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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심부리는 소비

소비에 미친 현대인

by 빈솔 Bin Sole Feb 21. 2025
소비는 결여를 부추긴다

'소비주의 사회'에 참여하면서 점점 더 많은 새로운 욕망의 대상들을 축적하면서 우리는 우리를 완전하게 만족시킬 진정한 하나의 대상의 결여로부터 도피한다. 이런 맥락에서 욕망의 윤리는 말그대로 '결여의 영웅주의'로서 제시된다. 그러한 태도를 통해서 우리는 진정한 대상의 결여라는 이름으로 다른 모든 대상들을 거부하며 그 어떤 것도 우리의 욕망을 만족시키지 않도록 한다. 다시 말해서 욕망의 윤리는 잃어버린 향유에의 충실성의 윤리이며, 사물과 사물들의 틈새를 도입하고 또한 손 안에 준비된 모든 대상들 너머에 유일하게 우리의 삶을 살 가치가 있는 것으로 만들 '어떤 사물some Thing'이 있다는 것을 상기시키는 근본적 결여를 보존하는 윤리이다. 욕망은 욕망의 비만을 고집하는 정도로까지 향유의 본래적 자리를 - 설사 그 자리가 텅 빈 것으로 남아 있다 하더라도-보존한다. 욕망의 윤리는 '잃어버린 원인의 최고 나르시시즘'과 연계되어 있다는 라캉의 주장을 바로 이러한 의미로 이해해야 하는 것이다.

속도의 가속화로 현재는 더 많은 미래를 소비해 버린다. 과거는 더 빠른 속도로 가치를 잃는다. 현재는 수백만 년 동안 형성된 천연자원을 소비하면서, 이 소비로 생겨나는 쓰레기로 미래에 부담을 준다. 현재는 과거와 미래를 싸잡아 공격한다


형이상학의 이명(耳鳴). 웅웅 울리는 시간의 허망한 사라짐. 그래도 지루함이 불러온 정황이 그 어떤 의미를 가진다면, 그것은 19세기 초에 나타난 사회 발달, 낭만주의가 천박한 피상화로 받아들인 평준화다.

슐레겔은 프랑스혁명으로 나타난 평준화의 경향을 지루함의 원인으로 보았다. 그런 평준화를 우리는 오늘날에도 체험한다. 심지어 평준화는 취향의 전 지구화라는 경지까지 이르렀다. 패션과 비즈니스는 평준화를 더욱 키울 뿐이다. 표준화와 문화 산업의 획일화로 외부에서 강제되는 지루함의 계기는 차고도 넘쳐난다. 당시에도 오늘날에도, 오늘날에는 특히 현대 유목민의 거점이자 집합 장소, 이를테면 공항, 기차역, 쇼핑몰, 백화점에 지루함이 범람한다. 이 실질적인 허무주의의 교통 공간에서 하릴없이 시간을 죽이는 사람들은 스쳐 지나가는 만남, 애써 감추는 공간 공포, 욕망의 평면 모니터로 하나같이 똑같은 모습이다. 지루함이 평준화를 만들고 이 평준화가 소비의 한 가지 패턴을 부추긴다. 기호의 소비와는 결이 다른 패턴 말이다.

1800년대에 지루함은 오로지 "부자를 때리는 채찍이었다고 했다. 달리 해야 할 더 중요한 일이 많았던 평범한 사람들은 부자가 "죽을 지경으로 지루함에 빠지지 않도록 갖은 호사를 부린 유흥으로 그들을 즐겁게 해주어야만 했다. 벌써 오래전 이야기다. 오늘날에는 일부 부자뿐만 아니라 일반 대중도 오락을 즐기지 않으면 우울증에 사로잡힌다. 이런 관점에서 보자면 지루함을 둘러싼 정황은 대중화됐다.

산업은 사람들이 죽을 지경으로 지루함에 빠지지 않도록 앞다투어 상품을 제공한다. 이 상품에는 물질적인 것만 있는 게 아니다. 여행. 이벤트 영화, 방송, 인터넷 등 각종 체험이 소비자를 유혹한다. 이로써 소비자가 실망을 가지게 되는 진원지도 달라졌다. 게르하르트 슐체는 이 변화를 연구서 <체험 사회>에서 적시한다. 예전에는 재화를 충분히 가질 수 없어 실망했다. 가지지 못함의 실망, 가지지 못해 홀대받는 실망이었다. 오늘날의 실망은 "체험하지 못함이다. 지루함을 쫓을 수 있는 어떤 것이 제공되는데, 그래도 지루해서 사람들은 실망을 느낀다. 그러나 소비자의 위치에 있는 사람들은 지루함이 생겨나는 원인이 자신에게도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을 좀체 하지 못한다. 어디까지나 제공되는 상품이 부족해, “다 그게 그거야”라고, 지루하다고 소비자는 생각한다. 체험의 "부족이 자기 자신의 책임이라는 생각을 하는 소비자는 거의 없다. 텔레비전 앞에 앉아 1초가 멀다 하고 채널이 돌아간다. 이 프로그램에서 저 프로그램으로 숨 가쁘게 건너뛸 뿐이다. 주의력은 갈수록 짧아지고, 체험의 연속성은 토막토막 끊긴다. 그 결과 맥락 없음이라는 구멍 사이로 다시금 지루함이, 공허한 시간의 경험이 비집고 들어온다. 깜짝 놀란 소비자는 서둘러 이 구멍을 막으려 채널을 돌린다. 갈수록 더 쥐어짜지만, 결국 텔레비전 앞에서 보낸 저녁 시간에서 기억에 남는 것은 전혀 없다.

브런치 글 이미지 1

백설공주 속 마녀가 ‘거울아 거울아’를 외쳤을 때, 거울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을 전달하는 매개체다. 각종 신화·소설·영화에서 ‘진짜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은유적인 도구로 쓰였던 거울이 실제로는 가장 추한 환경에서 만들어졌다면? 중세 시대 거울은 장인들에게 수은 중독이란 치명상을 남겼다. 더 깊은 광택을 내기 위해 수은을 사용하면서다. 세상에서 가장 값진 ‘돌’로 평가받는 다이아몬드 역시 채굴을 위해 식민지 노예들에게 가학적인 폭행과 인종차별을 가하는 것을 정당화하는 물건이 됐다.

2000년대 제품을 소비할 때 우리는 윤리적으로 가치 판단을 하는 ‘윤리적 소비’를 시대정신으로 하여, 미를 완성하는 데 이용된 추악함을 줄이려는 운동이 일어 나고 있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프랑스 철학자 자크 라캉의 ‘쾌락 이론’에 따라 사회가 인정하는 한계 안에서 쾌락을 즐기조록 하자.. 소유에 대한 충동과 욕망의 충동을 분리하고, 덜 소비하되 더 깊이 소비하자. 19세기 노예무역의 결과로 ‘추악’과 ‘아름다움’을 동시에 지닌 진주 조개를 보면서, 조개껍데기 속 영롱한 빛을 관조하고 추억을 이식하려는 자세를 갖자고 외친다. 그게 바로 사물에 깃든 ‘진짜 아름다움’을 보는 순간이다.  (아름다운 것들의 추한 역사 케이티 켈러허 지음,이채현 옮김,청미래)

소비의 주이상스

당면한 혼란의 원인들은 늘어만 가는 '가짜 필요들false needs'을 만족시키기 위해 더 많은 상품들에 대한 우리의 요구를 증대시키는 자본주의의 내재적인 욕구와 연관된 폭주하는 잉여분과 모종의 관계가 있다는 힌트를 준다.이는, 라캉이 잉여가치라는 마르크스주의 용어와 연관시켜 쓴 잉여 주이상스plus-de-jouir 개념을 사용한다는 사실에 의해 뒷받침된다.

벤담(Jeremy Bentham, 1748~1832)은 두 종류의 허구를 구분했다. 첫 번째는 허구인 것 같지만 실질적으로는 실체인 허구이고, 두 번째는 실체인 것 같지만 실질적으로는 상상의 것인 허구이다.

허구는 환상(fantasy), 환영(幻影, illusion)과 거의 동의어다. 허황된 꿈을 쫓는 젊은이에게 어른들은 환상을 쫓지 말고 현실로 돌아오라고 충고한다. 그러나 허구 또는 가상을 포기하는 순간 우리는 현실 그 자체를 상실한다. 허구를 빼면 현실은 담론적·논리적 일관성을 잃어버리기 때문이다.

허구의 자리에 그것과 동의어인 판타지 또는 꿈을 대입해 보면 그제서야 우리는 깨닫게 된다. 현실에서 판타지를 빼는 순간, 현실 그자체가 아예 무너진다

코카콜라(코크)는 맥도널드와 함께 자본주의의 상징이다. 아프리카 오지에 가서도 코카콜라나 맥도널드 광고판만 보면 안심하게 된다는 이야기가 있다. 식음료를 위생적으로 해결할 수 있다는 안도감 때문이다. 혹은 좌파적 성향의 사람이라면 “여기까지 미국 자본주의가 침입했구나" 하고 개탄할 것이다.

자본주의의 핵심은 잉여가치의 역동성에 있다. 자본의 축적도 교환가치의 발생도 모두 잉여가치에서 발생한다. 재화의 세상에 잉여가치가 있다면 리비도의 영역에는 잉여쾌락(surplus-enjoyment)이 있을 것이다. 지적은 자본주의 최고의 상품인 코카콜라와 개인 리비도의 잉여쾌락을 비교했다.

코카콜라는 처음부터 기호식품은 아니었고 애초에는 약품이었다. 사람들이 난생 처음 맛보는 이상한 맛이어서 아무런 만족감을 주지 않았다. 설탕물처럼 누구나 마시면 금방 맛있거나 기분이 좋아지는 게 아니었다. 물이나 맥주나 와인처럼 갈증을 해소해 주거나 마음을 편안하게 해 주는 직접적 사용가치도 없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표준적 만족을 넘어서는 신비한 뭔가가 뒷맛으로 남았다. 그저 단순히 '그것(t)'이라고 부를 수 있는, 마치 미지의 대상에 붙이는 X자의 표지 같은 그런 순수 잉여쾌락이었다. 그 후 사람들은 모두 이 상품을 충동적으로 소비하게 되었다.

'코크, 바로 그거야!(Coke is it!)'라는 광고가 있었다. 그 후 우리는 명품백을 '잇백 (It bag)'이라고 지칭하는 광고 담론을 접하게 되었다(광고를 이해하는 데도 라캉의 대상 정도는 알고 있어야 한다!). 역설적이게도 코크는 평범한 코모디티(commodity, 일용품)가 아니다. 즉, 초고가의 명품 백처럼 처음의 사용가치가 탈물질화되어 나중에 순수 (교환)가치의 아우라(Aura)적 차원으로 올라가는 그런 일용품이 아니다. 그것의 매우 특이한사용가치 자체가 이미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정신적 초감각적 잉여의 아우라를 직접적으로 체화하고 있는 그런 일용품이다.

달콤쌉싸름한 맛의 콜라는 마시면 마실수록 더욱 더 갈증을 느끼게 만드는 이상한 성질의 음료다. 아무리 마셔도 우리의 갈증은 채워지지 않고, 더욱 더 우리를 목마르게 만든다. 그것이 바로 콜라의 잉여적 성격이다. 콜라에는 우리의 갈증을 해소해 준다는 사용가치가 전혀 없다. 그것은 처음부터 이미 정신적 잉여가치를 직접 체화하고 있는 그런 제품이었다. '바로 그거(t)'라는 애매모호한 말은, 이 제품이 결코 그것이 아니라는 역설적인 얘기였다.

이쯤에서 마르크스의 잉여가치, 라캉의 잉여쾌락, 프로이트의 초자아가 모두 비슷한 성질을 갖고 있다는 것이 드러난다. 코크는 마시면 마실수록 더 갈증을 느낀다. 돈은 벌면 벌수록 더 욕심이 생긴다. 초자아의 명령에 복종하면 할수록 당신은 더욱더 죄의식을 느낀다. 빚은 갚으면 갚을수록 더 많이 빚지게 된다. 간절히 원하던 것을 가지면 가질수록 당신은 더욱 결핍을 느낀다.

욕망의 원인 

우리의 욕망의 원인인 대상 a는 그리로 가까이 가면 갈수록 당신으로부터 멀어지고, 그것을 소유하면 할수록 결핍은 더욱더 커진다. 거기에 도달할 수 없다는 사실 때문에 욕망은 더욱 증가되고 강화된다. 내면의 공허를 채우려 시도하면 할수록 우리는 더욱 욕망하게 된다. 진흙 속에 빠진 차를 생각해 보라. 빠져나오려 바퀴를 돌리면 돌릴수록 그것은 더욱더 진흙 속에 빠져든다.

슬라보예 지젝이 코카콜라를 대상 a와 비교한 이유이다. 우리는 콜라가 정확히 우리를 만족시키지 못하기 때문에 그것을 즐겨 마신다. 마치 그것이 우리를 만족시켜 준다는 듯 “바로 그거야”라고 말하는 것은 완전한 거짓말이다. 대상 도 코크도 '그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원래 불가능한 대상을 추구하고, 공허 혹은 무를 추구하고 있으니까. 이 세상에 '그것'(t)은 있을 수 없으니까.

그런데 카페인 프리의 다이어트 콜라가 나왔다. 원래 우리가 음료를 마시는 것은 세 가지 이유 때문이다. 갈증을 해소해 주거나, 영양학적 가치가 있거나, 맛이 있거나. 그런데 카페인 프리 다이어트 콜라의 경우, 애초부터 영양학적 가치는 없었고, 갈증을 해소해 주지도 않으며, 맛의 주요 요소였던 카페인 또한 제거되었다. 남아 있는 것은 순전히 겉모습뿐이고, 결코 물질화되지 못한 가공적 약속일 뿐이다. 그러니까 카페인 프리 다이어트 콜라를 마신다는 것은 우리가 뭔가의 가장假 아래에서 거의 실질적으로 아무것도 아닌' 음료를 마신다는 것과 같다.

여기서 니체의 고전적 허무주의가 떠오른다. 니체는 '아무것도 원하지 않음(wanting nothing)'과 적극적으로 '아무것도 아님(Nothingness)' 그자체를 원하는 두 자세의 대립을 보여 주었다. 니체의 견해를 흉내 내어 라캉은 거식증 환자가 단순히 '아무것도 먹지 않을 뿐만 아니라 '아무것도 아님', 즉 텅 비어 있는 공허 그 자체를 적극적으로 원한다는 것을 강조한 적이 있다. 이 공허야말로 그 자체로 욕망의 궁극의 대상원인이다. 오스트리아의 정신분석가 에른스트 크리스(Ernst Kris)가 예로 들었던 그 유명한 환자의 경우가 그랬다. 비록 자신이 아무것도 훔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도둑질에 죄의식을 느끼고 있었다. 다시 말하거니와 그가 훔치는 것은 '아무것도 아님 그 자체였다. 그러므로 카페인 프리 다이어트 콜라의 경우 우리는 '아무것도 아님' 그자체를 마시는 거였다. 

콜라가 숭고한 맛을 갖기 위해서는 차가운 온도와 방금 딴 것이라는 조건이 맞아야 한다. '숭고한'이라는 말이 너무 숭고하고 낯설다면 '고급' 맛으로 바꿔 불러도 괜찮다. 욕망의 대상, 섹스 파트너, 일상용품 등도 마찬가지다. 아름답게 빛나기 위해서는 나름의 환상적 무대장치, 화려한 옷차림과 화장, 세련된 색채와 형태가 필요할 것이다. 그 역할을 하는 것이 대상 a다.

그런데 원래 숭고한 것이라고 생각했던 아우라가 일시에 몰락하면 남는 것은 쓰레기뿐이다. 콜라의 김이 빠지면 우리는 그것을 쏟아 버린다. 타자로부터 대상 a가 떠나버리면 우리의 욕망도 마치 김빠진 콜라같아진다. 카리스마가 넘치고 능력이 출중하여 한없이 존경하던 어느 개인이 노쇠하거나 사회적 지위를 상실하여 초라하게 되었을 때 사람들은 그에 대한 존경심을 거둔다. 단순히 존경심을 거두는 것이 아니라 경멸하기까지 한다. 숭고에서 대상 a가 빠지면 대상은 오물로 변한다. 이 지점에서 신기하게도 라캉은 에드먼드 버크의 숭고론과 조우한다. 버크는 인간에게서 또는 동물에게서 힘이 빠질 때 거기서 숭고도 사라진다고 했다.


여성들의 장신구

모든 사람이 마스크를 쓰고 다니는 희한한 시대를 우리는 살았었다. 마스크도 일종의 가면이다. 가면은 본래의 얼굴을 가려 가짜의 얼굴을 타인들에게 보여 주는 장치다. 그러나 굳이 가면을 쓰지 않더라도 모든 사물에는 표면과 그 너머 사이에 불일치가 있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모든 표면은 곧 가면이다. 그것이 사물의 원리다.

근원적으로 모든 생물체는 자신의 본래 모습을 가리고 다른 모습을 앞에 내세운다. 일종의 가면이다. 싸움을 하기 직전 위협적으로 입을 벌리고 포효하는 수컷 동물의 모습은 그 자체가 가면 혹은 분신이다. 이 동물이 필사적인 싸움 속에서 성공하는 것은 바로 이 자신과 분리된 형태, 즉 가면 속에서이다. 생물체의 번식을 위한 결합도 이런 상호간의 분신이 큰 역할을 한다. 남성과 여성을 결합시키는 매혹의 전략 속에서 변장은 매우 중요하다. 왕조시대 서양 귀족의 무도회에서 남성과 여성이 날카롭고 격렬하게 만나는 것은 마스크의 매개를 통해서였다. 현대의 세련된 화장이나 고도의 성형수술 같은 것도 상대방을 매혹시키기 위한 일종의 변장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오로지 욕망의 주체인 인간만이 다른 동물들과는 달리 이상상적 홀림에 완전히 사로잡히지 않는다. 인간만이, 가면은 존재의 분리일 뿐 존재 전체가 아니라는 것, 가면 너머에 본래의 모습이 있다는 것을 안다. 화장이나 성형수술로 아름답게 된 여성을 찬탄하는 한편 끊임없이 '뽀샵'과 성형에 대한 경멸감이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는 이유이다.

가장(假裝)은 특히 여성성과 관련이 있다는 통설이 있다. 남자는 남자 그 자체이며 인간이라는 종의 체현인 반면, 여자는 남자의 무언가가 부족한, 다시 말해 거세된 사람이다. 영어로 'man'은 그냥 인간이라는 종이면서 동시에 남자를 뜻하지만 'woman'은 오로지 여자만을 뜻할 뿐이다. 이 거세, 다시 말해 이 결여를 은폐하기 위해 여자들은 장신구라든가 화장이라든가 베일에 의존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라캉은 여성의 장신구가 남근의 결여를 은폐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남근의 대체물이라고 말한다. 페니스의 부재가 여성들에게 남근을 욕망하게 하고, 따라서 장신구나 베일로 그녀들은 그 결여를 감춘다. 그러나 남근의 속성은 원래 유사물이므로, 그 가면을 벗기면 여전히 그 안에는 여자가 있다. 여자와 마찬가지로 남자도 원천적으로 거세되었으므로 그의 남근을 벗기면 역시 그 뒤에는 여자가 있다는것이 라캉의 생각이다.

욕망의 시선

인간의 욕망은 타자가 가진 욕망에 대한 욕망이다. 쉽게 말하면 남들이 갖고 싶어 하는 것을 나도 갖고 싶어 하는 것이다. 남들이 명품백을 들었으므로 나도 그 명품 백을 들고싶고, 남들이 모두 예쁘다고 추앙하니 나도 그 여배우와 사귀거나 결혼하고 싶은 것이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내 눈앞에 보이는 타자의 모습이다. 그의 과시적 소비가 내 욕망의 아주 중요한 요인이다. 내 욕망의 저 쪽 끝에는 타자가 내게 보여 주는 어떤 볼거리 (donnerà voir, showing)가 있다. 물론 타자의 '보여주기'만 있는게 아니라 바라보는 나의 눈에도 어떤 욕구가 있다. 이 둘이 합쳐져 욕망이 생긴다. 눈에게 욕구가 없다면 어떻게 이 '보여주기'가 나의 욕망을 충족시킬 수 있겠는가? 눈은 나름의 식욕(appetite)을 갖고 있고, 그것을 반드시 충족시키고 싶은 욕구를 가지고 있다. 눈은 단순히 인식의 기관일 뿐만 아니라 쾌락의 기관이기도 하다. 눈이라는 기관의 기능에 이미 욕구가 내재해 있다.

눈은 또한 대상을 분리시키는 치명적 기능도 가지고 있다. 탐욕에 가득찬 사악한 눈의 기능에 대해 많은 이야기가 회자되고 있다. 라캉은 자신이 어렸을 때 프랑스를 비롯한 다른 여러 유럽 나라들의 농촌지역에 눈이 동물의 젖을 마르게 하고, 병이나 불운을 가져다주는 힘이 있다는 이야기가 널리 퍼져 있었다고 했다. 예를 들어 새끼를 막낳은 가축을 누군가가 바라보면 그 어미의 젖이 마르고, 사람도 누군가의 유별난 시선을 받으면 병에 걸리거나 재수 없는 일이 생긴다는 속설이다.

이때 그 불길한 눈의 기능을 라캉은 인비디아(invidia)라고 했다. 현대영어 envy(선망)의 어원인 인비디아는 '보다(to see)'라는 뜻의 라틴어비데레(videre)에서 유래했다.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에 인비디아의 시선을 묘사한 구절이 있다. 어머니 품에서 젖을 빠는 동생을 갈기갈기 찢어 놓을듯한, 그리고 독을 옮겨 놓을 듯한 쓰라린 시선으로 바라보는 한 어린아이를 묘사하며, 자신의 운명이 그와 같다고 했다.

시선의 기능 속에 있는 인비디아는 질투와는 조금 다르다. 어린아이건 어른이건 우리가 뭔가를 선망할 때, 반드시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을 선망하지는 않는다. 어린 동생을 선망하는 소년은 더 이상 어머니의 젖이 필요 없는데도 거의 창백한 얼굴이 되어 동생을 죽일 듯이 선망한다. 이처럼 자신에게는 아무 소용도 없는 것인데 일단 다른 사람들이 소유하고 있는 것을 보면 느끼게 되는 질시의 감정이 바로 선망이다. 그가 집착하고 있는 대상 로부터 분리된 작은 조각을 다른 사람이 만족스럽게 소유하고 있는 모습 앞에서 느끼는 강렬한 부러움이다.

사물은 그 사물이 가진 직접적 기능을 다른 사물과 교환할 수 없다(예를 들어 냉장고는 토스트를 만들지 못한다). 이러한 명시적 기능을 제외하면, 사물은 암시적 의미의장에서 가상적으로 무한하게 서로 대체될 수 있다. 거기에서 사물은 지위나 부, '멋진 디자인'의 기호로서 교환되고 유통된다. 이 의미화 '놀이'가 소비라고 장 보드리야르는 주장한다.  모든 사물은 이러한 차원에서 냉장고와 대체될 수 있다. 어떤 것도 부귀의 기호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욕구와 선택은 사물의 특정한 기능이 아니라 이러한 기호들의 무제한적 호환성을 히스테리적 방식으로 추종하는 것이다. 어떤 욕구가 차이에 대한 욕구(사회적 의미에 대한 욕망)이지 특정한 사물에 대한 욕구가 아니라는 것을 알 때, 오직 그때에만 만족이 충족될 수 없으며 따라서 욕구의 한정이란 있을 수 없음을 이해하게 된다.

피터 드러커는 마케팅에 대해 마케팅이란 사람들의 욕망 앞에 거절할 수 없는 무언가를 내놓는 일이라고 암시를 한 적이 있다. 또 하버드 대학의 제럴드 잘트만 교수는 더 나아가 그 욕망이 무의식에서 발현된다고 한다. "고객이 표현하는 욕구는 단 5% 밖에 되지 않으며, 소비자 욕망의 95%는 무의식에서 발현된다” 는 것이다. 

그러니까 인간의 욕망을 탐구하는 첫 번째 힌트는 '무의식'이다. 무의식은 가장 근본적인 욕망의 구조와 맞닿아 있다. 

한스 게오르크 호이젤 박사는<뇌, 욕망의 비밀을 풀다>에서 인간이 갖는 욕망의 3가지 범주(Limbic System)로 설명하는데 이들은 지배 시스템,균형 시스템, 그리고 자극 시스템이라고 한다. 지배 시스템은 권력욕망이고 경쟁에서 승리하고픈 욕망인데, 소비자 행동 패턴에서 우월함을 느끼려는 본능과 연결된다. 한정판이나 희소제품을 찾는 소비자의 행동에서 엿볼 수 있다. 균형 시스템은 위험을 피하려는 본능적 욕망이다. 사람들은 익숙한 곳에서서 편안함을 느끼고, 질서가 유지될 때 행복감을 느낀다. 식당에서 벽을 등지는 자리가 가장 선호되고 사람들을 자기 시야에 두려는 심리등은 바로 안전에 대한 욕구 때문인 것이다.  

장 보드리야드는 그의 주저 ‘소비의 사회’에서 소비를 순응 논리를 동원하여 정의해 나간다. 

전통적인 사회학은 일반적으로 차이화 논리를 분석 원리로 삼고 있지 않다. 이 사회학은 개인이 타인과 구별되고 싶은 ‘욕구'를 찾아낸다. 달리 말하면 개인의 욕망의 일람표에 또 하나의 욕구를 덧붙여서 이 욕구와 순응에의 반대욕구를 교대로 등장시킨다. 사회심리학적 묘사의 단계에서는 이론도 논리성도 없이 두 개의 욕구는 그런대로 사이가 좋다. 그리고 이 비논리성은 '평등과 차별의 변증법' 또는 ‘순응주의와 독자성의 변증법' 등으로 다시 명명된다. 따라서 이러한 견해에서는 모든 것이 혼동된다. 소비라는 것은 우선 처음에 개인적 욕구를 지닌 개인을 중심으로 질서지어지고, 이어서 이 욕구가 권위 내지 순응의 요청에 따라서 집단의 문맥상에 지수화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실제로는 우선 먼저 차이화의 구조적 논리가 있으며, 이 논리가 개인들을 '개성화된' 것으로, 즉 서로 다른 것으로 만들어낸다. 그러나 이것은 자신을 개성적인 존재로 만드는 행위에서조차도 개개인이 순응하는 일반적인 모델과 하나의 코드에 따라서 이루어진다. 개인이라는 항목에 대한 독자성/순응주의의 도식은 본질적인 것이 아니라 체험수준의 문제이다. 근본적인 논리는 코드에 지배된 차이화/개성화의 논리이다.

브런치 글 이미지 2

달리 말하면 순응이라는 것은 지위의 평등화 및 집단의 의식적 균질화(각각의 개인이 일렬로 정렬하는)가 아니라 동일한 코드를 공유하고 어떤 사람들을 다른 집단의 사람들과 구별하게 하는 바로 그 기호들을 나누어갖는 것이다. 어떤 집단 성원들의 순응이라기보다는) 동질성을 만들어내는 것은 다른 집단과의 차이이다. 따라서 차이표시로 합의가 만들어지며, 순응효과란 그 결과로서 생기는 것에 불과하다. 이것은 대단히 중요하다. 왜냐하면 이 사실이 사회학의 분석(특히 소비에 관한)을 권위, '모방', 의식적인 사회역학의 표면적 영역에 대한 현상적인 연구로부터 코드, 구조적 관계, 기호 및 차이표시용구의 체계에 대한 분석으로, 즉 사회적 논리의 무의식적 영역의 이론으로 이행시키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차이화 체계의 기능은 위세과시 욕구의 충족을 넘어선다. 앞에서 언급한 가설을 인정한다면, 체계는 개인간의 없앨 수 없는 독특한) 실제적인 차이에 근거해서 작용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체계가 체계로서 성립하는 것은 바로 그것이 각 개인의 (어쩔 수 없이 다른) 고유의 내용 및 존재를 없애고 그것을 차이표시 기호로서 산업화될 수 있고 상업화될 수 있는 시차적 형태로 대체하기 때문이다. 체계는 일체의 독특한 성질을 제거하고 차별적 도식과 이 도식의 체계적 생산만을 보유한다. 이 단계에서 차이는 더 이상 배타적이 아니다: 여러 차이들이 다른 색깔들이 서로 '놀고' 있는 것처럼) 유행의 조합 속에서 논리적으로 서로 포섭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사회학적으로는 여러 차이의 교환이 집단의 통합을 공고하게 한다. 이렇게 코드화된 차이는 개인들을 분할하기는커녕 반대로 교환용구가 된다. 이것이야말로 기본적인 사실이며, 

소비는 이 사실에 의해 다음과 같이 정의된다:

1) 소비는 더 이상 사물의 기능적 사용 및 소유등이 아니다.

2) 소비는 더 이상 개인이나 집단의 단순한 위세과시의 기능이 아니다. 

3) 소비는 커뮤니케이션 및 교환의 체계로서, 끊임없이 보내고 받아들이고 재생되는 기호의 코드로서, 즉 언어활동으로서 정의된다.

소비는 부족의 새로운 신화처럼 현대세계의 도덕이 되었으며, 인류의 기반, 즉 유럽사상이 고대 그리스 이래로 신화의 근원과 로고스의 세계 사이에서 유지해온 균형을 파괴한다. 보드리야르는 우리가 당하고 있는 위험이 무엇인지를 알아차리고 있다. 그의 말을 다시 한번 인용해보자 : "중세사회가 신과 악마 위에서 균형을 이루었던 것과 같이, 우리 사회는 소비와 그 고발 위에서 균형을 이룬다. 악마의 주변에서는 여러 이단과 흑주술(黑呪術,악마의 힘을 빌려서 하는 주술)의 여러 종파들이 조직될 수 있었지만, 우리의 주술은 하얗다. 풍요 속에는 더 많은 이단이 존재할 수 없다. 그것은 포화상태에 달한 사회, 현기증도 역사도 없는 사회, 자기 이외에는 어떤 다른 신화를 가지지 않는 사회의 예방위생적인 백주술이다."

 (보드리야르)


"런던에서 가장 붐비는 거리에는 상점들이 나란히 붙어 있는데, 그 시선을 잃어버린 의안 (義眼)의 뒤에는 세계의 모든 귀혼품들이 진열되어 있다. 인도의 숄(어깨걸이), 미국의 권총, 중국의 자기, 파리의 코르셋, 러시아의 모피, 열대지방의 향료 : 그러나 많은 나라들을 거쳐온 이들 물품 모두에는 언제나 빠짐없이 희끄무레한 가격표가 붙어 있으며, 이 가격표에는 ‘파운드, 유로, 달러’ 라고 하는 간단명료한 기호가 붙어 다니는 아라비아숫자가 새겨져 있다. 유통과정에 등장하는 상품의 모습은 그러한 것이다."(마르크스, 《정치경제학 비판서론》)


사물의 누적과 풍부함이라고 하는 것은 분명히 눈에 가장 잘 띄는 특징이다. 통조림, 의류, 식품 및 기성복으로 화려하게 꾸며진 백화점은 풍부함의 일차적인 풍경이며 기하학적인 장소와 같다. 그러나 백화점만이 아니라 상품으로 가득 찬 휘황찬란한 진열장(어디에도 반드시 조명이 있다. 조명이 없으면 상품은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만 눈에 들어올 뿐이다) 및 육류진열대의 모든 통로, 그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식료품 및 의류의 향연은 마법처럼 침샘을 자극한다. 이러한 사물의 누적에는 생산물의 총합 그 이상의 것이 있다: 과잉의 증거, 희소성의 주술적 및 결정적인 부정, 모성적이며 호화로운 꿈의 나라(pays de Cocagne : 무엇이든지 있는 꿈나라)의 예감이 존재한다. 시장, 상점가, 슈퍼마켓은 이상할 정도로 풍부한, 재발견된 자연을 흉내낸다. 그곳은 우유와 꿀 대신 케첩과 플라스틱 위에 네온의 불빛이 흐르는 현대의 가나안 계곡이다. 아무래도 좋다! 사물이 충분하게 있는 것이 아니라 너무나도 많이 있으며, 더욱이 모든 사람을 위해서도 너무 많이 있다고 하는 강렬한 기대가 그곳에 있다. 당신은 굴, 육류, 배 또는 통조림으로 된 아스파라거스의 지금이라도 무너질 듯한 피라미드를 손에 넣은 셈치고 그중에서 조금만을 사는 것이다. 전체를 위해서 부분을 산다고 하는 것이다. 소비물자와 상품에 대한이 환유적이고 반복적인 언설은 과잉 자체에 따른 집단적인 하나의 큰 은유에 의해서 다시 증여의 이미지, 즉 무궁무진하며 눈부신 윤택함의 이미지가 되는 것인데, 그것은 축제의 이미지와 다를 바 없다. 풍부함의 가장 기본적인 형태이면서도 가장 의미있는 형태인 산처럼 쌓아올리는 단계를 넘어서 사물은 파노플리(panoplie) (세트)나 컬렉션으로 조직된다. 의류, 가정 전기제품 등의 거의 모든 상점은 서로 부르고 응답하는, 또 아주 조금밖에는 다르지 않은 사물들의 시리즈를 제공하고 있다. 골동품점의 진열장은 이들 시리즈의 귀족적인 호화로운 전형(典型)인데, 그 안에 있는 것은 남아도는 물품이 아니라 소비자의 선택과 연쇄적인 심리적 반응에 따라 인도되는 선별된 또 상호보완하는 일련의 사물로서, 소비자는 그것들을 대충 훑어보고 평가하여 모두를 단일 범주로 파악한다. 상대로서 조합되는 다른 사물과 완전히 무관하게 그 자체만으로 제공되는 사물은 오늘날에는 별로 없다. 이 때문에 사물에 대한 소비자의 관계가 변해버렸다. 소비자는 그 특수한 유용성에서 이러저러한 사물과 관계하는 것이 아니라 그 전체적인 의미 속에서 사물의 세트와 관계하는 것이 된다. 세탁기, 냉장고, 식기세척기 등은 도구로서의 각각의 의미와는 다른 의미를 가진다. 쇼윈도, 광고, 기업, 그리고 특히 여기에서 주역(主役)을 행하는 상표는 하나의 사슬처럼 거의 떼놓을 수 없는 하나의 전체로서 일관된 집합적인 모습을 준다. 이때 그것들은 일련의 단순한 사물들이 아니다. 소비자를 보다 복잡한 일련의 동기로 유도하면서 서로에게는 보다. 복잡한 초(超)사물임을 뜻하고 있는 한에 있어서 사물은 일련의 의미하는 것이다. 사물은 결코 절대적으로 무질서"하게 소비되지 않는다. 어떤 경우에는 더 잘 유혹하기 위하여 무질서를 흉내낼 수 있다. 그러나 어느 경우에도 소비자에게 견본을 제시하여 구매충동을 사물의 망으로 향하게 하고, 이 충동을 유혹하여 자신의 논리에 따라 최대한의 투자와 경제적 잠재력의 한계에까지 이르도록 사물은 준비한다. 의류, 여러 기구, 화장품은 따라서 사물의 구입순서를 만들며, 소비자의 마음속에 타성의 습관이 생기게 한다: 소비자는 논리적으로 어느 사물로부터 다른 사물로 손을 뻗치는데, 이때 그는 사물의 계략에 빠지는 것이다 이것은 상품의 풍부함 자체에서 발생하는 구매 및 소유의 현혹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고대 로마의 판테온에 모든 나라의 신이 혼합하여 공존하고 있었던 바와 같이, 현대의 판테온인 거대한 '다이제스트'로서의 슈퍼쇼핑센터, 우리의 팡데모니엄 (악마의 소굴, 모든 악덕이 지배하는 곳)에는 소비의 모든 신 또는 악마들이, 즉 동일한 추상작용에 의해 없어진 모든 노동, 갈등 및 계절이 모이고 있다. 이렇게 하여 통합된 생활의 실체, 이 보편적인 다이제스트에서는 더 이상 의미가 있을 수 없다. 꿈의 작업, 시적(詩的) 작업, 의미의 작업이었던 것, 즉 구별된 요소들을 생생하게 결합시키는 것에 근거하는 이동과 응축의 큰 도식, 은유와 모순의 위대한 형태도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균질한 요소들의 영원한 대체만이 있을 뿐이다. 상징적인 기능도 더 이상 없으며, 항상 봄 같은 기후 속에서 '분위기'의 영원한 결합이 반복되는 것이다.

소비는 긴장의 해소라고 하는 결여에 의한 행복을 노린다. 그러나 그것은 다음과 같은 모순에 부딪힌다. 즉, 이 새로운 가치체계가 갖는 수동성과 본질적으로 자발적, 행동적이며 유효성과 희생을 지시하는 사회적 도덕의 규범과의 모순에 부딪힌다. 쾌락주의적인 이 새로운 행동방식에 따라 다니는 깊은 죄의식과, '욕망의 전략가들에 의해 명확하게 규정된, 수동성을 면죄해 주어야 하는 긴급성이 여기에서 생겨난다. 문제나 말썽거리가 없는, 따라서 그것을 즐기고 있는 무수한 사람들에게 수동성에서 나오는 죄의식을 없애주어야 한다. 여기에 매스미디어에 의한 극적인 드라마화의 조작이 개입한다(모든 메시지의 보편적 범주로서의 3면기사, 곧 카타스트로프가 그것이다). 청교도적 도덕과 쾌락주의적 도덕 사이의 이 모순을 해결하려면, 사적 영역의 평온함은 카타스트로프의 운명으로부터 끊임없이 위협받고 포위되고 있는 탈취된 가치로 나타나지 않으면 안된다. 안전이 (쾌락의 틀 속에서 그러한 것으로서 보다 깊게 느껴지기 위해서 뿐만 아니라, 또 안전의 선택이 구원이라는 윤리의 틀 속에서) 항상 정당하다고 느껴지기 위해서도 외부세계의 폭력과 비인간성이 필요하다. 일상성이 자신과는 정반대인 위대함과 숭고함을 회복하려면 운명과 수난 및 숙명의 기호가 보호지대의 주위에서 개화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 결과 숙명은, 진부한 생활이 희망과 은총을 찾기 위해서도, 어디에서나 암시되고 명시된다. 라디오와 텔레비전에서도, 신문에서도, 개인간의 대화에서도 국가적 연설에서도 자동차 사고의 화제가 이상할 정도로 많이 이야기되고 있다는 것이 그 증거이다. 자동차 사고는 '일상적인 숙명'의 가장 뛰어난 구체화이다. 이 화제가 큰 정열을 갖고 취급되는 것은 그 화제가 본질적인 집단적 기능을 수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동차 사고 뉴스와 경쟁할 만한 것은 일기예보 뉴스뿐인데, 이 양자는 신화적인 한쌍이기 때문이다 태양에 대한 집착과 죽음에 대한 긴 이야기는 서로 떼어놓을 수 없다.

이리하여 일상성은 사회적 지위와 수동성에 의한 행복의 정당화와, 운명의 희생자에 대해 느껴지는 '우울한 즐거움'의 기묘한 혼합물을 제공한다. 이 모든 것은 어떤 심성(心性), 즉 특수한 '감상(感傷)'을 구성한다. 소비사회는 풍요롭지만 위협받고 포위된 예루살렘이 되고자 한다. 이것이 소비사회의 이데올로기이다.


낭비

부유한 사회의 풍부함이 어느 정도로 낭비와 관련되어 있는지는 잘 알려져 있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쓰레기통의 문명'에 대해서 말하고, 심지어는 '쓰레기통의 사회학'을 구상할 수 있을 정도이기 때문이다. 당신이 버리는 것이 무엇인지를 말해봐요. 그러면 나는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를 말해주겠습니다! 그러나 낭비된 쓰레기의 통계는 그 자체로는 재미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공급된 재화와 그 풍부함의 양에 대한 쓸데없는 기호에 불과하다. 소비되기 위해 만들어졌지만, 소비되지 않은 것의 찌꺼기만 본다면 낭비도 또 그것의 기능도 이해하지 못한다. 이 경우에도 또한 소비의 단순한 정의 - 재화의 절대적 유용성에 근거한 도덕적 정의 -가 모습을 나타낸다. 그러므로 우리의 도덕주의자들은 모두 부의 낭비에 대한 투쟁에 나서고 있다. 이 투쟁은 사물의 사용가치라고 할 수 있는, 사물에 내재하는 그런 종류의 도덕법칙과 사물의 내구성을 더 이상 존중하지 않고 자기가 가진 것을 버린다든가 생활수준이나 유행 등의 변덕에 따라 다른 것으로 바꾸는 사적 개인에 대한 투쟁에서, 인류가 일반적인 경제활동을 할 때나 천연자원을 개발할 때 저지른 엄연한 사실인, 국가적 및 국제적 규모의 낭비와 심지어는 말하자면 전세계적 규모의 낭비에 대한 투쟁에까지 이른다. 요컨대, 낭비는 항상 인간으로 하여금 그의 비축품을 태워버리게 하고 자신의 생존조건을 비합리적 행동에 의해 위태롭게 하는 일종의 광기, 착란, 본능의 역기능으로 간주된다

지금까지 모든 사회는 엄밀하게 필요한 것 이상으로 항상 낭비하고 탕진하고 소모하고 소비하였는데, 그것은 다음과 같은 단순한 이유 때문이다. 즉, 개인이나 사회가 생존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진정으로 살고 있다는 것을 느끼는 것은 초과분과 여분을 소비할 때라는 것이다. 이러한 소비는 '소모', 즉 순수하고 단순한 파괴에까지 이를 수 있는데, 그때에는 특별한 사회적 기능을 갖는다. 가령 포틀라치 [북미 인디언들 사이의 의식화된 증여 및 파괴행위)에서는 귀중한 재화들을 경쟁적으로 파괴하는 것이 사회조직을 공고하게 한다. 콰키우틀족은 텐트의 덮개, 카누, 문장이 그려져 있는 동판을 내놓는데, 그들은 '자신들의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 자신들의 가치를 확인하기 위해 그것들을 불태우거나 바다에 던진다. 또한 지금까지 어떤 시대에도 귀족계급은 쓸데없는 낭비를 통해 자신들의 우월성을 확인하였다. 따라서 합리주의자와 경제학자가 만들어낸 효용이라는 개념은 훨씬 더 일반적인 사회적 논리에 따라 재검토해야 한다. 이 논리에서 낭비는 결코 비합리적인 찌꺼기가 아니라 긍정적인 기능을 지니면서 보다 높은 사회적 기능수준에서 합리적 효용과 교대하며, 심지어 결국에는 본질적인 기능으로 지출의 증가, 여분, '쓸데없는 지출'의 의례적인 무용 (無用)이 개인적인 차원에서도 사회적인 차원에서도 가치, 차이 및 의미를 만들어내는 장소가 되기 때문에 나타난다. 이러한 시각에서는 '소비'에 대한 정의가 소모로, 즉 생산적인 낭비로 나타난다 

“아, '필요'를 논하지 마세요! 가장 비참한 거지도 가장 하찮은 것에서는 아직도 약간의 여분을 갖고 있습니다. 자연을 결핍상태로 되돌아가게 하면, 인간은 동물에 지나지 않게 되고 인간의 삶은 어떤 가치도 없습니다. 우리가 인간답게 살기 위해서는 약간의 여분이 필요하다는 것을 이해하겠습니까?" 라고 셰익스피어는 <리어왕》에서 쓰고 있다.

폴 발레리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한 상자의 비스킷은 한 달간의 안일과 생활이다. 절인 고기 단지 몇 개, 곡물과 나무열매로 채운 섬유로 만든 몇 개의 큰 광주리는 평온의 보물이다. 평온한 긴 겨울이 그것들의 향기 속에 잠재해 있다.

당신의 자동차를 부수세요. 그 뒤는 보험이 책임집니다!" 소비사회가 존재하려면 사물이 필요하다. 보다 정확하게 말하면 사물을 파괴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러나 사물의 풍부함 자체는 역설적으로 말하면 가난함을 의미한다. 재고품이라는 것은 결핍에 붙어 있는 쓸모없는 장식이며 고뇌의 표시다. 사물은 파괴 속에서만 남아돌 정도로 존재하며, 그리고 소멸 속에서 부의 증거가 된다.

사회적 차별 및 지위 요구에 의해 활성화된 욕구와 갈망은 성장사회에서는 자유로이 처분할 수 있는 재화나 객관적인 충족 기회보다 항상 조금 더 빨리 앞서 나가는 경향이 있다. 게다가 요구의 증가를 전제하는 산업체계 자체도 재화의 공급에 비해 욕구가 항상 초과한다는 것을 전제한다.이것은 노동력에서 짜내는 이윤을 극대화하기 위해 실업자가 남아도는 것에 편승하는 것과 똑같다. 여기에서 욕구와 생산력 사이의 깊은 유사성을 찾아낼 수 있다. - 그것은 욕구의 '예비군이라 불린다. - 재화와 욕구간의 이러한 불균형에 편승하면서도 체계는 하나의 모순에 부딪힌다: 경제성장은 욕구의 증가, 그리고 재화와 욕구간의 어느 정도의 불균형을 수반할 뿐만 아니라, 욕구의 증가와 생산력 증대 사이의 이 불균형 자체의 증가도 수반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모순에서 '심리적 궁핍화'와 잠재적이고도 만성적인 위기 상태가 생긴다. 이 위기는 그 자체가 기능적으로 성장과 관련되어 있는 것으로서 파국의 입구, 모순의 폭발에 이를 수 있다.

욕구의 증가와 생산의 증대를 비교하면 차이라는 결정적인 매개변수가 분명하게 나타난다는 것이다. 

재화와 생산물의 흐름은 바닷물의 수위처럼 균형을 이루는 것이 아니다. 사회적 타성은 자연의 관성과는 달리 왜곡, 차별 및 특권을 초래한다. 성장은 민주주의가 아니다. 풍부함은 차별과 관련되어 있다.

이런 우화가 있다: "옛날에 희소성 속에서 사는 한 남자가 있었다. 경제학을 통해서 많은 모험과 오랜 여행을 한 끝에 그는 풍요사회라는 여자를 만났다. 그들은 결혼하여 많은 욕구를 낳았다." 화이트헤드(A.N. Whitehead)는 "호모에코노미쿠스의 아름다움은 그가 추구하는 것을 우리가 정확하게 알고 있다는 점에 있었다"라고 말한 바 있는데, 인간의 본성과 권리의 행복한 결합시대인 현대에 태어난 황금시대의 이 화석인간(人間)은 형식적 합리성이라는 강력한 원칙을 가지고 태어났다. 이 원칙은 그로 하여금 다음의 두 가지 사항을 행하도록 한다:

브런치 글 이미지 3

1. 조금도 망설임이 없이 자기 자신의 행복을 추구하게 한다:

2. 자신에게 최대한의 만족을 줄 사물을 선호하도록 한다.

소비에 대한 모든 논의는 다음과 같은 신화적 우화로 요약된다: 인간은 욕구를 지니고 태어났는데 이 욕구는 만족을 주는'사물로 그를 이끈다'는 우화다. 인간이라는 존재는 여하튼 결코 만족되지 않기 때문에 똑같은 이야기가 옛날 우화의 케케묵은 명백함을 갖고서 무한히 반복된다.

어떤 사람들에게서는 당혹감이 나타나고 있다: "욕구는 경제학이 관여하는 모든 미지의 것 중에서도 가장 끈질지게 알려지지 않은 것이다." 경제학자에게서 욕구란 '효용'이다: 소비를 목적으로 한, 즉 재화의 효용을 소멸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한 이러저러한 특정 재화에 대한 욕구이다. 따라서 욕구는 자유로이 처분할 수 있는 재화를 통해 처음부터 이미 어떤 목표= 끝에 향해지며, 선호(選好)역시 시장에 공급되는 생산물의 선발에 의해 방향지어진다: 욕구는 결국 지불능력이 있는 수요(유효수요)이다. 심리학자들에게 욕구란 '사물지향적'이기보다는 오히려 '본능지향적'이면서 생득적이고 불명확한 일종의 필연적인 성격을 지닌 '동기'이다. 사회학자들과 사회심리학자들에게는 욕구가 '사회문화적' 성격을 가지고 있다.그들은 순응 및 경쟁의 모델("세상 사람들에게 뒤지지 않는다”)과 사회 전체나 역사와 관련되어 있는 큰 '문화모델'을 등장시킨다.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위해서 즐기지만, 그러나 소비할 때는 결코 혼자서 소비하는 것이 아니다(그러한 견해는 소비에 대한 모든 이데올로기적논의에 의해 교묘하게 유지되어온 소비자의 환상이다). 사람들은 모든 소비자들이 자기들도 모르는 사이에 서로 연루되는, 코드화된 가치들의 생산 및 교환의 보편화된 체계 속에 들어가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소비는 언어와 마찬가지로, 또는 미개사회의 친족체계와 마찬가지로 의미작용의 질서이다.

시민적 강제로서의 소비에 대해 아이젠하워 는 1958년에 이렇게 말했다: "돈은 국가에 의해서 사용되는 것보다 세금 부담으로부터 해방된 납세자에 의해 사용되는 것이 더 유효할 것이다.” 《타임(Time)》지는 다음과 같이 덧붙여 말하고 있다. " 선풍기를 에어컨 으로 바꾸면 자신들의 힘으로 경제를 성장시키는 것이다. 간단히 말해서 소비자들은 시민으로서의 의무를 행하는 것이다. “절약은 반(反)미국적이다”라고 화이트(Whyte)는 말했다. "개인이 산업체계에 봉사하는 것은 그 체계에 자신의 예금을 바치고 자신의 자본을 제공함으로써가 아니라 그 제품을 소비함으로써다." 라고 갤브레이스 는 말한다. 다시 말하면 소비는 사회적 노동이다. 


반(反)소비

 "부인, 모(某) 미장원은 세계에서 제일 머리를 잘 흐트러줍니다!" "이 심플한 옷은 고급의상실이 주는 인상을 없애줍니다."

이러한 반소비의 매우 '현대적인' 증후군은 어디나 있는데, 그것은 결국 메타소비이며 계급의 문화지수로서의 역할을 한다. 리스먼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사라진 검소함은 사치라는 기반 위에서 완성된다 그리고 그 결과는 모든 수준에서 다시 발견된다. 지적(知的)' 미제라빌리즘(misérabilisme) (가난한 자인 체하는 것)과 '프롤레타리즘)' (무산자인 체하는 것은 부르주아적 조건에 의거해 완성되는 것이다. 마치 수준은 다르지만 사라진 영웅적 과거에 의거해서 현대의 미국인들이 집단적인 오락으로서 서부의 하천으로 사금을 찾으러 가는 것과 같다: 역전된 효과, 사라진 현실, 모순된 표현에 의한이 '마귀를 쫓는 것'은 도처에서 소비 및 과잉소비의 효과가 나타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데, 이 효과는 어디에서나 차이 표시 논리에 통합된다.

문화적 소비

폭넓은 층의 사람들이 사회계급을 기어올라가 하나 위의 지위에 도달하면 그와 동시에 문화적 요구를 지니게 되는데, 그것은 그 지위를 기호로 표시하고 싶은 욕구에 다름아니다.  키치는 귀중하고 드문 사물, 하나밖에 없는 사물(그렇지만 그것도 공장에서 제조할 수 있다)의 가치를 높인다. 키치와 '진짜' 사물은 오늘날 끊임없이 변화하고 증가하는 차이표시 용구의 논리에 따라서 함께 소비의 세계를 조직하고 있다. 키치의 차이표시가치는 빈약한 것이지만, 이 빈약한 가치는 통계적으로 최대의 이익을 가져다주는 힘을 갖고 있으며, 어떤 계급의 사람들도 손에 넣을 수 있다. 이에 반해 희소품의 최대의 차이표시 가치는 그것들의 절대수가 한정되어 있다는 사실에서 생긴다. 여기에서는 사물의 '아름다움'이 문제되는 것이 아니라 차이표시 능력이 문제되는데, 그것은 사회학적 기능이다. 이런 의미에서 모든 사물은 그 각각이 통계적으로 보아 어느 정도 입수하기 쉬운가, 절대수가 어느 정도 한정되어 있는가에 따라서 그 가치의 순위가 결정된다. 소비사회의 체계에서는 '어떤 미소'(사 강이 쓴 소설 제목) 마저도 소비될 수밖에 없는 기호가 되고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미소는 더 이상 유머나 비판적인 거리(距離)가 아니라, 오늘날에는 윙크라는 형태로 표현되는 그 초월적이고 비판적인 가치를 상기시키는 것에 불과하다. 이 거짓된 거리는 스파이 영화, 고다르(Godard)의 영화, 또는 그것을 문화적 암시로서 항상 사용하는 현대광고 등 모든 곳에서 볼 수 있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이'차가운 미소에서는 어디까지가 유머의 미소이고 어디까지가 상업주의의 공범자의 미소인지 더 이상 구별할 수 없다

소비사회의 앞날

중세사회가 신과 악마 위에 균형을 유지하였듯이, 우리 사회는 소비와 그 고발 위에서 균형을 취하고 있다. 악마의 주위에는 다양한 이단과 다양한 흑주술의 종파가 조직될 수 있었지만, 우리 주술은 하얗고, 풍요 속에는 더 이상 이단이 존재할 수 없다. 그것은 포화상태에 달한 사회, 현기증도 역사도 없는 사회, 자기 이외에는 어떤 다른 신화도 가지지 않는 사회의 예방위생적인 힘이다.

그러나 우리도 사물과 그 겉보기의 풍요의 올가미에 걸려 음침하고 예언적인 언설에 다시 도착하였다. 그렇지만 사물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다. 사물의 배후에는 텅 빈 인간관계가 있고, 엄청난 규모로 동원된 생산력과 사회적 힘이 물상화되고 돋보이게 된다. 어느날 갑자기 난폭한 폭발과 붕괴의 과정이 시작되어 1968년 5월과 같이, 예측은 할 수 없지만 확실한 방식으로 검은 미사가 아니라 이 소비의 하얀 미사를 때려부수기를 기다려보자.


소비하는 텍스트,생산하는 텍스트

언어로 기록된 글도 소비 또는 생산으로 구분될 수 있다. 

롤랑 바르뜨는 저자들을 두 종류로 구분한다. 이 중 저급한 저자는 에크리방(écrivant)으로서, 그에게 언어는 어떤 언어외적 목적에 대한 수단이다. 그는 직접적인 대상을 가졌다는 점에서 타동사적인 작가이다. 또다른 종류의 작가인 에크리벵 (écrivain)은 그 목적이 아닌, 언어라는 수단에 열중하는 한에 있어서 자동사적으로 글을 쓴다. 에크리방은 작품(work)을 생산하며 에크리뱅은 텍스트(Text)를 생산한다. 텍스트는 그 독자가 말하자면 독서를 할 때 텍스트를 다시 쓰기 때문에, 쓸 수 있는 것이다. 반면에 작품은 읽을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작품은 다시 쓰지 않으며 그냥 처음부터 끝까지 읽을 뿐이다. 우리는 작품은 수평적으로 통과해 나가지만, 텍스트는, 만약 가능하다면, 수직적으로 통과해 나간다. 즉 읽을 수 있는 텍스트는 소비를 위한 상품에 지나지 않는다. 이런 텍스트는 불가피하게 그리고 돌이킬 수 없이, 어떤 결과로, 숨겨졌던 담론으로 움직여 간다.반면 쓸 수 있는 텍스트는 의미의 생산을, 독자의 적극적인 참여를 요구한다. 바르뜨는 문학작품의 목표는 독자를 텍스트의 소비자로 전락시키는 것이 아니라 텍스트의 생산자로 만드는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소비자의 마음

오늘 저녁은 스파게티를 먹기로 했다. 그런데 소스에 넣을 고기가 없어서 급히 상점에 간다. 진열대에는 소고기 다짐육 2가지가 있다.

무지방 90퍼센트 소고기

지방 10퍼센트 소고기

어느 쪽을 사고 싶은가?

어느 것을 선택하겠는가? 대부분은 무지방 90퍼센트 소고기를 살 것이다. 왜 그럴까? 논리적이거나 계산이 빠르면 '둘 다 똑같잖아!'라고 생각할 텐데 말이다. 지방 10퍼센트 소고기가 더 싸다면 어떨까? 그래도 뇌는 사지 말라고 할 것이다. 우리 잠재의식이 훨씬 좋지 않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소비자는 항상 최고의 상품을 선택할까? 천만에! 뇌는 정보가 들어오는 방식에 따라 선택한다. 강제하면 의식 영역을 움직일 수도 있지만, 평소에는 의식이 아니라 잠재의식이 먼저 작동한다.

멋진 그림을 싸구려 액자에 넣으면 작품 감상에 어떤 영향을 미칠까? 어린아이의 그림을 멋진 액자에 끼워 넣으면 어떻게 보일까? 어째서 그림 주변의 작은 테두리 때문에 결과가 달라질까? 잠재의식이 순식간에 평가하고 추정하여 판단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고급 액자나 적재적소의 미적 디테일만 보고도 고급 작품이라고 확신한다.

뇌는 단어나 어구, 숫자에도 그런 식으로 움직인다. 말하는 내용보다 방식이 더 중요하다.

언어유희로 단점을 장점으로 돌변시키는 데 탁월한 분야가 부동산 광고다. 세입자 구함' 광고에서 '안온한'이라는 말은 '좁은'보다 훨씬 좋은 인상을 남긴다. 또한 '멋들어진'은 '오래된'보다 훨씬 호감을 준다. "전원생활을 좋아하신다면 널찍하고 쓸모가 많은 마당이 딸린 이 안온하고 멋들어진 집을 꼭 보셔야 합니다."

“직장이 어디든 차를 몰고 다니기 너무 먼 이 집은 바깥이 볼썽사납고………… 너무 좁고 오래됐으며, 프라이버시 보장도 안 됩니다. 마당에 나무가 하나도 없거든요"라고 하는 것보다 위 문구가 훨씬 그럴듯하지 않은가?

소개 글에 쓰인 모든 형용사는 사실상 프레임이라 할 수 있다. 우리는 ‘천연’, ‘유기농', '농장에서 바로 온'으로 묘사되는 상품을 더 좋은 것으로 받아들인다. 그 묘사는 객관적 사실일까, 다른 의미가 있는 것일까, 아니면 그냥 이름이나 슬로건일까.

주위를 돌아보면 거의 모든 광고에 숫자가 포함돼 있다. “치과의사 5명 중 4명이 동의" 또는 "99.9퍼센트의 살균력", "써 본 사람 중 95퍼센트가 친구에게 추천할 의향 있음", "여성 87퍼센트가 6주 사용 후 효과를 봤고, 99퍼센트가 6개월 후에 효과 봄처럼 말이다.

찾아보면 어느 광고에서든 숫자가 보인다. 고속도로와 시내에서의 휘발유 연비, 지방이나 무지방 비율. 1백 퍼센트 통곡, 입안을 3배나 상쾌하게 세척력이 2배..

숫자가 그렇게 많이 쓰이는데 왜 지금까지 눈치 채지 못했을까? 숫자가 보이는 순간 잠재의식이 바로 결정해 버렸기 때문이다. 숫자는 우리가 가치를 매기고 비교하는 것을 돕는다. 의식 영역까지 개입할 필요가 없다. 앞에서 말했지만 결정의 99퍼센트는 잠재의식이 한다. 잠재의식의 흐름에 따라 쉽게 결정하는 방법이 있고, 필터를 통과시켜 의식영역으로 보낸 다음 신중하게 결정하는 방법이 있다. 의식 영역은 속도가 느리고 쉽게 지친다.

숫자의 힘을 활용하기 위해 우선 회사 일에서 숫자를 찾아 보자. 그다음 숫자를 최대한 활용할 방안을 찾고, 어떻게 하면 가장 설득력 있게 들릴지 생각해 보자.

언젠가 한 고객에게 "저희 고객의 87퍼센트는 계약을 갱신합니다"라는 광고 문구를 보여 주고, 그 회사 웹사이트나 홍보 자료에 실을 비슷한 통계를 찾아서 비슷하게 표현해 보라고 했다. 여기저기서 자료를 찾은 그는 다음의 홍보 문구를 만들어 왔다. "저희 고객의 78퍼센트는 추가서비스를 받습니다."

내가 처음 보여 준 문구와 형식이 같았지만 느낌은 달랐다. 나는 프레임을 바꿔 보자고 했다. 우리가 새로 만들어 낸 문구는 "고객 5명 중 4명이 추가 서비스를 받습니다"였다. 훨씬 낫지 않은가? 왜 앞에서는 퍼센트를 이용하라 하고, 나중에는 퍼센트를 이용하지 ‘말라'고 했을까?

87퍼센트는 높은 숫자다. 반올림하면 90퍼센트에 가깝고, 맥락에 따라서는 1백 퍼센트로 봐도 큰 무리가 없다. 뇌가 그것을 높은 수치로 본다는 게 중요하다. 하지만 78퍼센트는 반올림해도 80퍼센트라서 훨씬 낮은 수치로 느껴진다. 학교 점수로 치면 78퍼센트는 C에 해당하고, 학교에 따라서는 낙제에 가까운 점수일 수도 있다. 간단히 말해 우리뇌가 부정적인 의미로 받아들인다. 그렇다면 10명 중 8명이라는 숫자로 환산하는 게 낫고, 분모는 가능한 한 가장 작은 수를 쓰는 게 좋다. 그러면 5명 중 4명이 된다. 78퍼센트보다 훨씬 낫고, 같은 비율을 나타내는 80퍼센트보다도 낫다.


참고문헌

소비의 사회, 장 보드리야르 지음, 이상률 옮김, 2004

속도 경쟁사회, 황경식 채성수 지음, 2017

아름다운 것들의 추한 역사, 케이키 켈러허 지음, 이재현 옮김, 2024

멜리나 파머 지음, 소비자의 마음, 한진영 옮김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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