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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망의 경계, 담장과 벽

경계인가 소통인가

by 빈솔 Bin Sole Feb 14. 2025
담장

담을 일컫는 말 가운데 담벼락과 담장 그리고 담이 있다. 그리고 담장을 만드는 방법에도 토담이나 돌담, 콘크리트 담, 철제 담 등 여러 가지 종류가 있다. 

담벼락은 담의 겉면을 말한다. 

담벼락에는 많은 이야기가 쌓여 있다.

우선 낙서가 떠 오른다. 요즘은 그래피티로 진화를 했다. 또는 벽화로 예술화, 고급화를 도모했다.

담은 예술로 태어나고 있다. 

담벼락은 또 술 마신 취객이 볼일 보는 곳이기도 했다.

담벼락은 힘든 사람에게 어깨를 건네 주기도 한다. 팔을 담벼락에 기대고 잠시 쉬어 갈 수 있는 곳이다.

어떤 사람들은 담을 넘어 가기도 한다. 월담이라고 한다. 필시 도둑 아니면 주인 집 망나니 아들일 것이다.

예전에는 담을 사이에 두고 수다가 이어지기도 했다. 서로 얼굴을 마주 볼 수 있도록 담이 낮은 집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담이 끝나는 곳에는 어김없이 대문이 뚫려 있다. 소통이 시작되는 곳이다. 

깨어진 병이나 철조망으로 무시무시하게 무장하고 있는 담도 있다.

대게 교도소이거나 군부대이거나, 아니면 대단한 부자집일 것으로 짐작되는 곳이다.  

담은 많은 상상거리를 제공한다. 담 너머에 무엇이 있을까? 

그러니까 담이 있다면 반드시 “담 너머”가 있는 것이다.

한계를 초월하는 힘이 담 사고에 담겨 있다. 

담장은 집의 둘레나 일정한 공간을 막기 위하여 흙, 돌 따위로 쌓아올린 곳이다. 

담장에는 식물이 자라기도 한다.

담쟁이 식물이 대표 선수로 뽑힌다. 그러나 담장 망친다고 집 주인은 반기지 않는다.

호박이나 박도 가끔 눈에 띈다. 

여름 날 아침 담장에 핀 나팔 꽃은 보는 사람에게 힘을 선사한다. 

흙담장은 시간이 지나면 금이 간다.

황토로 수리를 하면 수리한 부분의 색깔이 원래 담장 색상과 다르게 나타나서 금간 담장 표시가 드러난다. 

어떤 담장에는 철사로 금간 부분을 잇기도 한다.

어쨌거나 다소 금이 가기도 하고 색이 바래지기도 한 모습이 정감을 불러 일으킨다.

겨울 날 양지 바른 초가집 담장 아래에서 몸을 웅크리고 수다 떨던 옛날이 그리워진다. 

목장갑이라도 하나 끼고 있으면 모두로 부터 부러움을 잔뜩 받았던 그 시절, 가진 것이 없어도 행복하지 않았던가. 

돌 담장은 주로 제주도에서 보여진다. 

제주도에는 담장이 없다. 

엄밀하게 말하면 집 주위가 돌로 둘러져 있는 것이다.

담장이라기 보다는 바람 막이 이다.        

이제까지는 바깥에서 본 담벼락을 소개했다. 담벼락을 안에서 보면 어떨까.

안에서는 담벼락이라고 잘 하지 않는 듯하다. 그냥 담 이거나 담장이라고 하지 않는가.

안에서 보는 담장은 경계이다. 충실한 경계, 안과 바깥이 분명하게 분리되는 경계이다. 

그리고 소유 개념을 명확히 한다. 안은 내 것, 바깥은 남의 것이다. 

그래서 안에 들어 오면 안전을 느낀다. 

바깥으로 나가면 불안하다. 

모리스 블랑쇼는 그래서 바깥에 머물고 있다. 

블랑쇼가 나아가는 지점은 모든 문화가 그 영향력을 상실하게 되는 곳이다. 그 지점은 죽음, 병, 고독, 추방 등 한계 상황 가운데 ‘나’의 자기 동일성이 의문에 부쳐지는 지점이다. 또한 그곳은 모든 문화의 바깥이며, 가치체계를 가능하게 하는 세계와 구성적 담론, 그리고 예술의 문화 사회적 의미, 나아가 인간의 모든 의식적 가치 부여가 무효가 되는 곳이다. 그 지점은 인간의 유한성이 극적으로 드러나는 장소, 불가능성의 장소, 죽음의 장소이다, ‘바깥’, 즉 문화 세계의 바깥을 말하는 블랑쇼의 사유를 다시 바라보게 되면, 그의 사유가 일종의 비극적 사유이며 세계에서 추방된 자의 사유임을 알 수 있다. 하지만 블랑쇼의 사유는 비극과 추방으로 끝나지 않는다. 비극과 추방으로만 환원될 수 없는 어떤 지점이 존재한다. 우리는 비극적 사유 안에 개입하는 긍정적인 계기를 읽어야만 한다. 블랑쇼는 자아의 불가능성, 말하자면 자기 긍정의 궁극적 불가능성과 세계의 불가능성을 말하지만, 그 불가능성 가운데 하나의 긍정이, 나와 타자 사이에 ‘우리’라는 가능성이, 날것의 소통 가능성이 남아 있다는 것을 발견다. 여기서 나와 타자의 소통은 문화 바깥에서, 또한 모든 정치,경제,철학 이념의 지평 바깥에서 이루어질 것이다. 이 소통은 죽음으로 나아가는 존재이자 죽음을 드러내는 존재인 인간의 유한성의 나눔이자 바깥의 분절로서, 바깥으로의 탈존으로서 숨결을 나누는 것이며, 죽음 가운데 숨 쉬는 생명을 나누는 것이다.

모리스 블랑쇼의 명제, 즉 자아가 비로소 열리는 “탈존 ex-sistance”과 자아 ‘바깥’과의 관계선상에서 형성되는 “외존 ex-position”이 모두 개인의 존재 existence가 되는 인식론적 전환의 문제로 연결된다. 외존 즉 엑스포지시옹은 타인과의 관계를 중요한 주제로 삼은 몇몇 프랑스 철학자들 (레비나스 블랑쇼 낭시) 이 쓰고 있는 말이다 이 말은 자신 바깥에 놓임, 자신 바깥과의 관계내에 존재함, 즉 탈존의 한 양태를 표현한다 이 말은 탈존과 동근원적이며 둘 모두는 어원상 인간 존재의 근본조건인 “나” 바깥ex에 놓임sistere을,즉 나 바깥 과의 관계하에 있음을 나타낸다 또한 그것은 단순히 탈존의 의미에서 쓰이기도 한다 하지만 그것은 자주 타인이라는 바깥과의 관계에서의 인간 존재 양태를 가리킨다. 즉 외존은 타인과의 관계에서 자신 바깥으로 나감, 타인을 위해 자신을 드러냄과 같은 의미를 갖는다 레비나스가 말한 “말함은 물론 소통이지만, 모든소통의 조건으로서의, 외존으로서의 소통이다” 라고 말할 때 또는 낭시가 “문학은 존재하기 위해 단수적 존재들의 외존을, 그들 공동의 나타남을 포함한다” 라고 말하거나 나눔을 외존과 동일시할 대 - “나늠 또는 외존” 이 용어 외존을 발견할 수 있으며 그것은 또한 동사 외존하다의 형태로 레비나스 믈랑쇼 낭시에게 빈번히 나타난다 물론 엑스포지시옹의 역어로 노출이 자연스럽지만, 현대 철학의 맥락에서 그 본래적 의미 (즉 나 바깥에 있음)을 드러내기 위해 경우에 따라 다른 역어가 필요할 때가 있다 그들이 하이데거에 기원을 두고 잇는 이 용어를 하이데거 맥락에서 벗어나서 강조한 이유는 분명 인간존재의 정치적 또는 윤리적 성격을 부각시켜 보여주기 위함이다) 블랑쇼의 글쓰기는 사건으로서의 글쓰기이다 음악으로서의 글쓰기이다.

바깥의 경험은 “삶으로부터 추방되어, 경게선 바깥으로 내몰려, 추방 가운데 방황 할 수 밖에 없게 된채” 존재하는 경험이다 블랑쇼에게 그 본보기는 카프카이다 “세계는 현실적 삶의 공간, 하지만 또한 표현된 진리의 공간이다”   “예술은 스스로를 상실한 자 ‘나’라고 더 이상 말할 수 조차 없는 자, 감은 움직임에 의해 세계의 진리를 상실한 자, 추방에 처해진 자….. 의 상황을 묘사한다” 바깥의 경험은 또한 중성적인 것에 대한 경험이다 중성적인 것이 알려지지 않은 것이라면, 항상 미결정적인 것이라는 의미이다. 바깥의 경험은 말하자면 수동성의 경험이다 바깥은 존재의 결정에 앞선다 따라서 바깥은 세계의 근원이다  바깥은 인간들 사이의 함께-있음이 이루어지는 소통의 장소이다 블랑쇼에게서 죽음은, 죽음으로의 점근은 바같의 경험의 전형이다 함께-있음의 조건으로서 바깥의 경험에 대해  말하기 위해 블랑쇼는 두 가지 형태의 죽음, 즉 가능한 죽음과 불가능한 죽음을 제시한다. .  

 바깥의 경험은 세계의 부재에 대한 경험이며 나 자산과의 관계의 결렬에 대한 경험이다 죽음으로의 접근은 바깥의 경험을 야기한다. 죽음으로의 접근은 바깥의 경험이며 바깥의 경험은 죽음의 경험이다  다시 말해 죽음의 경험과 바깥의 경험은 유한성의 경험 전체 (예를 들어 병 고독 사회로부터의 추방 경험 그리고 글쓰기의 경험 - 글을 쓴다는 것은 죽어간다는 것이다)를 가리킨다. 타인의 부재 - 항상 미리 사라질 위험이 있는 바로 타인의 현전 - 를 통해 우정은 이뤄지며 각 순간 사라져간다. 블랑쇼에게서 나의 죽음의 경험이 ‘내’가 겪어야 하는 바깥의 경험의 하나의 모델이라면, 타자의 죽음과 마주하는 경험은 ‘우리’ 가 겪어야하는 - 내가 타인과의 관계 내에서 겪어야 하는 - 바깥의 경험의 모델이다. 타인의 죽음에 대한 경험은 공동주의적이다. 나와 타자는 내밀성 가운데 만난다. 자신 바깥의 ‘존재’에 대한 소통은 내밀성 또는 우정을 부른다. 블랑쇼가 말하는 죽음은 종말 (삶 저 너머)이 아니며 언제나 죽음으로의 접근이다. 죽음이 죽어가는 자에게 남기는 것은 종말이 아니라 불가능성 (세계의 불가능성, 자아의 불가능성) 으로 인한 영원한 고통이다. ‘동맹의 원리’가 바깥 가운데에 있다. 블랑쇼가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바깥에 대한 복종이 아니며 바깥에 대한 부정도 아니고 바깥에 근거해, 하지만 동시에 바깥에 반대하고 저항해 이루어지는 우정이라는 형태의 소통이다 모든 종류의 허무주의를 넘어서 죽음 한가운데를 가로 지르고 있는 희망, 타자와의 관계에 대한 희망, 우정에 대한 희망, 죽음이 더 위협적이 될수록 이 희망은 강해질 것이다. 그러나 이 희망은 모든 종류의 절망보다  더 나쁜 것일 수 있다 

블랑쇼는 조르주 바타유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이렇게 쓴다 “르네 사르는 보편적인 재난에 대해 언급하면서 제게 매우 암울한 편지를 썼습니다. 맞습니다. 그러나 처절한 것은 몰락이 아니라 우리로 하여금 서 있게 만드는 불굴의  희망입니다. 저는 우정이 또한 재난에 있어서의 진리라고 덧붙입니다”     

담장은 차이를 만들어 낸다. 안과 바깥의 차이, 담 아래와 담 위의 차이, 담을 만드는 물질들의 차이 등…

이런 점에서 담장은 언어와 닮았다.

언어학자, 소쉬르는 언어를 기표와 기의로 구성된 '차이의 그물망(differentielles Netz)'으로 파악했다. 기표와 기의는 서로 짝을 지어 하나의 기호를 형성하며 또한 동시에 서로를 배척한다. 다시 말해 '그것'은 '다른 것'과의 구분을 통해서 정의된다.

담장은 나와 남을 구분짓는 하나의 기호이다. 받아 들이면서 동시에 배척한다. 

담장 안에서 보면 바깥은 한 마디로 ‘다른 것’ 이다. 

담벼락의 추상성, 즉 보이지 않는 담장,그것은 가장 허물기 어려운 담장이다. 

영원히 고정되고 있어서 바뀔 수 없다고 상정된 것이야말로 인간을 가로막고 있는 담벼락이다. 상징적으로 니체는 이것을 '신'이라고 부른다. 그렇지만 그가 망치로 부수겠다고 선언한 담벼락을 기독교의 신에 한정시킬 이유는 전혀 없다.

신은 영원불멸한 존재라는 생각뿐만 아니라 지금의 사회구조는 영원히 바뀔 수 없다는 생각, 혹은 인간의 본성은 결정되어 있어서 바뀔 수 없다는 생각도 인간을 체념적이고 수동적으로 만드는 담벼락이기 때문이다... (철학자, 강신주)


<맨 인 블랙> 영화를 보면 온통 농담이 성경 얘기를 끌고와 얘기를 한다.

성경을 알면 알 수록 이 농담이 재밌게도 시니컬하게도 들린다. 그냥 레토릭일 뿐이다.

가끔 유튜브를 보면, 니체나 실존철학 등 많은 현대적 철학강의에서 신이란 단어를 많이 듣게 된다.

하지만 이것은 비유와 은유적이다. 물론 인간의 자유가 최상인데, 이 절대적인 신이라는 존재가 버티고 서 있으면 인간의 자유를 설명하는데 한계가 있어 무신론적인 부분이 실존철학에서는 많이 보인다.(물론 유신론적 실존철학도 많다.) 하지만 이 신은 사실 신적인 존재, 예를 들면 물신숭배(화폐가 현실에서 신적인 존재로 숭배를 받는...) 각종 제도, 교육 등이 너무 강력하여 그 위치에 있다는 메타포적인 면이 강하다. 주로 인간이 만든 것들이 신성시 된 부분의 비판이 많다. 스스로 담벼락을 만들고 거기에 갇힌 모습을 비판하는 것이다.


종종 꽤나 열린 마음의 종교채널에서 철학강의를 볼 수 있다.

이유는 먼저 인간들이 너무 번뇌를 하고, 서로 사랑이나 존중이 없기에 이에 설득력 있게 말한 철학자들의 이론을 종교란 이유로 단순히 외면하지 않고 로고스와 접목을 하는 것이다. 현대철학은 지금 이 시대를 바탕으로 삶의 의미와 존재, 그리고 번뇌에서 탈출하는 여러 사고를 제안을 하니, 사실 종교의 지향성과 상통하는 부분도 있다.


욥기를 읽을 때, 아...그 시대에도 늘 남 탓만 했고, 욥이 답답하여 친구들에게 물어봐도, 니가 뭐 잘못한 거 없어?이런 식의 답만 들으니...당사자는 죽을 맛이었겠군 생각을 했다. 사실 구약에서 지금과 다르지 않은 인간의 군상을 보여주는데 조금 놀랬다. 구약은 응징의 하나님이고 신약은 사랑의 하나님이니...얘기도 많이 들었지만, 그런 거 같지도 않다. 구약의 하나님은 굉장히 적극적으로 인간 군상의 삶에 개입 하셨다. 그리고 하나님과 욥의 대화에서는 굉장히 적극적이셨구나, 지켜보기만 하신 것이 아닌...생각도...마지막 후반에는 좀 이해는 안되었지만 말이다.


현대 사람들이 이런 스스로 만든, 혹은 남들이 만든 거대한 담벼락에 갇혀, 자유롭지 않은, 혹은 자유에 대한 책임이 두려워 남에게 위탁하는 행태로, 그 부조리와 불편함을 안고 산다. 이런 불안과 부조리에서 인간은 어딘가 의지 할 곳이 필요하다. 이 부분이 종교의 역할이라고 기독교 유튜브 채널은 니체와 현대철학의 사상들을 연결 시킨다.

난 상당히 좋은 접근이고, 적극적이며 신랄하게 종교를 비판한 철학들도 수용하고 접목하려는 노력에 찬사를 보낸다. 종교 얘기만 나오면 심하게 외면해 버리는...이상한 풍토에서 많이 벗어나고 있는 시도다.

어짜피 지금 우리에게 위안을 주려는 목적도 분명히 있기에 이 역할에서 현 불안한 인간들에게 여러 사상과 그리고 그 의지하여 따뜻한 품을 만들어 주려는 그 노력은 칭찬받아야 마땅하다.

예술로서의 담장 - 남사예담촌 담장의 경우

우리나라에서 가장 넓은 면적을 자랑하는 지리산 깊은 곳에 위치하면서 18~20세기 전통 한옥 40여 호에 85채의 전통 한옥이 있는 남사마을이 그런 명성에 알맞은 곳이다. 농가 105호, 비농가 30호, 주민 숫자가 340명이나 되어 전통 마을 기준으로 볼 때 작지 않지만 많은 가옥이 남부 지방 양반 가옥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어 마을 전체가 살아 있는 한국 전통 역사 박물관이라고 평가되기도 한다. 경북의 대표적인 한옥 마을이 하회마을이라면 경남에는 남사마을이 있다고 할 정도다.

마을에는 지정 문화재도 많이 있는데 우선 남사옛마을담장이 등록 문화재 제281호로 지정되어 마을 전체의 명성을 높여준다. 최씨 고가(문화재 자료 제117호), 이씨고가(문화재 자료 제118호), 면우 곽종석 유적(문화재 자료 제196호), 이사재(문화재 자료 제328호), 사양정사(문화재 자료 제453호), 배산서원(문화재 자료 제51호) 등도 등록되어 있다.

남사마을이 2003년 '전통 테마 마을'로 지정된 까닭은 마을의 역사가 오래된 것은 물론 흙 돌담과 돌담이 공존하는 아름다움이 과거로부터 이어져 내려왔기 때문이다. 담은 마을 사람들의 위계에 따라 달라진다. 반가 집은 말을 타고 가도 보이지 않을 2미터 정도의 높은 담장을 만들었고, 서민들이 거주하는 민가는 돌담을 주로 사용했다. 총 길이는 5.7킬로미터에 이르는데, 이 중 3.2킬로미터가 대한민국 등록 문화재 281호로 지정되어 있다. '예담촌'이라는 이름도 '옛 담 마을'이라는 뜻을 담고 있다.

반가 건축물 주위에 있는 토담은 길이 50~60센티미터 정도의 큰 막돌을 2~3층 메쌓기 한 뒤 위에 황토를 편 다음 막돌을 일정한 간격으로 벌리고 사이에 황토를 채워넣어 만들었다. 상부는 전통 한식 기와 또는 평기와를 사용했다. 재료는 남사천에서 쉽게 얻을 수 있는 강돌을 사용했다. 사양정사와 최씨고가 골목 등은 누구나 걸어보고 싶은 골목길로 추천된다.

남사마을의 특이한 점은 마을 생김새가 반달 모양이므로 '달이 차면 기운다'는 말처럼 반월을 메우면 안 된다고 믿어 중심부에 집을 들이지 않았다는 점이다. (다음 백과) 

담을 쌓는다는 것은 집 안팎을 구분하는 경계를 만들거나 구역을 둘러싸는 건축물의 일부를 만든다는 뜻과도 통한다. 그런데 담장이라고 하면 그 속에는 장식과 아름다움이라는 뜻이 포함된 느낌이 든다. 나는 물론이고 여기에 너를 더해 그 안에서 우리라는 개념을 만들어준 담이기는 하지만, 담장의 아름다움을 찾다 보면 더 이상 경계라는 의미는 슬며시 꼬리를 감춘다. 다시 말해서 담을 뛰어넘은 담장은 더 이상 경계로 나누어 떼어 놓지 않는다는 뜻이다. 담장의 아름다움과 멋 또한 담으로 둘러싸인 독립적인 아름다움에서 벗어나 다른 것과 함께 어울리는 조화의 아름다움으로 더 크게 번져 나간다. 한 가지 예를 들자면 담장이 대문과 어울릴 때에는 집 안팎을 둘러볼 수 있는 또 다른 멋과 아름다움을 만들어 낸다. 사람들을 집안으로 맞아들이는 대문과 어울린 담장은 집 밖에서 집안을 살펴볼 수 있는 가늠자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담장은 집을 꾸미는 하나의 부속 건축물이기는 하지만, 담장이 갖고 있는 아름다움은 바깥과 어울리는 또 하나의 아름다운 모습을 만들어 낸다. 이와 같이 담장은 담장으로서 고유한 아름다움도 있지만, 대문이나 골목길 등의 다른 것과 한데 어울려 새로운 멋을 만들어 내기도 한다.

흙과 돌멩이로 쌓아올린 담장은 아무래도 아스팔트나 시멘트 포장길과 어울리기 어렵다. 그래서 흙담은 역시 흙길과 어울리기 마련이다. 이처럼 담장은 마을길과 어울리면서 마을이 가진 독특한 아름다운 모습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마치 담에 아름다움이 더해져 담장으로 바뀌는 것처럼 마을의 골목길도 담장과 어울리면서 '고샅길'이라는 새로운 아름다운 이름을 얻는 것이라 생각해도 좋다. (고샅길의 사전적 뜻은 시골 마을의 좁은 골목길이다. 이 단어가 얼마나 사랑스러운가!) 이와 같이 나름대로 독특한 아름다움과 멋이 어우러져 새로운 조화를 만들고 새로운 이름까지 얻는 것은 어쩌면 사람의 마음이 자연의 뜻과 하나 되어 새로운 느낌을 받는 것으로 보아도 좋을 것이다. 

담만 길게 이어진 마을길을 걷다 보면 아무래도 단조로운 느낌을 받을 수밖에 없다. 그것도 사람들의 시야를 가릴 정도로 높은 담이라면 담을 따라 걷는 사람들에게 위압감을 주기에도 충분하다. 마을의 분위기는 마을 사람들의 마음을 그대로 나타낸다. 마을길을 걷는 사람들의 불안감을 줄여 주고 편안함을 느끼도록 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담이 높지 않아야 한다. 마을길을 걷다가도 조금만 올려다보면 울타리 너머 처마는 물론 마당과 텃밭이 보일 정도라면 그 집이 바로 열린 공간이라는 생각이 들기 마련이다. 이렇듯 마을의 담장 높이는 담장 밖을 지나는 어른들의 머리가 보이는 정도였다. 이만한 높이라면 조금만 고개를 들어 올려 보면 집안 마당이 보이고 또한 멀리 있는 경치까지 볼 수 있으므로 마을 사람들을 배려하는 담장이라고 할 만하다.

그리 높지도 낮지도 않는 담장 높이는 닫힌 듯하면서도 또한 열려있는 집과 마을의 분위기를 잘 보여 준다. 나지막한 담장 너머로 사람들은 조금만 발돋움해도 얼굴을 마주볼 수 있기에 가벼운 인사는 물론이고 서로 안부를 묻고 궁금한 이야기도 나눌 수 있다. 그뿐만 아니라 담장은 있는 그대로의 자연스러운 마을 분위기와 함께 담장이 갖는 아름다움도 함께 보여 준다. 돌을 모아 쌓은 돌담도 자연스러운 멋을 보여주지만, 흙과 함께 쌓아올린 담장은 또 다른 아름다움을 연출하기도 한다. 조금 단조로운 느낌이다 싶으면 담에 특별한 색이나 무늬 또는 그림을 넣어 색다른 맛이 우러나오도록 만들기도 한다. 이를테면 주위와 어울리는 기와나 전돌을 담장에 추가로 넣기도 한다. 이처럼 아름답게 치장한 담장을 특별히 '꽃담'이라고 부르는데, 궁궐이나 사대부 집안의 담장을 치장하는 데 많이 이용한다. 굳이 아름다운 무늬를 넣은 꽃담이 아니더라도 소박한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는 담장도 있다. 담장 위에 기와를 얹거나 초가로 이엉을 만들어 덮는 것도 담장을 아름답게 가꾸려는 노력에서 비롯되었다. 흙으로 쌓은 담에 빗물이 스며들어 허물어지는 것을 막으려는 뜻이 먼저였겠지만, 그 속에서 또 다른 아름다움과 멋을 찾아볼 수 있다는 것은 부수적인 즐거움이다. 담을 쌓는 재료에서만 아름다움과 멋을 찾는 것은 아니다. 담장을 타고 자라는 넝쿨장미나 한여름에 꽃피는 능소화도담장의 멋을 더해 준다. 그뿐만 아니라 담장 위로 자란 박 넝쿨에서 피어난 하얀 꽃은 캄캄한 밤중에도 담장의 소박한 멋을 더해 준다.

(이재열, 담장속의 과학)


틸리는 벽 반대쪽을 늘 궁금해했다. 벽은 생쥐들이 태어나기 전부터 있었다. 아무도 벽의 근원을, 벽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 궁금해하지 않을 때, 어린 틸리는 벽을 ‘생각’하고, 벽 반대쪽을 ‘상상’한다. 그리고 친구들을 설득해 같이 벽에 기어오르기를 ‘실행’한다. 그럼에도 틸리는 높고 긴 벽을 극복하지 못한다. 그러다 아주 우연한 기회에 땅굴을 파고 들어가는 벌레를 보고는 새로운 방법을 터득한다. 위로 넘을 수 없다면 아래로 극복해 보는 것이다. 마침내 벽 반대쪽에 다다른 틸리. 틸리는 희귀한 생물이 살고 있을 거라는 기대와 달리, 자신과 별반 다르지 않은 평범한 생쥐들이 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틸리 덕분에 벽 양쪽에 살던 생쥐들은 서로 만나 함께 축제를 벌인다.

(틸리와 벽, 레오 리오니)

파란만장하고 원기 왕성한 리베라의 벽화에는 통렬함과 전율이 짙게 배어 있다. 그가 그린 온갖 종류의 이미지들은 우리의 분노를 자극하고 우리의 확신을 고무한다. 일그러진 표정의 코르테스, 부상당한 노동자, 결의에 찬 혁명 영웅 등을 상기해 보라. 리베라의 벽화에는 무엇보다도 집단적 존재감이 표현되고 있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외진 해변에서 럼(rum)이나 마시며 고립된 삶에 매몰되어 있는 개인에 대한 강력하고 호소력 있는 응답이다. 록펠러와 모건에 대한 신랄한 풍자 역시 우리 병기 창고에 든 무기이다. (벽을 그린 남자 리베라, 마이크 곤잘레스)

편견을 깨는 연습으로 새로운 세상에 마음 열기

많은 사람들에게 ‘벽’이란 하나인 공간을 둘로 가로막는 거대한 구조물일지 모릅니다. 하지만 이 책에 등장하는 벽들은 단절된 세계를 가로질러 과거와 현재를 이어주고, 평화와 화합의 정신을 되새기게 합니다.

익숙한 사물의 익숙한 의미를 뒤집어 보는 이 작품의 콘셉트를 곱씹어 보면, 독자들도 하나의 소재를 180도로 전환해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생각을 계속 바꿔 보면 편견을 깨는 연습, 생소하게만 느껴졌던 것에도 마음을 여는 연습에 익숙해질 거예요. 새로운 틀 안에 펼쳐지는 새로운 세계, 그곳에서 우리 아이들이 다양한 삶의 방식을 인정하며 성장하길 바라는 마음입니다. (문화와 역사를 들려주는 세계의 벽, 마기 번스 나이트 지음)

벽은 "장애물”이라는 내포적 의미를 나타낸다. 

1990년 미국 평화재향군인회의 공동창립자이자 시인인 더그 롤링스가 베트남 전쟁 전사자 위령비에 관한 시를 낭독했다. .

나는 무릎을 꿇고

벽을 뚫어져라 들여다본다 

벽에 비친 내 모습을

그토록 젊은 나이에 죽어 간 사람들의 이름 너머로.

위령비는 공모로 건립되었는데 당선작은 당시 예일대 학생이던 마야 린의 작품이었다. 

벽은 투명하게 만들어져 있어 벽을 통해서 자신의 모습을 비춰볼 수 있는 구조이다. 

일반적으로 벽이란 그야말로 장벽으로서 사이를 가로막는 구실을 하지만 이 위령비의 벽은 투명하다. 

이를통해 상처는 아물지만 흉터는 남을 것이라는 작가의 정신이 나타난다. 

“젊은 나이에 죽어 간 사람들의 이름 너머로”

사르트르 소설,’벽’은 1936년의 스페인 내란을 배경으로, 레지스탕스로 활동하던 이비에타가 사형을 언도받은 하룻밤 사이의 일을 다루고 있다. 제목의 벽이 상징하는 것은 다음과 같은 구절에 잘 표현되어 있다.


"나는 여덟 개의 총이 나를 겨누고 있는 것을 보게 될 거야. 난 벽 속으로 들어가고 싶다고 생각할 테고, 온 힘을 다하여 등으로 벽을 밀겠지. 그러면 벽은 악몽에서처럼 꼼짝하지 않겠지. 나는 이 모든 것을 상상할 수 있다네. 아! 내가 그것을 얼마나 생생하게 상상할 수 있는지 자네가 안다면." 


그러나 작품에서 더욱 관심이 가는 부분은, 죽음이라는 무게가 사람의 어깨위에 올라탔을 때, 그들의 몸이 변하는 모습을 사르트르가 어떻게 그려내고 있느냐에 대한 것이다.

사형이 언도된 뒤, 이비에타는 세상과 단절된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그 순간 나는 모든 삶을 내 앞에 붙들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러자 '이건 새빨간 거짓말이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 삶은 이미 끝났으므로 아무 가치도 없다. 어떻게 여자들과 산보하며 노닥거릴 수 있었는지 모르겠다. 내가 이렇게 죽을 줄 알았더라면 새끼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았을 것이다. 내 삶은 이제 자루처럼 닫히고 밀봉된 채 내 앞에 놓여 있다. 하지만 그 안에 있는 것은 모두 미완성품이다. 한순간 나는 내 삶을 평가해보려고 했다. 아름다운 삶이었다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우리는 삶에 대해 평가할 수 없다. 그것은 초안에 불과하니까. 나는 영원을 위한 어음을 끊으면서 시간을 보냈지만,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이제 나는 아무 미련도 없다. (...) 미련을 가질 만한 것은 많았다. 하지만 죽음은 이 모든 환상에서 깨어나게 했다." 


그의 육체는 아직 살아있지만, 동시에 죽은 것과 별다른 차이를 보이지 않는다. 지금부터 그가 생각하고 행동하는 모든 것들에는는 하나의 조건이 붙기 때문이다. "내 삶은 이미 끝났으므로."

그는 살아있지만, 자기 자신을 이미 죽은 것처럼 여긴다. 흥미롭게도, 사르트르는 이 괴리(乖離)를 이렇게 묘사한다.

"여기 있으면 몸이 떨리지 않습니까?"

그는 추워보였고, 얼굴은 보랏빛이었다.

"춥지 않소." 나는 대답했다.


그는 냉랭한 눈빛으로 계속해서 날 쳐다보았다. 갑자기 나는 알아차렸다. 얼굴에 손을 갖다 대었다. 땀에 흠뻑 젖어 있었다. 한겨울에, 바람이 이렇게 불어대는 지하실에서 땀을 흘리고 있었던 것이다. 머리카락 속으로 손을 넣어보니 역시 땀에 젖어 있었다. 동시에 셔츠도 흠뻑 젖어 살갗에 달라붙어 있었다. 적어도 한 시간 전부터 땀을 뻘뻘 흘렸으면서도 아무것도 느끼지 못한 것이다."


자신이 죽을 것임을 확신하자, 그의 몸은 점차 그의 정신과 분리된다. 저곳에 내 몸이 있지만, 내 몸이 아닌 것 같은 감각. 그것은 황지우의 표현을 빌리자면 '책상 모서리에 몸이 스칠 때 아, 내가 아직 여기 있구나 하는 생각'이다.


나의 정신은 아직 죽음을 이해하지 못한다. 어젯밤만 하더라도 하늘에 떠 있는 별들을 보며, 그 별들을 내가 품었던 추억들, 좋은 것들과 나쁜 것들로 구별된 기억과 연관지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이 더는 아무런 의미를 가지지 못한다는 점, 별들을 보고 아무런 기억을 떠올릴 수 없다는 점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그는 자신의 죽음을 보고 있다. 그는 자신의 시체를 바라본다. "더 이상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아무것도 듣지 못하는데, 여전히 세상은 다른 이들을 위해 계속되리라는 점"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그러나, 나의 육체는 그것의 의미(무게)를 이해한다.

벽에 그린 그림

착시화 트롱프뢰유 trompe l'oeil)라는 게 있다. 완전히 현실인 듯 착각하게 만드는 그림이다. 뚫려 있는 벽 너머로 긴 복도가 이어지고 그 끝에 발코니가 있는 듯하지만 사실은 캄캄하게 막힌 벽에 솜씨 좋은 화가가 그려 놓은 그림일 뿐이다. 그런데 굳이 '트롱프뢰유(눈속임)'가 아니라 하더라도 모든 회화는 근본적으로 눈속임 그림이다. 벽에 소나무를 그려 놓으니 진짜 나무인 줄 알고 새들이 와서 머리를 찧고 죽기 일쑤였다는 신라시대 솔거 이야기가 바로 착시화의 한국판 버전이다.

고대 그리스에도 비슷한 일화가 있다. 유명한 화가 제욱시스와 파라시오스는 누가 더 그림을 잘 그리는지를 결정하기 위해 상대방이 모르게 비밀리에 그린 그림을 어느 날 사람들이 많이 지나다니는 회랑(갤러리) 길에서 공개하기로 했다. 우선 제욱시스가 파라시오스를 이긴 듯이 보였다. 포도 그림이었는데 너무나 진짜 같아서 새들이 쪼아 먹으려고 날아들었다. 사람들은 탄성을 질렀다. 의기양양한 제욱시스는 파라시오스 뒤에 둘러쳐진 장막을 가리키며 “자, 이제 자네가 그 뒤에 뭘그렸는지 한번 보여 주게나”라고 말했다. 그러자 파라시오스는 “이장막이 바로 그림일세"라고 대답했다. 놀란 제욱시스는 곧바로 자신의 패배를 인정했다. 자기 그림은 새를 속였지만 파라시오스의 그림은 사람, 그것도 화가인 자신의 눈을 속였기 때문이다.

흔히 이것을 완벽한 재현에 대한 우화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라캉은 다르게 해석한다. 제욱시스가 그린 그림에 새들이 달려들었다고 해서 그 포도들이 카라바조의 포도 그림만큼 훌륭하게 재현되었다는 의미는 아닐 것이다. 만약 포도가 그렇게 그려졌다면 새들이 속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림 속의 포도는 가짜이고 단지 실제의 포도와 아주 비슷하게 그려졌을 뿐인데, 단지 아주 비슷하게 묘사되었다는 것만으로 새들이 날아들 이유는 없기 때문이다. 새들이 날아들기 위해서는 포도의 그림 속에 새를 유혹하는, 우리가 무엇인지 알 수 없는 어떤 요소가 들어 있었음에 틀림없다. 파라시오스의 장막 그림도 마찬가지다. 그는 사람을 속이려면 장막을 그려야 한다는 것, 다시 말해 장막 뒤에 무엇이 있는지 궁금하게 만들어야 한다는 것을 분명하게 인식한 심리주의적 화가임에 틀림없다. 그렇다면 이 일화야말로 플라톤이 왜 그토록 격렬하게 그림에 적대감을 보였는지를 말해 주는 아주 적절한 예가 될 것이다.

힘들게 산을 올라 피곤을 느끼며 낯선 세계로 들어간 다음에야 어느 수도원" 구석진 곳에 숨어 있는 보잘것없는 작은 뜰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여행자는 그의 관심을 끌 만한 무엇인가를 보았던가? 다락방 쪽으로 작은 창문 몇 개가 뚫린 석회가 일어나고 있는 담벽들, 서로 모서리를 이룬 두 담벼락 밑에서 피어나고 있는 흰빛과 보랏빛 무꽃들, 보잘것없는 노란 마거리트 덤불들, 그리고 수선화 화단과 작고 붉은 장미 덤불 두 개 말고는 아무것도 없다

벽  (사물과 비사물, 현상학적 소묘, 빌렘 플루서)

마술적 사유에서는 어떤 개념군에서 사로 대립하는 극단들이 서로 부합한다는 주장이 있다 예컨데 일종의 가설적 언어인 인도게르만어에서 어간 “h…l” 의 의미는 신성한 관념군의 양극단을 포괄한다는 것이다 이 어간로부터 Heil (구원)과 Holle (지옥)가 유래했고 헬레 helle (빛) 와 휠레 Hohle (동굴) 가 유래했을 뿐 아니라 영어에서 whole 과 hole (구멍) 도 유래했다. 이 마술적 양가성을 우리 자신의 사유에서 뚜렷이 발견할 수 있다 심리적 영역에서 벽의 양가성을 드러내는 것은 쉬운 편이다 통제와 보호, 저항과 도피 감방과 거처 등등….벽은 세계를 두 영역으로 나뉜다 하나는 생이 벌어지는 커다란 외부영역이고 다른 하나는 생이 생기는 조그만 내부영역이다 

벽에 대한 윤리적 관점, 심미적 관점, 종교적 관점이 있을 수 있다

텅 빈 냉정함은 실로 벽의 본질적 특성이다. 텅 비어 있음, 냉정함, 미적 중립성 덕분에 벽은 인간의 형상화하는 상상의 상당 부분을 담을 수 있는 것이다. 자연의 엔트로피 경향에 늘 새로운 형상을 강요하는 인간 의지 대부분은 이 자연 자체를 배경으로 실현되는 것이 아니라 텅 빈 벽을 배경으로 실현된다. 그렇다면 벽화는 실로 이러한 의지의 실현을 보여주는 최초의 증거 중 하나이다. 벽은 자연과 인간 사이에 놓인 담의 양면 중에서 그 앞에서 문화라는 연극이 상연되는 한 면이다. 석기시대 동굴 벽이 그렇듯 우리는 두 종류의 벽을 구별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는 “주어진” 벽인데 뒷변이 보이지 않는 동굴 벽이 그렇다. 다른 하나는 “만들어진” 벽인데 그 뒷면이 보이는 방의 벽이 그렇다. 인간이 자기의 벽으로부터, 어떤 의미로는 자기 자신으로부터 외출하면 그 뒷면이 보이는 것이다. 그러나 자연과 문화의 경계로서의 벽 자체는 이 두 세계 영역 중에서 둘 다에 속한다. 그래서 그림이나 포스타 같이 만들어진 것을 벽에 걸거나, 패널이나 양탄자 같이 만들어진 것으로 벽을 숨긴다. 문화의 상당 부분은 기본적으로 날것을 꾸미고 불시의 균열을 덮기 위해 벽에 붙이는 판자이다.  낭만주의는 벽으로 회귀하는 일, 즉 자연으로 회귀하는 일이 아니라 벽을 꾸미는 일이다. 기본적으로 벽은 반자연적이면서 반문화적 구조이다. 작품은 그 배경을 이루는 벽이라는 경계에 맞서는 작품이다 현재의 예술에서 작품의 위기는 벽의 위기일 따름인지 모른다.. 

익숙해진 것은 오래 거주하지 않으면 다시 섬뜩 한 것, 즉 반비밀로 전도된다. 나는 나의 벽 사이에서 아늑함을 느낀다 벽은 완전한 타자에 대한 인간의 두 가지 태도를 상정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하나의 태도는 벽들 사이에서야 성스러움을 체험하는 것이지만, 다른 하나는 벽을 허물어야 성스러운 공간을 베풀 수 있다는 것이다. 종교적 상징으로서의 벽의 양가성은, 성스러운 것이 현현하려면 벽을 찾아가거나 아니면 벽을 허물어야 한다는 것이다. 

벽은 내 주위의 사물이다. 내가 나의 익숙함을 가로질러 벽에 다가가 벽을 풀어준다면 그 벽은 무척 읨심장한 말을 할 것이다 그것은 서로 다른 두 가지  말, 나의 조건에 대한 양가성의 말일 것이다 이 말은 나의 조건을 해명하지는 않지만 나의 조건이 해명될 수 없는 것임을 내게 밝혀준다. 

요새와 성벽

“전략적 방어지역에 사람들을 집중 거주시키거나 그 거주지를 요새로 둘러쌀 필요성은 특정한 군사 충돌을 투영하고 기획하는 상황에서만 생긴다. 이런 군사적 공간 투영은 공격 이동의 가능성과 지형(예컨대, 언덕 꼭대기 촌락)이나 요새(예컨대, 주변을 에워싼 성벽)를 이용해 적의 이동을 차단하고 정착 공간으로의 침투를 막는 방식을 중심으로 준비된다. 교전이나 도주라는 거의 자연발생적인 작전 행동이 폐기되고 나면, (정착 농업 인구의 증가와 더불어) 군 전략가의 목표는 “적보다 유리한 입지를 익숙한 터전에 보유하려는 것이니, 이기도에서 비롯되어 아군이 보호하는 집단 거주지, 주변을 에워싸는 성벽, 언덕 꼭대기를 두르는 울짱이 건설되며, 이것들의 용도는 모두 적의 공격 속도를 둔화시키기 위함이다” (폴비릴리오)

세계에서 의미있는 벽 27개소를 살펴 보자.

1. 만리장성, 중국

2. 원주민의 암각화, 오스트레일리아

3. 라스코 동굴, 프랑스

4. 하드리아누스 방벽, 영국

5. 마하발리푸람의 암벽, 인도

6. 페스의 성벽, 모로코

7. 그레이트 짐바브웨, 짐바브웨

8. 쿠스코 성벽, 페루

9. 타오스 푸에블로, 미국 뉴멕시코 주

10. 통곡의 벽, 예루살렘

11. 메카 순례 벽, 이집트와 사우디아라비아

12. 마니차 벽, 티베트

13. 디왈리 벽화, 인도

14. 디에고 리베라의 벽화, 멕시코

15. 도쿄의 추견 벽화, 일본

16. 파블로 네루다의 집, 칠레

17. 은데벨레 족의 집, 남아프리카 공화국

18. 캐나다 문명 박물관

19. 필라델피아 벽화, 미국

20. 네덜란드의 제방

21. 홀로코스트 위령 벽, 폴란드

22. 베트남 전쟁 전사자 위령비, 미국

23. 에인절 섬, 미국 캘리포니아 주

24. 평화선, 북아일랜드

25. 베를린 장벽, 독일

26. 넬슨 만델라의 교도소 벽, 남아프리카 공화국

27. DMZ 철조망 장벽, 한국

베를린 장벽은 허물어 졌는데 우리나라 DMZ 철조망은 더욱 견고하게 버티고 있다.

그 뿐이 아니다. 이 목록에 나와있는 대부분의 벽은 벽으로서의 임무는 사라지고 상징적으로, 또는 기념으로서 위치지어 있을 뿐인데, 우리나라 DMZ만 유일하게 실효적으로 그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 것이다. 

어찌 부끄럽지 아니한가. 

또 다른 벽 (쓸모있는 벽) 의 예

꽃병을 예로 들어  보자. 꽃병의 튀어나온 부분의 내부, 빈 곳은 진흙, 즉 재료에 형체를 부여하는 심급으로 작용한다. 꽃 병의 내부에도 벽면이 존재한다. 꽃병 내부의 빈 곳은 또한 꽃병의 벽면과 상징계의 파편으로 인해 산출된 것이다. 여기에서는 최초의 것과 두 번째 것의 구분이 없다. 긍정과 부정이 동시에 작용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꽃병 내부의 빈 공간은 벽면을 은유화한 것이고 벽면은 내부를 은유화한 것이다. 빈 곳, 차이, 실재는 꽃병의 벽을 통하여 특정한 실재가 되었다. 이것은 자신을 절대 드러내지 않는, 정해지지 않은 실재와는 구별된다. 왜냐하면 정해지지 않은 실재는 공간을 갖지 않으며 동시에 무한하기 때문이다. 기표적 파편은 꽃병의 볼록 튀어나온 부분을 통하여 규정된다. 팔루스 기표와 질료적 기표들은 서로 맞물려서 뛰는 맥박처럼 서로를 규정한다. 이러한 규정관계는 자유연상에서 아주 잘 드러나듯이 '말하는 행위' 속에서 실현된다. 팔루스적 기표의 '말해질 수 없는 것'은 영감이 구체화되고 실현되는 순간에 사라진다. 따라서 은유화 과정은 결코 종결될 수 없다. 꽃병의 예는 은유와 환유가 결코 서로를 배제하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에게 잘 보여준다. 모든 대체물은 다시 다른 대체물로 대체될 수 있고, 이렇게 해서 은유끼리 하나의 환유적 관계를 맺게 된다. 환유적 연결은 은유에 기초를 제공한다. 한 단어를 뒤따라 다음 단어가 오는 상황에서 아니라, 한 단어가 다른 단어의 위치를 차지하게 될 때 은유의 불꽃은 타오른다.

노자 도덕경 11장에는 이런 말이 나온다. 서른 개의 바퀴살이 한 바퀴통 (곡)에 모인다

빈 틈을 내버려 둠으로 수레로서의 쓸모가 있는 것이다.

흙을 빚어 그릇을 만드는데 그 가운데의 빈 공간 때문에 그릇으로서의 쓸모가 생긴다.

문과 창을 뚫어 방을 만드는데 그 가운데의 빈 공간 때문에 방으로서의 쓸모가 생긴다.

이렇게 벽은 방을 구성하는 기본 요소가 된다.

따라서 벽은 장벽이나 장애 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벽은 필수를 구성하는 쓸모의 요소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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