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부터 병동이 시끌시끌했다.
어느 작은 남자아이가 병동 여기저기를 휘저으며 다니고 있었다.
엄마가 입원해 있어서 할머니, 이모와 함께 면회를 온 것이었다.
환하게 웃는 모습이 너무 귀여웠다.
아이에게 물어보니 이제 다섯 살이라고 했다.
아이 때문에 아침부터 시끌벅적 해져서 누군가의 신경을 건드렸을 수도 있었지만 모두가 흐뭇한 얼굴로 아이를 바라봤다.
나도 어느 순간부터 이 아이와 술래잡기 놀이를 하고 있는 게 아닌가.
(닥터 라구와의 면담)
"아까 그 남자아이, 참 귀엽더군요. 오랜만에 병동에 큰 활기를 몰고 온 거 같았어요."
"호호. 나도 봤는데 정말 귀엽더구나. 너도 예전에 그 아이 같지 않았을까?"
"그 아이처럼요? 에이... 그럴 리가요."
"왜? 나도 수십 년 전엔 그 아이처럼 귀여웠고 예쁨을 받았을 텐데. 호호."
"죄송합니다만, 상상이 가질 않네요."
"너에게도 마냥 우울과 불안만 있었던 건 아녔을 텐데... 어릴 때, 어떤 기분 좋은 순간들이 있었을까?"
한참 동안 생각에 빠졌다.
내가 아까 그 아이처럼 마냥 해맑게 행복했던 순간은 언제 언제였을까?
초등학교 1학년 때, 난 항상 받아쓰기 시험에서 100점을 받았다.
이 시기에 고모부가 나의 과외 선생님 역할을 담당했다.
코팅이 된 단어장을 수두룩하게 쌓아놓고 스파르타 식으로 공부를 시키셨다.
종종 눈물을 찔끔거릴 때도 있었지만 나름 즐겁게 공부했던 거 같다.
100점을 맞고 학교를 나서면 집으로 바로 가지 않고 고모와 함께 학교 옆 시장으로 향했다.
내가 좋아하는 만둣집에서 김이 모락모락 나는 찐만두 한 판을 놓고 먹었다.
또 옆집 순대가게에서 순대 한 봉지를 포장해서 집으로 향했다.
받아쓰기 100점 받은 날의 루틴이었다.
나에겐 행복이었다.
또 1학년 때다.
아무 영문도 모른 채, 선생님이 학교 마치고 남으라 하셨다.
왜 남으라고 하는지에 대해선 설명을 해주지 않으셨다.
불안감 시작이었다.
수업 후 다른 교실로 이동했다.
그곳에는 다른 남자아이 둘이 앉아있었다.
각자 자리엔 크레파스와 스케치북이 놓여있었다.
"삼오야. 그림 그리는 거 좋아하지? 여기에 '바닷속 상상화'를 그려봐. 그리고 싶은 대로, 마음대로 그리면 돼."
으잉? 갑자기 뭐지? 뭐, 어차피 집에서도 하는 거... 네.
신나게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종종 다른 아이들의 표정을 확인했다.
둘 다 어딘지 모르게 불편해 보였고 표정이 썩 좋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교실 밖 복도에 어머니들이 서 계시는 게 보였다.
한 시간 정도 흘렀을까?
어느 다른 선생님께서 오셨다.
우리 그림을 보시더니 내 그림을 들고 교실 밖을 나가셨다.
(며칠 뒤 교실)
"이삼오 앞으로 나와. 축하해 줄 일이 있어."
얼떨결에 교실 앞으로 나갔다.
"이번에 삼오가 그림 그리기 대회에서, 충청남도 모든 학교를 통틀어 동상을 받았어. 다들 박수!"
아... 내가 얼마 전 그림을 그렸던 게 대회였구나.
나중에 알았다.
나에게 부담을 주지 않으려고 고모와 고모부는 대회고 뭐고 언급조차 없었다.
기쁜 마음으로 상장을 들고 집에 들어섰다.
고모에게 상장을 보여주자 고모는 너무 기뻐하며 나를 연신 꼭 안아주셨다.
나도 매우 기뻤지만, 내심 씁쓸했다.
고모를 너무 좋아하지만, 엄마였으면 더 좋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린 나이에 무엇으로부터 인정받은 경험이 처음이었다.
나에겐 행복이었다.
소소하게 행복했던 순간들이 더 있었던 거 같은데...
생각을 더 해봐야겠다.
행복했던 순간을 다시 찾으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