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번 동력을 잃은 나는 쉽게 일어서지 못했다
아니 어쩌면 집이 좀 살던 여자친구에게 무언가를 바라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여자친구 아버지 사업이 망해 가정이 급격히 기울어져 간다는 것도 간접적으로 알고 있었으면서도 말이다
친한 친구로부터 지방에 일자리를 소개받았다
고향과 1시간 정도 떨어진 곳이었는데 타 도시에서 살아본 적 없어 고민이 되었지만
달리 선택지는 없었다
처지를 아는 친구가 며칠 뒤 차로 짐을 옮겨주었다
그리고 새로 일할 곳 사장님한테도 부탁하여 새롭게 지낼 달방 한 달치 도움까지 받았고
주방 이모도 멀리서 와 고생한다며 늘 따뜻한 밥을 지어 주셔 끼니걱정도 한동안 없었다
세상 어떤 직업도 안 힘든 일이 없겠지만 야간에 술 취한 사람 상대로 일하는 직업은
체력적으로도 힘에 부쳤지만 간혹 모욕적인 언사나 행동을 하는 사람에게 받는 마음의 상처는
너무나도 크게 다가왔다
게다가 향수병까지 겹쳐 더 고되었지만 먼 곳 같이 따라와서 일하던 여자친구가 있어 든든했다
일도 손에 익숙해지니 쉬는 날 시내 나가 놀만큼 여유가 생겼고
자주 오는 단골손님과도 살갑게 인사를 나눌 수 있을 만큼 성격도 많이 좋아졌다
또 동네 구석구석 모르는 곳도 없을 정도로 잘 적응했는데 대기업도 하루아침에 없어지는 세상에서
가건물로 지은 음식점이 버틸 재간이 있으랴,
주인이 한 번 바뀌고 월급이 일주일 다음엔 한두 달씩 밀리기 시작하자 다시 고향으로 내려올 수밖에 없었다
1년간 타지 생활하고 남은 건 원룸 최소 보증금 걸 수 있는 백만 원이 전부였고
그마저도 떼일뻔한 걸 죽자 살자 받아낸 용기가 조금 생긴 건 덤이라고 해야 하나?
다시 또 나태해졌다
하지만 내가 일하지 않으면 당장 쉴 수 있는 공간이 없어지는 걸 몸소 체험해서 알았기 때문에
마냥 놀진 않았지만 그저 하루하루 어떻게 버티나 생각뿐인 나에게
미래는 없었다
일하는 시간보다 노는 시간이 다시 또 많아질 때쯤,
여자친구 어머니가 나름의 인맥을 동원해 부산 모 중공업에 내 이력서를 반강제로 내주셨고
어렵지 않게 통과해 곧바로 인턴 기간이 시작된다는 소식을 전해주셨다
지금은 망하고 없지만 당시에는 돈을 써도 쉽게 들어갈 수 있는 곳이 아니란 걸 학교 다닐 때부터 알아
신기하고 뿌듯했지만 딱히 가고 싶은 생각은 안 들었고 별로 고민할 것도 없이
결국 가지 않았다
공장일을 안 해본 건 아니었지만 오히려 경험해서 더욱더 내 길이 아니란 걸 알아서일까?
평생을 공장만 하신 여자친구 어머니와 그 모습을 보고 자란 여자친구가
내가 안 간다고 했을 때 무슨 심정이었을지 상상도 안 가지만 당시 나는 여전히 철이 없었다
아마 이즈음부터 여자친구도 나를 포기한 것 같다
새로 다닌 직장이 바빠졌다며 연락 횟수가 점점 줄어들었고 만나주는 시간도 별로 없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휴대폰이 하루 꺼졌던 날, 다른 남자가 생긴 걸 알게 되었고
곧바로 4년간의 만남을 정리하자며 이별을 고하더라
사실 잘 생각해 보면 몇 번의 시그널을 보낸 건지도 모르겠다
나도 직감으로는 알았지만 모른 척하고 싶었을지도 모르고 말이다
이별 통보를 받고 일주일 만에 체중이 10킬로나 빠졌다
그리고 매일매일을 답장 없는 메시지와 이메일을 보냈다
전화는 진작에 수신 거부 처리 되어 목소리 들은 지도 얼마나 지났는지 모르던 어느 날,
평소 자주 가던 술집으로 나오란 연락이 왔다
드디어 그녀와 다시 재회할 수 있단 생각에 하루 종일 미소가 끊이지 않았다
1초가 1분 같고, 일분이 한 시간 같은 시간이 지나고 오랜만에 다시 마주한 그녀는
예전과 같았지만 주변 공기는 달랐다
어색하게 안부인사를 주고받고 평소 자주 먹던 탕수육을 시켰다
이윽고 음식이 나오고 한참을 말없던 그녀에게 다시 만나주어 고맙단 말을 했다
하지만 돌아온 답은 다시 만나잔 얘기를 하러 온 게 아니며 기다리지 말라는 말을 하러 왔는데
여전히 변화된 모습 없는 나에게 끝까지 실망만 하게 되었다며 곧장 자리를 뜨려고 하더라
다른 사람이 보든말든 제발 나 좀 살려달라고 눈물로 매달렸다
얼마나 소리 내어 울었을까? 목청이 좀 컸는지 안면 있던 가게 사장님이 오셔서 달래주셨고
다시 진정하고 자리 앉은 나에게 그녀는 일을 하고 있냐 물었다
구직 중이라고 했더니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으로 일자리를 구하면 다시 만나서 얘기하잔 말에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계산하고 갈 테니 천천히 나오라며 먼저 가버린 그녀를 이번엔 붙잡지 못했고
혼자 남아 차갑게 식어버린 탕수육을 하나 씹으며 속으로 다짐했다
기필코 떳떳한 직장을 얻으리라,
집으로 오자마자 구직사이트를 뒤지기 시작했다
일단 수중에 돈이 없었기 때문에 차비가 안 들게 도보로 출퇴근이 가능해야 했다
선택지가 좁아지니 자취방 근처 백화점 판매사원 구인광고가 눈에 들어왔고
때마침 20살 때 아르바이트 경험도 있겠다 싶어 덜컥 이력서를 냈다
한 시간쯤 흘렀을까? 담당자가 전화와 당장 출근하란 말에 어안이 벙벙했지만
이것저것 잴 여유가 없었다
첫 출근을 했다
마음은 콩밭에 가있었지만 짤리면 안 된다는 생각으로 버텼다
아니 다시 여자친구를 만나야겠다는 마음 하나로 버틴 게 맞을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경험 있다고 며칠 일하다 보니 익숙해지기 시작했다
고객 응대는 어려웠지만 어쩔 수 없이 인사는 할 수밖에 없었고 상품 설명을 해야 했고 대화를 해야 했으며
그렇게 꼬리에 꼬리를 물다 보니 잘한다는 소리까지 듣게 되었다
표정은 어두워도 꼬박꼬박 출근 잘하는 20대 초반 청년을 월급 80만 원에 부리려는 가게 사장의 당근일지도 모르겠지만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하더라
긴장한 상태가 조금 풀어지니 배고픔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허나 다음 달 월급날까지 버티려면 하루 쓸 수 있는 돈은 2천 원에 불과했고
물가가 아무리 저렴했다 해도 라면 한 그릇도 2천 원은 넘던 시절에 내가 먹을 수 있는 건
여고 앞 분식집에서 파는 튀김과 오뎅 몇 개가 전부,
그래도 주말에는 백화점에서 공짜 간식을 줘서 버틸만했다
첫 월급을 받았다
당장 여자친구에게 전화를 걸고 싶었지만 며칠 전 자취방에 남겨둔 옷가지를 가져간 걸 보아
안 받을 것 같았다
탕수육을 하나 시켰다
혼자 먹는 거라 나눠 먹는 맛은 없었지만 담배꽁초가 꽂혀 있던 맛과 차갑게 식어버린 맛과는
확실히 다름을 알 수 있었다
한 달이 더 지났다
직장은 계속 다녔지만 집에 돌아오면 항상 그녀에 대한 그리움과 마음속 공허함이 남아 외로웠다
그치만 점차 익숙해져 갔다
어찌 보면 난 늘 혼자였으니까,
새로 구한 직장을 세 달쯤 다녔을 때, 여자친구와 자주 어울리던 친구 두 명이 집에 불쑥 찾아왔다
그리고 급히 나를 일으켜 데려간 곳은 간혹 4명이서 바람 쐬러 들렀던 바닷가 끝이었다
혹시나 여자친구가 숨어있나 기대했지만 없어도 괜찮았다
얼마 만에 외출이 꽤나 시원했고 마음속 응어리 하나가 바다 저 멀리 떠내려가는 걸 볼 수 있어서였다
며칠 뒤, 여자친구에게서 만나잔 연락이 왔다
기다리고 기다리던 전화에 날아갈 듯이 기쁠 것 같았는데 막상 감정의 변화는 별로 없더라
오히려 쉬는 날 귀찮게 만나자 해서 약간 짜증이 났으니깐,
약속 장소는 그녀가 새로 얻은 오피스텔이었다
알려준 호수에 다다라 초인종을 누르니 곧장 여자친구가 나왔고 들어오라는 손짓에
잠깐 멈칫했지만 아무렇지 않게 들어갔다
현관에 있던 남자 신발을 애써 못 본 척하고 말이다
탕수육 시킬까란 말에 금방 가야 된다며 옅은 미소를 보냈다
애써 태연한 척 내부 구경하는 사이 소파에 기대 있던 그녀는 스르륵 잠이 들었다
왠지 눈만 감고 있는 것 같았지만 왜 그런지 알 것 같았다
소변만 보고 집에 가려고 화장실에 갔는데 남자 면도기가 있더라
그리고 현관 옆에 있던 옷장도 슬쩍 열어보니 와이셔츠 몇 장 걸린 모습을 보고도 화가 나지 않았다
조용히 문을 닫고 나왔다
건물 입구를 막 나오자마자 나가는 길이라며 잠시 기다려달라 전화가 왔고
담배 하나를 다 태우니 그녀가 눈앞에 서 있었다
"할 말 없나?"
"... 없다 간다"
해가 쨍쨍 내리쬐던 여름 어느 오후 길거리에서 미칠 듯이 사랑했던 한 사람과 그렇게 이별했다
철없던 내 젊은 모습은 가져가고 책임감 있게 살아가는 모습을 선물해 준 채
진짜 이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