
그리고 그날밤 나는 기도했다. "감사합니다! 저 앞으로 정말 착하게 살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