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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망의 경제학, 자본주의는 욕망이 돌리는 물레방아

by 빈솔 Bin Sole Feb 28. 2025

라깡은 “기표/기의” 라는 산술기호로써 기표의 우위를 표현한다. 

 여기서 나누기 표시는 기표와 기의의 차원이 분리되어 있음을 상징적으로 표현한다. 하지만 '의미 부여'를 통해서 분리는 극복된다. '의미'는 마치 기표와 기의가 원래부터 하나인 듯한 인상을 준다.하지만 거기에는 '의미'를 빗겨가는 잔여(Rest)가 항상 있다. 이러한 불완전한 대응 때문에 기의가 기표 밑으로 미끄러져 들어가는 것이 가능하게 된다. 이것은 '의미'가 결코 다할 수 없다는, 즉 결코 완전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낳게 한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의 말, 하나의 글은 영원히 완성될 수 없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원초적 결핍(Mangel)을 볼 수 있다. 어떠한 사랑도, 어떠한 현존도 절대로 완벽할 수 없다는 경험 속에서 우리는 이러한 '결핍'을 느낀다. 충족되지 못하는 잔여가 항상 남아 있다. 이 잔여가 욕망의 '장소'라고 불리우는 바로 그것이다

욕망의 경제학은 사람들의 비만에서 찾아야 한다. 비만이 만연하게 된 이유는 우리가 너무 많이 먹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우리 중 다수가 충분한 자제력을 갖추지 못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즉 욕망에 패배한 탓이다. 그렇다고 시장이 좋은 해결책을 제공할 거라고 기대할 수도 없다. 비만의 만연은 시장이 실패한 결과다. 즉, 자유시장이 우리에게 해를 입힌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시장은 현대인의 건강과 복지를 뒷받침하기도 한다. 무슨 말인가

예를 들어 당뇨를 앓고 있는 사람이 사용하는 인슐린 주사를 위해서는 바늘 공장이 필요하다. 생산라인을 따라 쇳물이 긴 줄로 바뀌고 절단기와 주형틀을 거쳐 바늘이 만들어진다. 노동자들은 기계의 작동 상태를 살피거나 자재를 필요한 곳으로 옮기는데, 이곳에서 하루에 450만 개의 바늘이 생산된다.매일 인슐린 주사를 맞으려면 바늘 외에도 다른 물건이 필요하다. 우선 주사기는 인도나 중국에 있는 공장에서 만들어진다. 시장이 이룬 기적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인 인슐린도 빠뜨릴 수 없다. 환자가가 사용하는 인슐린은 대개 실험실 연구원들이 제조하며 그들은 유전적으로 인슐린을 생산하도록 변형된 박테리아 무리를 관찰한다.

이처럼 환자가 아침마다 투여하는 인슐린은 많은 사람의 노동이 만들어낸 결과물이다. 십여 명, 아니 백여 명이 바늘 공장, 주사기 공장, 인슐린 공장에서 존의 인슐린 주사에 필요한 물건들을 만드는 것이다. 그밖에도 환자가가 다니는 병원까지 바늘, 주사기, 인슐린을 옮기는 데 많은 사람이 기여한다. 그뿐 아니라 헤아릴 수 없는 인원이 바늘 혹은 주사기의 원재료인 철과 석유를 채취하거나 채취한 철과 석유를 전 세계로 옮길 트럭, 선박, 기차를 만든다. 환자에게 약을 제공하는 과정에서 작용한 시장의 힘은 광산이나 유전, 공장의 영역을 훨씬 뛰어넘는 곳까지 미친다. 인슐린을 만든 생명공학 기업에 투자한 벤처투자자와 인슐린을 운송하는 트럭회사에 자금을 빌려준 은행, 이 모든 운영 절차에 개입한 은행가그리고 기업가를 가르친 경영대학원 등등 …...

한마디로 환자는 수천 명의 도움으로 매일 인슐린을 투여하는 셈이다. 그럼에도 그의 생명을 구하는 약은 햄 샌드위치의 절반 가격인 1.75달러에 불과하다. 예전에는 생각할 수도 없던 시스템이 오늘날 사람들의 수명을 늘리고 건강과 복지를 지탱하고 있는 것이다.  

애덤 스미스는 《국부론》의 도입부에서 스코틀랜드의 어느 핀 공장 사례를 제시하고 있다.

"첫 번째 사람이 철선을 뽑고 두 번째 사람이 철선을 곧게 펴고 세 번째 사람이 작게 절단하고 네 번째 사람이 끝을 뾰족하게 갈고 다섯 번째 사람이 머리를 붙일 부분을 간다. 마무리 작업은 머리를 핀에 붙이고 세척한 다음 포장하는 3번의 공정을 거친다. 이런 식으로 핀을 완성하기까지 약 18번의 공정이 필요하다. 모든 공정을 분리해 각각의 노동자에게 맡기는 제조업체도 있고, 두세 가지 공정을 한 명의 노동자에게 맡기는 제조업체도 있다."

흥미로운 농담 하나.--

외과의사와 토목기사 그리고 경제학자가 누구의 직업이 가장 오래되었는지 논쟁을 벌였다. 외과의사는 하느님이 아담의 갈비뼈를 빼내 이브를 만들 때 외과의사가 필요했을 거라고 말하면서 자신의 직업이 가장 오래되었다고 주장했다. 토목기사는 하느님이 인간을 창조하기 전에 땅과 바다를 나누기 위해 토목기사가 필요했을 거라고 하면서 자기 직업이 더 오래되었다고 말했다. 두 사람의 말을 들은 경제학자는 어림없다는 듯 꼿꼿한 자세로 말했다.

"하느님이 세상을 창조하기 전에 무엇이 있었습니까? 바로 혼돈입니다. 그럼 혼돈은 누가 만들었을까요?"

시장에 관한 농담이다.

자, 이렇게 자유에 맡겨 두면, 혼돈스러울 것이 뻔 한 시장이 어째서 그런대로 잘 유지되는가? 바로 보이지 않는 손의 작용이라고 애덤 스미스가 주장한 내용이다.  

그러나 자유시장이 가져온 모든 기적과 함께 사람들에게는 나쁜 결정을 내릴 자유도 생겼다. 욕망에 결정을 맡겨 버린 결과가 우리 집 부엌에서 부터 기획재정부 곳간에 까지 모든 곳에 흉측한 몰골이 출몰하고  있다.  

발자크 소설에 등장하는 라스티냐크 - 그는 가난한 법대생 으로서, 파리의 허름한 하숙집에서 먹고 자지만 멋진 옷으로 신분을 가리고 부유한 귀부인들에게 접근하는 제비같은 인간이다 - 처럼 오로지 신분 상승을 욕망하는 속물들이 구더기처럼 꼼지락 거리고 있는 것이다. 

이쯤에서 (성공에 대한 의지로 자기 정체성을 바꾸려는) 보바리 부인의 욕망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애덤 스미스는  <도덕 감정론>의 첫 문장을 다음과 같이 시작했다. .

"인간에게는 이기적인 본성이 있다. 인간의 내면에는 다른 사람의 재산을 빼앗고 싶은 마음, 다른 사람의 행복을 빼앗고 싶은 마음이 존재한다."

미국의 심리학자인 브래프먼 형제가 함께 쓴 《스웨이(동요) Sway》는 인간이 늘 비이성적 상황에 휩쓸리기 쉬운 존재라고 주장한다. 인간은 이성적이면서도 동시에 비이성적이기 때문에, '통제 받지 않는 상황'에서 잘못된 결정을 내릴 가능성이 충분하다. 그리고 중요한 점은 소비자가 유통업체만큼 자신의 소비 행동을 잘 알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브런치 글 이미지 1

로버트 케네디는 1968년 연설에서 나의 마음에 쏙 드는 내용을 이렇게 주장했다. “.... 텔레비전 프로그램은 아이들에게 장난감을 팔려고 폭력을 미화합니다. 국내총생산은 우리 아이들의 건강과 교육의 질 그리고 놀이의 즐거움을 고려하지 않습니다. 지역사회의 아름다움, 가정의 가치, 공적 논쟁의 지성, 공무원들의 도덕성을 반영하지도 않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재치와 용기, 애국심을 말해주지도 않습니다. 간단히 말해 국내총생산은 삶을 소중하게 만드는 가치를 제외한 모든 것의 측정치일 뿐입니다”

욕망의 경제학을 올바른 방향으로 추진해 가려면 GDP 측정하는 일부터 때려 치워야 한다. GDP는 국민들에게 욕심을 불러 일으키는 양귀비이다. 

우리는 시장에서 희귀성이 어떤 작용을 하는지 잘 알고 있다. 장난감회사는 일부러 10월에 출시하는 신제품의 공급을 조절해 사람들이 매장 앞에서 줄을 서게 만든다. 그래야 12월에 달아오른 분위기의 덕을 한껏 볼 수 있기 때문이다.55

사람들은 지불하는 가격만큼 가치를 얻으며 싼 제품은 그만큼 열등하다고 생각한다. 심지어 소비자들은 가격을 품질 평가의 잣대로 활용하기도 한다. 펜실베이니아 교외에 위치한 작은 예술대학 우르시누스Ursinus 칼리지는 이러한 심리를 이용했다. 1999년, 이 대학은 갈수록 입학생이 줄어드는 문제에 직면했다. 총장은 그 대응책으로 학비를 낮추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20퍼센트 가까이 인상했다. 그러자 놀랍게도 신입생이 35퍼센트나 늘어났다. 우르시누스는 '비싼 예술대학'으로 자리매김함으로써 잠재고객들에게 명문대학이라는 이미지를 심어준 것이다

개선의 과잉 또는 의도적 부족 

넓은 정원과 먼 통근거리

(피터 우벨 지음, 김태훈 옮김,『욕망의 경제학』에서 발췌)

데이비드와 제인은 미니애폴리스에서 성공한 변호사 부부로 시내에서 가까운 곳에 위치해 있으며 침실 3개가 딸린 평범한 집에서 살았다. 그들은 통근거리가 가깝고 다양한 사람이 모여 사는 점 때문에 그 동네를 만족스러워했지만 수입이 늘어나면서 보다 나은 집을 구하기로 결정했다. 사실 작은 주방과 좁은 정원은 성공한 변호사 부부에게 어울리지 않았다. 넓은 정원을 갖춘 선배들의 집이 부러웠던 그들은 교외에 있는 신흥 주택지에 새 집을 샀다. 문제는 통근시간이었다. 새 집에서 사무실까지는 길이 막히지 않을 경우 45분이 걸렸다. 겨울에 눈이라도 오면 1시간 이상 걸리기 일쑤였다. 그 결과 그들은 이전에 함께 대화하거나 자전거를 타면서 보내던 시간을 길 위에 버리게 되었다. 그들은 새 집을 살 때 먼 통근거리는 퇴근 후에 누리는 넓은 거실과 정원으로 충분히 보상받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뿐만 아니라 아이가 태어나면 마음껏 뛰어놀 수 있는 새 집이 훨씬 더 큰 행복을 안겨줄 것 같았다.

그렇다면 결과적으로 새 집을 사는 것은 옳은 결정이었을까? 

사람들은 원하는 만큼 의사결정을 잘하지 못한다. 의사결정은 카너먼과 트버스키를 유명하게 만든 휴리스틱과 편향을 비롯해 온갖 심리적 취약점의 영향으로 쉽게 왜곡된다. 휴리스틱과 편향으로 특정한 일이 발생할 가능성을 오판하거나 확실성을 과대평가했음에도 그것을 결정에 참고하기 때문이다. 휴리스틱은 이용 가능성이다. 어떤 사건이 발생했던 사례를 기억으로부터 떠올려서 특정 사건이 발생할 확률을 판단 하는 것이다. 따라서 때때로 편향이 동반된다. 데이비드와 제인의 결정은 확률에 기반을 둔 것이 아니었다. 그들의 의사결정 과정에는 가용성 편향이나 대표성 휴리스틱이 별다른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

경제학자 알로이스 스터처 Alois Stutzer와 브루노 프레이 Bruno Frey가 독일에서 조사한 바에 따르면 통근거리가 멀수록 전반적인 삶에 대한 만족도가 낮았다. 두 사람은 먼 통근거리가 실직했을 때 느끼는 감정의 20퍼센트에 해당하는 불만을 초래한다고 평가했다. 카너먼과 그의 동료들도 미국에서 비슷한 사실을 발견했다. 그들은 한 발 더 나아가 통근거리에 따라 시시각각 높아지는 불쾌감의 정도를 측정했다.

스터처와 프레이가 조사한 독일인의 평균 통근시간은 42분이고 미국은 그보다 높은 49분이다. 미국인 6명 중 1명은 매일 90분 이상을 통근길에서 보낸다. 아시아의 경우에는 사정이 더욱 나쁘다. 방콕 시민들의 평균적인 통근시간은 2시간이다. (우리나라 통계청이 지난해 12월 21일 발표한 조사 결과를 보면, 한국의 직장인은 통근에 하루평균 73분(2023년 6월 기준)을 사용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712만명 근로자의 이동통신 자료를 분석한 이 조사는 지역별로 통근시간에 큰 차이가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서울·경기·인천을 포괄하는 수도권은 83분으로, 통근시간이 가장 길다. 반면 강원권 직장인은 52분이 통근에 소요돼 광역권 중에서는 가장 짧은 것으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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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왜 그렇게 많은 시간을 길에 버리는 것일까? 아마도 급여 수준이 높고 기회가 많은 시내에서 일하는 동시에 집이 넓고 세금은 낮은 시외에서 살고 싶은 욕망 때문일 것이다. 한마디로 사회가 먼 통근거리를 조장하는 셈이다.

이상하게도 퇴출당해야 마땅한 부당한 사업 관행은 계속 유지되고 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행동경제학자 사비에르가벡스Xavier-Xavier Gabaix와 데이비드 레입슨David Laibson은 그 이유를 알고 있다. 그들은 홈페이지에 전화사용료와 주차요금을 명시하는 호텔(호텔 A)은 숙박료를 약간 더 싸게 하는 대신 과도한 부가비용을 숨기는 호텔(호텔 B)보다 경쟁에 불리하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노련한 소비자는 호텔 B에서 저렴한 숙박료의 혜택을 누리면서도 부가비용은 피한다. 물론 숨겨진 전화사용료와 미니바 이용료가 과도하다는 사실을 모르는 둔한 소비자 역시 호텔 B를 이용한다. 이에 따라 이 호텔은 둔한 소비자가 늘려준 수익에 의존해 저렴한 숙박료를 유지한다. 당연한 얘기지만 그 혜택은 노련한 소비자에게 돌아간다. 둔한 소비자가 호텔전화와 미니바를 이용한 덕분에 노련한 소비자가 저렴한 숙박료를 지불할 수 있는 것이다.

반대로 부가비용을 투명하게 공개하는 호텔 A는 숙박료 이외의 수입을 많이 올리지 못해 호텔 B만큼 숙박료를 낮추기 힘들다. 결국 노련한 소비자는 호텔 A를 외면하고 둔한 소비자가 숙박료 할인분을 대주는 호텔 B를 찾게 된다. 둔한 소비자는 과도한 부가비용 때문에 결과적으로 호텔 A보다 많은 숙박비용을 지불하게 된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

보유효과만약 두 부부가 갓 입양한 건강한 여자 아이를 안고 있다가 입양기관의 실수로 아이가 바뀌었다는 말을 들었다고 가정해보자. 아마도 두 부부는 가능하다면 아이보다 입양서류를 바꾸는 쪽을 선택할 것이다.

한 조사 결과에 따르면 사람들이 과거보다 패스트푸드를 더 많이 먹고 군것질도 늘었다고 한다. 커틀러와 그의 동료들은 그 이유가 기술 발달로 요리와 주방 청소에 들어가는 시간이 줄었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예전에는 감자튀김을 먹으려면 감자를 썰고 양념하고 튀긴 다음 주위에 튄 기름을 닦아내야 했다. 이것은 차라리 먹지 않는 것이 나을만큼 번거로운 과정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냉동 포장된 감자튀김을 전자레인지에 데우거나 아예 퇴근길에 패스트푸드 매장에 들러서 살 수 있다. 그러니 1970년대 말 이후로 감자 소비가 30퍼센트 이상 늘어난 것도 그리 놀랄 일은 아니다.

이처럼 요리에 드는 시간과 노동이 줄어들면서 먹는 비용도 감소했다. 과거처럼 집에서 케이크를 만들어 먹던 시절에는 오래 둘 수가 없어서 쉽게 먹을 수 없었지만, 지금은 신선하게 밀봉된 케이크를 찬장에서 꺼내 바로 먹을 수 있다.이러한 환경이 비만이 만연하게 된 원인이다. 식품 기술 발달은 먹는 데 들어가는 화폐비용과 시간비용을 확실히 줄여주었다. 이는 기업이 소비자의 요구에 부응해 기술 개발에 힘쓴 결과다. 시장의 힘은 비만을 만연하게 만든 주된 요인이다. 식품 산업이 저렴한 고칼로리 식품을 제조하는 보다 효율적인 공정을 개발하고, 먹는 데 드는 시간과 비용을 줄이도록 저장과 포장 방식을 발전시키면서 비만은 하나의 사회적 현상이 되었다.

욕망이냐 법이냐?

기원전 406년에 일어난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아테네 장군들이 승리했다. 고국으로 돌아가다 끔찍한 폭풍을 만난 아테네 장군들은 그리스 법에 따라 조국에 묻어주기 위해 함께 싣고 가던 전사들의 시체를 어쩔 수 없이 바다에 던져야 했다. 배가 가벼워진 덕분에 장군들은 폭풍을 이겨낼 수 있었지만 아테네에 도착한 그들은 재판을 받고 신성모독 죄로 처벌을 받았다. 왜냐하면 전쟁에서 전사한 영웅들을 매장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아테네군은 도시 국가의 법에 따라 참수형에 처해졌다.  소크라테스만이 장군들의 처형에 반대했다. 그는 장군들이 전사자들을 희생해서 함대를 구하느냐 아니면 함대를 버리고 전사자들과 함께 난파되느냐 사이에서 하나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음을 강조했다. 두 가지 기로에서 그들은 어쩔 수 없이 매장법을 어기는 죄를 선택했다.자기 자신에 대해 떳떳하다는 인식에 기반한 인간 존재의 윤리에 동의한 것이었다. 즉 장군들은 범죄에 대한 욕망 때문이 아니라 공익을 위해서 범죄를 저질렀기 때문에 그들의 죄는 용서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여기서 우리가 욕망에 관해서 하나의 논쟁점을 생각할 수 있다. 시체를 바다에 던진 것은 국가의 명령을 위반할 욕망으로 한 행동이 아니다. 장군들이 살아남음으로서 장차 국가의 다른 재난에서 힘을 보탤 수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국가의 법을 준수하는 것은 대타자의 욕망을 실현하는 것이다. 반면 장군들이 살아 남는 것은 장군들 주체의 욕망이다. 이처럼 대타자 욕망과 주체의 욕망이 갈등 할 때 주체는 분리 되고 분리를 겪음으로써 주체는 태어난다. 욕망과 욕망이 교차되는 사거리에서 욕망의 경제학이 등장한다. 그래서 욕망의 경제는 다소간은 이기적일 수 밖에 없다. 

안티고네가 크레온 왕의 명령을 어기고 죽은 오빠의 시신을 묻어 준 것도 욕망의 경제 편린을 보여 준다. 왕의 명령 보다 가족이라는, 인간 사회의 근본이 되는 존재의 윤리를 지키려는 의도인 것이다. 어느 것이 비용 편익 면에서 이익인가. 역사에도 욕망의 경제학은 드러나고 있다. 

은행 화폐가 나오기 전까지 유통되던 화폐는 자기 자신의 가치만을 보장하는 상품이었다. 다른 모든상품처럼 금화도 단지 그것의 현실적 가치만큼 가치가 있었다. 즉, 금화한 닢은 금화한 닢 분량의 금만큼의 값어치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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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오늘날의 화폐는 그 자체로는 아주 미미한 값 밖에 나가지 않는 종잇장일 뿐인데 상품을 구입할 때는 엄청난 가치가 부여된다. 본래는 아무 가치도 없던 종잇장이 고가의 지폐로 변한 것이다. 예를 들어 5만원짜리 지폐는 그 자체로는 아무 가치가 없는 한갓 인쇄된 종잇장에 불과한데 실제로는 5만원 값어치의 물건을 사는 데 쓰인다. 이건 순전히 상상적 가치이지, 그 화폐의 실질적 가치와는 아무 상관이 없다.

브라이언 로트에 의하면 '상상적 화폐'라는 매개항이 필요하게 된 것은 금 화폐의 물리적 가치 하락 때문이었다(Brian Rorman, SignifyingNothing.1987).금화가 한참 유통되다 보면 좋은 화폐와 나쁜 화폐가 생겨나게 마련이다. 새로 주조된 순수하고 때 묻지 않은 금화는 좋은 화폐이고 닳아서 마모된 금화는 나쁜 화폐다. 그 사이에는 필연적으로 간극이 생기게 된다. 금화 자체의 가치에 따라 화폐의 값이 정해졌으므로 닳아서 낡게 된 금화는 당연히 화폐 가치가 떨어지게 마련이다. 화폐 자체의 값과는 상관없이 인위적으로 정해진 가치에 따라 물건의 매매에 사용할 수 있는 화폐가 있으면 좋겠다고 사람들은 생각하게 되었을 것이다.

상업 국가들에서 이른바 '은행 화폐(은행권)'라고 하는 새로운 형태의 화폐가 출현한 것은 바로 이런 필요 때문이었다. 그것은 정확히 중앙은행이나 조폐국의 기준에 따르는, 즉 사용에 의해 가치가 저하되지 않는 화폐였다. 하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그 화폐는 체화(體化)되지 않았으며, 오로지 상상의 참조점으로서만 존재하게 되었다. 정확히 말하면 그것은 은행과 개인 사이에서의 약정으로서만 존재했다. 즉, 어떤 특정의 상인이 이 종잇장을 은행에 제시하면 은행은 그에게 일정한 금화를 지불하겠다고 약속하는 종이로서 존재했다. 이런 방식으로 상인은 은행으로부터 화폐의 실재적 가치를 보장받았다.

이제 화폐는 하나의 상품이 되어 좋은 화폐, 나쁜 화폐로 나뉘었다. 종이 화폐는 좋은 화폐이지만 단지 상상적인 화폐일 뿐이고, 금화는 마모되어 나쁜 화폐이지만 경험적으로 존재하는, 다시 말해 우리의 눈과 손이 구체적으로 지각할 수 있는 화폐였다. 종이 화폐를 기준으로하여 금화의 가격도 측정할 수 있게 되었다.

상상적 화폐는 처음에는 특정 수취인의 서명에만 직증(直證)하는 방식이었다. 즉, 은행이 발행한 종이에 이름이 적혀 있는 개별 상인에게만 은행이 금화를 주겠다고 보증하는 금융적 약속이었다. 그러나 차츰 이 직증적 약속은 비인격화되어 누구라도 화폐를 들고 오는 사람이 있으면 그에게 지폐에 적힌 액수의 금등가물을 지불하겠다는 방식으로 바뀌었다. 구체적인 날짜와 이름이 적힌 특정의 지참자가 익명의지참자로 바뀐 것이다. 이렇게 해서 화폐와 개인을 직결시켰던 연결고리가 끊기게 되었다.

익명의 지참자는 철학 용어로 주체와 꼭 닮았다. 화폐의 경우에도 익명의 지참자는 중립적 보편적 기능만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아무나 화폐를 들고 갔다고 해서 은행이 아무 말없이 금을 내주지는 않았을 것이다. 현대 사회에서도 고액의 자기앞수표를 은행에 들고가기만 하면 은행이 지참자에게 즉각 돈을 바꿔 주지 않는다. 추상적이고 보편적인 익명성의 원리로 만들어진 화폐이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라캉 철학에서의 주체도 마찬가지다. 만약 주체가 자신의 정체성을획득하려 한다면 그의 보편성은 현실적 실존으로 가득 채워져야 한다. 다시 말하면 비어 있는 보편성 안에 자신의 경험적 특징들을 우연적 변수로 채워 넣어야만 한다. 이렇게 해서 그의 특수한 인격이라는 실증적 내용이 구성된다. 라캉에 의하면 'S(주체)'가 빗금 쳐진 '$'로 변환되는 순간이다. 이때 빗금을 쳤다는 것은 자신의 파토스적 특수성, 자기 존재의 중핵을 희생했다는 의미다. 자기 존재는 정당하고 당당하다고 나름 생각하고 있는데, 은행원은 그건 아무것도 아니고 주민등록증과 인감증명만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주체도 마찬가지다. 온갖 감정과 진지함으로 나의 존재는 충만해 있는데 사람들은 그건 아무것도 아니고 나의 학벌과 부모의 직업만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나는 아무것도되돌려받지 못하면서 '$'로서, 즉 자기와의 관계가 텅 비어 있는지점으로서의 나 자신을 얻는다. 그 대가로 내가 타자로부터 얻은 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이것이 라캉의 빗금 쳐진 주체($)다. 이 텅 빈 코기토가 새로 얻은 실증적, 경험적 내용은 우연적이고 자신과는 궁극적으로 아무상관이 없다.

라캉은 인정받고자 하는 욕망(le désir d'être reconnu) 만이 일반적으로 중요한 유일한 욕망이라고 결론을 내리는데 이는 물질적 욕망 보다 정신적 욕망에 손을 들어 주는 듯 보인다. 결국 경제라는 것도 사실은 물질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

역사적으로 종이 화폐란 어떤 것을 아무것도 아닌 것과 교환했을 때 출현했다. 즉, 금이라는 아주 귀한 금속을 종이라는 아무것도 아닌 것과 교환했을 때 종이 화폐가 생겨난 것이다. 라캉의 주체도 어떤 것을 아무것도 아닌 것과 교환할 때 출현한다. 자신의 핵심적인 요소를 희생시키고 아무것도 아닌 것을 얻은 것이다.

그런데 현대는 종이 화폐를 넘어서고 크레딧 카드도 서서히 지나 스마트폰으로 결제하거나 컴퓨터 클릭 한 번으로 결제하는 시대가 되었다. 그럼 ‘나’라는 주체는 어떤 것을 주고 무엇을 받았는가? '아무것도 아닌 것조차 받지 못한 것 아닌가.

영화

영화라는 실천은 인식하려는 열정, 즉 보고자 하는 욕망(시각적 충동, 절시증, 관음증)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물론 기원 충동(invocatory drive)도 존재한다. 이 두 가지 성 충동은 결여에 더 의존한다는 점에서 다른 충동들과 구별된다. 순수하게 유기적인 본능이나 필요는 만족될 수가 있다. 이를테면 허기는 음식에 의해서만 만족될 수 있지만, 그러나 음식이 이를 만족시킨다는 점은 확실하다. 성충동은, 그 대상이 획득되어지고 난 때에도, 어느 정도는 불만족한 상태로 남아있다. 욕망은 아주 빠르게 다시 생겨난다. 욕망은 자체의 리듬을 갖고 있어서, 획득된 쾌락의 리듬과는 종종 전혀 별개이다. 결여란 욕망이 채우고자 소망하는 것이면서 동시에 욕망으로서 살아남기 위해 항상 조심스럽게 틈새를 남겨두는 것이기도 하다. 결국 욕망에게는 실질적인 대상은 아마 없을 것이다. (비록 수많은, 상호교환이 가능한 대체물은 있을런지 몰라도.) 욕망은 상상적 대상, 항상 잃어버렸지만 항상 그대로 욕망되어지는 대상을 추구한다.

이제, 우리가 영화를 볼 때 어떤 일이 생기는가라는 문제로 전환해 보자. 영화 관전에 대한 복잡한 정신분석학적 이론이 있다. 메츠를 비롯한 여러 이론가들은 우리의 영화 경험의 토대가 되는 무의식적 구조를 논하면서, 어떻게 해서 영화에서 현실에 대한 강력한 인상이 무엇보다도 먼저 환영이 되는지를 주목한다. 이들은 또한 영화와 꿈의 유사점과 차이점을 탐구한다. 라깡의 작업에 대개 기반을 둔 정신분석학적 영화 이론은 욕망의 순환이라는 차원에서 영화관람을 논한다. 그 어떤 다른 형식보다도 영화에게는 꿈과 무의식의 구조와 논리를 재생산해내는 능력이 더 많다.

브런치 글 이미지 4

크리스찬 메츠는 허구 영화와 꿈 사이에는 일단의 차이점과 약간의 닮은 점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는 이런 것들이 꿈과 생시의 차이에서 생긴다고 주장한다. 그 주요한 차이는 이렇다. 꿈꾼 자는 자신이 꿈꾸고 있음을 알지 못하지만, 영화 관객은 자신이 극장에 있음을 안다.

또 다른 차이점은, 허구 영화는 현실적인 인식이며 여기에는 현실적인 이미지가 있지만, 꿈은 심리장치 내에서 생긴다는 것이다. 영화는 실지로는 환각이 아니며, 이것은 주체가 자신이 좋아하는대로 만들 수 없는 진정한 인식에 준한다. 그러나 꿈은 소망에 반응한다. 다시 말해, 꿈 상태는 쾌락 원칙에 보다 강력하게 속박되는 반면, 영화적 상태는 그보다 더 현실 원칙에 기반을 둔다. 영화적 상황에는 특정 요소의 동작 금지가 따르는데, 이런 면에서 이것은 일종의 소규모 잠, 깨어있는 잠이다. 관객은 상대적으로 부동적이다. 관객은 어둠 속에 내던져진 채 일종의 졸음상태에 있는 것이다.

허구 영화는 일반적으로 꿈보다는 훨씬 더 '논리적이며', '구성적이다'. 영화 서사에서 우리가 우리 자신의 영화를 기억할 때 보통 경험하는 실질적인 부조리의 인상을 갖게 되는 일은 거의 생기지 않는다. (메츠는 만일 명백한 꿈내용이 화면에 옮겨진다면, 그것은 알아먹을 수 없는 영화가 될 것이라고 지적한다.) 꿈에서는 놀랄만한 일이 놀라지 않으며, 따라서 부조리한 것은 없다.

고찰이 필요한 '또다른 차이점은 스토리이다. 영화 스토리는 말해진 스토리이다. 여기에는 서술의 행동이 있다. 그러나 꿈-스토리는 서술의 행위가 없다. 이것은 연원이 없는 스토리이며, 그 누구도 아무에게 말하지 않는다.

메츠는 관객이 믿음을 수용할 능력을 갖고 있으며, 이런 영화에 대한 믿음은 부인이라는 기본 과정을 포함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부인의 과정은 외적 현실을 다루는 데 있어 최우선적인 방어 메커니즘 이다. 가령, 어떤 사람이 한날 한시에 두 개의 상반된 지위를 갖고 있을 수 있다. 그는 부인하면서 동시에 승인할 수 있는 것이다.) 신용하지 않는 관객 (화면에서 발생하는 사건들이 허구임을 알고 있는 자) 뒤에는 신용하는 관객(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사건들이 사실이라고 믿는 자)이 있다. 즉 관객들은 영화적 환영을 유지하기 위해 자신들이 알고 있는 바를 부인한다.) 영화관람 상황의 전체 효과는 지식과 믿음의 지속적인 진퇴에 의해 결정된다. 이같은 균열이 관객의 의식이다. 어떤 의미에서 관객은 이중관객으로, 그의 자아 분할은 의식과 무의식의 분할과 같다. 그러므로 영화적 허구에 대한 아주 기본적인 수준의 믿음에서도 무의식적 욕망과 흡사한 어떤 일이 작용하는 것이다.

영화 이론은 관람자를 개별 인간으로가 아닌, 영화적 장치에 의해 생산되고 활성화된 인공 구조물로 간주한다는 사실을 알아두는 것이 중요하다. 관객은 '생산적'(꿈작업에서의 생산과 같이)이면서도 '비어있는(그누구도 점유할 수 있다) '공간'으로서 개념화된다. 어느 면에서 영화는 '허구-효과'라고 불리우는 것을 통해서 그 관객을 구성시킨다. 영화 관람을 꿈꾸기와 유사하게 만드는 어떤 조건들도 있다. 즉 우리는 어두운 방에 있으며, 우리의 시각적 인식은 신체적 움직임이 없다는 데 대한 보상으로 고양되어진다. 이 때문에 영화 관객은 꿈꾼자의 조건과 같은 '믿음의 정부'(regime of belief ; 모든 것이 사실처럼 받아들여지는 장소)로 들어가는 것이다.

메츠는 영화적 허구가 관객에 대한 그 매력적인 위력을 생산해 내고 또 유지하기 위해서는 화면의 이미지가 마치 관객 자신의 욕망의 표현인듯 보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메츠는 모든 영화제작자들이 연속된 이미지들을 선택하고 그 이미지 흐름을 조직하는 등등의 과정에 주목한다. 그는 고전적인 서사 영화를 구별 지어주는 것은 이같은 선택하고 배열하는 쇼트 작업에 찍어두는 이들 언표작용의 표식의 소거 또는 은폐라고 주장한다. 다시 말하면, 제작의 작업은 숨어있다. 언표작용의 근거가 은폐되어있는 것이다. 이것이 헐리우드 영화의 그 유명한 '보이지 않는 편집'(invisible editing)이다.

영화 제작에는 카메라가 한 번의 쇼트에서 180도 이상을 담아서는 안된다고 하는 관례가 있다. 이 '규칙'은 카메라는 이것이 점하는 원의 절반을 보여주지 않음을 뜻한다. 이런 실천은 카메라는 가능하면 그 스스로의 존재를 부정해야 한다는 명령으로부터 나온 것이다. 카메라의 목적은 보여지는 것은 그 어떤 기술상의 간섭과도, 또 그 어떤 위압적인 응시와도 별개로 자율적인 실존을 갖는다고 하는 환영을 불러 일으키는 것이다.

쇼트/쇼트 형성은 영화적 환영을 손상시키지 않게 하려는 하나의 계산된 방법이다. 쇼트 1 이 장면을 보여주면 쇼트 2는 관객을 같은 원 영역의 반대쪽 180도에 위치시키는데, 그리하여 앞선 쇼트는 그 영화사에 나오는 인물의 눈을 통해서 보여졌음을 의미하게 된다. (물론 때로는 이 과정이 뒤바뀌기도 한다.) 쇼트 2에서 보고 있는 허구적 등장인물은 쇼트1이 시각적으로 그 등장 인물에 '속하는' 그 환영을 유지시키기에 충분함을 대개 증명해 준다. 그 결과 언표작용의 수준은 관람 주체의 면밀한 관찰로부터 여전히 베일에 가려진 채 있게 된다. 우리의 시선을 관리하는 그 응시는 카메라의 것이 아닌 허구적 등장 인물의 것인 듯 보이는 것이다

쇼트/쇼트 형성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한 이유는 이것이 영화가 주체의 역사를 되풀이해서 나타내주는 작용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봉합 이론에 의하면 관람자는 쇼트 1을 그 어떤 응시에 의해서도 속박되지 않은, 그리고 차이에 의해서도 눈에 띄지 않는, 상상계적 충만으로 경험한다. 그러므로 이것은 아이가 반사거울에서 발견해 낸 이상적 이미지로부터 자신의 분리를 발견하기에 앞서서 그 거울 단계의 희열과 닮은 희열의 위치인 것이다.

그러나 거의 즉각적으로, 관람하는 주체는 자신이 바라보는 것의 한계를 깨닫게 된다. 즉 부재 영역을 깨닫는다는 것이다. 이 지점에서 쇼트 1은 그 부재 영역의 기표가 되며, 희열은 불쾌로 바뀌게 된다. 불쾌의 그 순간에 관람하는 주체는 여기에 뭔가가 결여되어 있음을 인식한다. 관람자는 카메라가 사실들을 숨기고 있음을 깨닫고, 그리하여 카메라를 불신하게 된다. 그 주체는 자신이 보는 일을 방해받고 있음을 느낀다. 그는 자신이, 귀신같은 혹은 부재한 또다른 관객의 응시의 축에 존재하고 있는 바를 보도록 권한을 부여받을 뿐임을 깨닫는다. '부재한 자' 또는 '타자'라고 불리우는 이 관객은 잠재력, 지식, 자만, 초월적 시선 그리고 담론 권력 등과 같은, 상징적 아버지가 가진 모든 속성들을 갖고 있다. 물론 이것은 영화 텍스트의 말하는 주체이다.

이 말하는 주체는 관람하는 주체가 자신이 결여하고 있다고 느끼는 모든 것을 가지고 있다. 이같은 결핍감은 그 주체에게 더 많은 것을 보고자 하는 욕망을 고취시킨다. 다른 한편, 말하는 주체의 존재가 관람자로부터 은폐되어야 한다는 것도 마찬가지로 중요하다. 고전적인 영화는 관람하는 주체로부터 말하는 주체의 지위의 소극성을 어떻게 해서든 감추어야 하는데, 이것은 그 허구 외부에 어떤 현실이 있다는 사실의 부정을 필요로 한다.

영화에서 욕망을 드러내는 물신주의가 있다 이 물신주의의 메커니즘은 남성 주체에게, 자신의 정체성에 쐐기를 박고 있는 그 여성이 아무것도 결여하고 있지 않다고, 그녀는 전혀 거세되지 않았다고 안심시켜 주는 기능을 한다. 헐리우드의 노래와 춤이 곁들여진 상영물이 하나의 예이며, 아마도 스타 시스템 그 자체일 것이다. 반복하자면, 여성 신체의 결여에 의해 야기된 공포를 무마시키는 데에는 두 가지 전략이 있다. 그 중 첫째가 여성 주체 자신의 죄나 병을 설정하는 것이며, 둘째는 여성을 물신화시켜 그녀에게 성애적인 과잉투자를 부여하는 것이다.

저명한 비평가, 로라 멀비에 의하면 페미니스트 영화 비평가는 배타적으로 '남성적' 시선이라고 이론화시켜 왔던 것에, 그리고 있을 법한 '여성적' 시선이 어떤 것인지를 논하는 데 관심을 두게 되었다. 이론이 주로 중심적인 '남성적' 장르-서부 영화, 갱 영화, 모험 영화 그리고 전쟁 영화에 적용되었음이 곧 밝혀졌다. 최근의 여성 학자들은 특이하게도 여성 관객에게 말을 거는 어떤 영화 장르,멜로 드라마로 방향을 틀었는데, 이 장르와 여성 관람객에 대한 논점들은 지금도 활발하게 논의되고 있다.

자본주의 상품 논리

자본주의의 상품논리에는 대중의 무의식과 욕구(needs). 욕망(desire)을, 다시 '욕망의 경제'라는 테두리 안에 적극 수용해서 경제적으로 이용하려는 고도의 상품 전략이 자리하고 있다. 비판철학자인 레비나스는 이성과 (하이데거적 의미에서) 존재의 관점에서 '욕구(le besoin)'와 '욕망(le desir)'을 구분한다. 그에 따르면 '욕구는 자기와 다른 것을 자기화, 동일화시키려 하지만 '욕망望)'은 자기가 자기를 지우고 남을 통하여 자기를 다시 보려는 인간심리의 원초적 성향을 가리킨다(김형효, 1993, 371면). 다시 말해 욕구는 타자를 지향하되 타자가 자기와 같아지기(자기 동일화)를 추구한다. 그리하여 배고픈 자는 음식만을 의식이 지향하고, 음식을 먹고 싶은 필요에 모든 것을 종속시킨다. 그리고 마침내는 음식을 자기속에 넣어 완전히 소화시킨다. 이렇게 언제나 자기 존재의 통일성을 위하여 다른 것을 같은 것 내부로 끌어들여 용해시켜 버리는 욕구는 서양 지성사를 이끌어온 자아학'의 근본이 된다고 레비나스는 보았다. 그러나 욕망은 이런 욕구와는 다르다. 욕망은 욕구처럼 맛을 지향하기는 하되, 타자를 결코 자신 속으로 용해시킬 수 없다고 본다. 이는 여. 남의 성행위에서 앞서 말한 음식 먹기와는 다르게 이성으로서의 타인이 결코 남에게 동화되지 않음과 같다. 욕망은 말할 줄 모르면서 말하려 하는 아기에서 잘 드러나듯이 근원적으로 타자(타인)를 지향하는 운동이지만 타인이 결코 나의 '자아(ego)'로 환원될 수 없는 타인임을 분명히 하고 오히려 자기소멸을 주장한다(김형효, 1993, 148~150면). 간단히 말해 욕망은 자아와 타자의 다름을 분명히 인정하고 더 나아가 남이 나와 같아지기가 불가능하다고 보는 것이다. 물론 맑스(Karl Marx, 1818~1883)는 다른 맥락에서 욕망을 생산 발전에 의해 변화되고 창조되며, 또한 역사를 움직이는 주관적 동인으로 이해하였다. 이러한 자본주의적 전략에는 성 자유 풍조에 편승하는 개방주의가 만연된 사회에서 성과 사랑, 육체조차 권력과 자본의 재물로 만드는 사회 구조에서 그 연유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하면 육체는 나르시즘적 육체 향락과 대중매체의 문화산업화와 공모하여 자본주의적 상품미학으로 퇴락하였다.

자본주의의 물질적 관계에 관심을 기울이며 『상품미학 비판』을 쓴 볼프강 하우크에 따르면, 상품미학은 끊임없는 욕구의 가공 과정으로 작용한다(상품미학과 문화이론』, 1995, 45면). 그는 이 책에서 자본주의의 문화적 현상에 대한 포괄적 이해를 시도하였다. 특히 그는 자본주의 대중문화의 주요 분석틀인 상품미학을 이데올로기, 문화와 연관지어 살펴봄으로써 새로운 대안문화 형성의 단서를 찾아내고자 하였다(같은 책, 19면). 그에 따르면 자본주의의 속성은 감성의 정형화를 통한 인간의 본능 속에 담긴 욕구 • 욕망을 극대화시키며 이를 다시 자본의 전략으로 묶는다. 또한 상품미학은 기존의 이데올로기적 권력과 야합하여 위계적인 사회 관계의 허위적인 가상을 만들어 냄으로써, 다시 말해 권력의 담론, 가치 체계를 무차별적으로 차용하여 기호화함으로써, 인간의 욕구 및 욕망, 정체성 과정을 장악하여 소비를 확대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데카르트는 '사유하는 주체’를 강변한 반면, 라캉은 '욕망하는 주체'를 선언하지 않았던가.

나아가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양대 거봉인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는 자본주의 체제 속에서 문화 자체도 보편화된 원칙에 따라 생산·분배 · 판매 · 수용됨에 따라 결국 개인의 의식을 마비시키는 문화산업으로 전락했음을 경고하였다. 이들은 『문화산업론』을 통해 사회현실을 단순히 복제하는 대중매체의 오락적 기능으로 전락한 대중문화의 이데올로기를 파헤치며, 문화 소비자를 반주체적 존재로 이끄는 '관리된 사회의 위험이 범람하고 있음을 천명하였다. 이윤의 극대화를 전제로 하는 현대의 고도자본주의 상품사회에서 획일적인 그리고 지배 이데올로기의 시녀로 떨어진 문화 생산이 문화 수용자 대중의 비판적 의식을 마비시키는 이러한 성격이 성행됨을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다. 이러한 반계몽적 위험수위에 대한 경고는 문명 비판과 함께 문화산업에 대한 전방위적 비판에 맞닿으며, 현대성에 대한 총체적 성찰로 이어지고 있다.

(사랑과 욕망의 시학으로서의 에로티시즘, 박정희, 기호학으로 세상읽기, 2002)

문학 작품, 스탕달의 「적과 흑」의 경우

「적과 흑」(Le Rouge et le Noir)의 서두에는 마을의 읍장과 그 부인이 베리에르(Verrières) 마을에서 산책하는 장면이 나온다. 레날 씨는 축대 사이를 걸으면서 엄숙한 표정을 짓고 있지만 고민하고 있다. 그는 쥘리앵 소렐을 자기 두 아들의 가정교사로 만들고 싶은 욕망을 품고 있다. 하지만 그것은 자식들에 대한 염려 때문도 아니고 지식에 대한 사랑 때문도 아니다. 두 부부 사이의 대화가 그 욕망의 메커니즘을 곧 우리에게 드러내준다. 

 -발르노 씨에게는 그의 아이들을 위한 가정교사가 없소.

 -그는 우리에게서 쥘리앵을 빼앗아갈 수도 있을 거예요. 

발르노(Valenod)는 레날 씨 다음으로 베리에르에서 가장 부자이고 가장 영향력 있는 사람이다. 그래서 베리에르의 읍장은 소렐 영감과 함께 협상을 진행하는 동안 그의 눈앞에 떠오르는 그의 경쟁자의 모습을 내내 보고 있다. 그는 소렐 영감에게 매우 유리한 제안들을 하지만, 꾀많은 농부 소렐 영감은 기발한 답변을 생각해낸다. “우리는 다른 데서 더 나은 자리를 찾을 수도 있는데요." 그러자 레날 씨는 발르노가 쥘리앵을 고용하려 한다고 확신하게 되었고, 그리하여 그의 욕망은 두 배로 증가하게 된다. 구매자가 지불할 마음이 있는 것보다 더 비싼 가격은, 그가 자신의 경쟁자에게 있다고 상상하는 욕망에 의해 매겨진다. 그러니까 이 상상적인 욕망의 모방현상이 일어난 것이다. 더구나 모방 중에서도 빈틈없이 꼼꼼한 모방이다. 왜냐하면 복사된 욕망에서 모든 것은, 심지어 그 열성의 정도까지도, 모델로 간주된 욕망에 따라 결정되기 때문이다.

속물은 자신의 개인적인 판단을 감히 믿지 못하고, 다른 사람이 욕망하는 대상들만 욕망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유행의 노예인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일상용어의 하나인 속물근성이라는 단어를 만나게 되었는데, 이 단어는 삼각형의 욕망의 진실과 어긋나지 않는다.속물근성의 모방적 성격을 강조하기 위해서는 속물의 욕망을 다루는 것으로 충분하다. 중개자는 더 이상 감춰지지 않는다. 욕망의 대상은, 속물근성이 예를 들어 질투처럼 욕망의 어떤 특정한 범주를 목표로 삼지 않는다는 사실 때문에 뒷전으로 물러난다. 사람들은 미학적인 쾌락, 지적인 생활, 의복, 음식 등등 어떤 범주에서도 속물이 될 수 있다. 사랑에 있어서 속물이 된다는 것은 질투에 헌신하는 것이다.

쥘 드 고티에는 속물근성인' 의기양양한 보바리즘' 외에도 '유치한 보바리즘'을 찾아내서, 이 두 가지 보바리즘을 매우 비슷하게 묘사한다. 속물근성이란 "자기의 진정한 존재가 의식의 영역에 나타나지 못하게 하고, 자신으로 인정하고 싶은 더욱 잘생긴 인물이 끊임없이 거기 나타나게 하기 위해, 그 사람에 의해서 사용된 방법들의 집합”이다. 어린애로 말하자면, "자기 아닌 다른 사람을 자기라고 생각하느라고, 자신에게 매혹적인 모델의 자질과 능력을 자기 것인 체하는 것"이 어린애이다. 유치한 보바리즘은, 베르마의 에피소드가 조금 전에 보여준 바와 같이, 프루스트의 욕망의 메커니즘을 정확하게 재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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