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이 큰 관심사인 내게는 매년 2월 즈음 큰 행사가 있다.
바로 음악의 아카데미 상이라고 하는 '그래미 상' 시상식이 있다.
이 시상식 자체에 큰 관심을 두진 않았지만 조금 커가면서, 또 기타를 제대로 치기 시작할 무렵부터 아이스하키 플레이오프 다음으로 중요한 연례행사가 되었다.
영화에 관심 있는 사람들은 오스카 이야기를, 음악이라면 그래미 상을 두고 열띤 토론을 볼 수 있는 모습도 여기저기서 보곤 했다.
작년, 내가 정말 좋아하는 기타리스트 중 하나인 카를로스 산타나의 '슈퍼내추럴' 앨범의 인기는 어마무시했다.
참여한 게스트들도 화려했고 기대 이상으로, 상업적으로도 초 대박이 났다.
이곳 병동에서는 시상식이 코 앞으로 다가왔지만 아무도 그래미에 대해서 얘기하지 않는 분위기였다.
저녁 시간 즈음 병동 식당에 앉아 TV를 켰다.
나는 주로 내 방에서 밥을 먹지만 오늘은 시상식을 보기 위해 정말 오랜만에 식당에 앉았다.
대부분 각자 자기 방에서 식사를 하기 때문에 제법 넓은 규모의 식당은 항상 한산했다.
이 날도 별 다를 바가 없었다.
시상식이 한창 진행 중일 때 사람들이 조금씩 모이기 시작했다.
한마디 대화도 안 해봤던 사람들끼리 음악에 대하여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중년이 훌쩍 지나 보이는 남자가 한마디 했다.
"야... 내가 어릴 때 자주 듣던 그 산타나가 아직도 이렇게 건재하다니... 게다가 그래미를 정말 씹어 먹고 있잖아! 대단해... 정말 대단해."
그렇다. 이번 그래미에서 큰 이변은 없었다.
카를로스 산타나는 올해의 곡, 앨범 등 가장 큰 상, 또 그 외 여러 개 상을 휩쓸었다.
전설이 또 다른 전설이 되는 순간이었다.
TV시청 제한 시간이 훌쩍 넘어버렸지만 모두가 너무 즐겁게 보고 있어서 특별히 시상식 끝날 때까지 허용해 준다고 간호사가 말했다.
우리 모두 지극히 정상적인 순간을 즐기는 중이었다.
아저씨 한 분은 자기가 노래할 테니 내게 기타를 가져오라고 했다.
난 아저씨가 불러주는 코드대로 기타를 치고 이 중년의 남성은 가늘지만 꽤 고운 목소리로 노래를 하기 시작했다.
대부분 비틀스의 곡들이었다.
순간 식당은 소규모 공연장으로 바뀌었다.
늦은 밤 병동 버스킹이 되어버렸다.
제지받을 수 있고 규칙에 어긋난 것일 수 있지만, 모두가 즐거워하니 말릴 이유도 없었다.
간호사들도 신청곡을 외쳤다.
열댓 곡 했을까, 병동 어디에선가, 어느 여성 하나가 시끄럽다고 고함을 질렀다.
이 상황을 모두가 즐기고 있지는 않았나 보다.
아쉽지만 공연은 여기까지.
역시나, 음악의 힘은 대단하다.
이번 계기로 모르고 지내던 사람들과도 웃으며 인사를 하게 되었고 대화의 물꼬를 터주었다.
음악은 말 그대로 슈퍼내추럴, 초자연적인 힘을 발휘할 때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