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 흐름에 맡겨진 나의 흔
집을 떠나서 잔다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없는, 어느 정도는 큰 사람이 하는 일이었다. 고등학교 수학여행을 준비하며 엄마와 같이 후드티와 청바지를 사 오고, 세면도구를 챙겨 트렁크에 넣는 언니 모습은 어른 같았다. 드라이로 앞머리를 세워 올려 스프레이로 고정하고, 교복이 아닌 쇼핑한 새 옷을 입고 트렁크를 밀며 현관을 나가는 내 모습을 상상했다.
파란 치마에 둥그런 파란 카라가 있는 흰색 반팔 상의, 언니의 고등학교 교복은 근사했다. 그날부터 내 목표는 언니가 다니는 인문계 S고등학교가 되었다. 합격선에 따라 입학 여부가 결정되기 때문에 학교 수업이 끝나면 독서실로 갔다. 주말도 예외는 아니었다. 새벽공기를 마시며 나가서 별을 보며 집으로 왔다. 보풀이 있고 크기가 안 맞아 어깨가 축 처진 교복이었지만 S고등학교로 가는 첫날, 내가 그랬던 것처럼 교복 입은 내 모습을 누군가 부러워하리라 생각하며 걸었다. 절로 입꼬리가 올라가고 어깨가 펴졌다. 세상을 다 가진 것 같았다.
작은 언니는 다른 고등학교에 진학했고 색이 바랜 문제집, 자습서, 페이지가 남은 노트, MC스퀘어(당시 집중력을 높여준다고 해서 성황리에 팔렸던 기계인데, 고가여서 언니가 샀을 때 갖고 싶었었다)는 모두 내 차지가 되었다. 문제집 앞에 기록한 학급과 이름, 자습서 표지에 붙인 가수 포스터, 요점을 정리한 노트를 보며 언니의 글씨체, 취향, 공부법까지 자연스럽게 내게 스며들었다. 연습장 한바닥을 다 채우며 글씨체를 연습하고, 언니가 좋아하는 가수 사진을 모아서 스케치북에 붙여 나갔다. 눈으로 여러 번 보며 공부하는 방식에서 언니처럼 노트에 요약하며 공부했다. MC스퀘어로 언니가 많이 들었던 소리를 들으며 공부했다. ‘나도 언니처럼 이 소리를 들으면 뇌에서 뭔가 작용이 일어나서 공부를 잘할 수 있겠지’ 하고 생각하며. 문제집은 지워서 다시 풀어야 했는데, 지워서 써야 하는 번거로움보다 언니의 흔적이 지워지는 것이 안타까웠다.
고등학교 입학과 동시에 언니는 대학생이 되었다. 귀걸이를 하고, 팩트의 쿠션을 연달아 볼에 두드리고, 빨간색 립스틱을 바르고 다녔다. 98년 12월 31일까지는 고등학생으로 있다가 99년 1월 1일 되는 날, 나는 무엇을 먼저 할지 생각했다. 귀를 뚫을까? 팩트를 먼저 살까? 아니면 파마 할까? 백을 먼저 사야 하나? 어깨 한쪽에 가방을 메고 반대쪽 손에 전공서를 들고 향수 향을 폴폴 풍기며 대학교 교정을 걷는 나를 떠올렸다.
야간자율학습이 끝나고 집 앞에서 붉은 얼굴에 술 냄새가 나는 언니와 마주했다. 언니는 너무 어른이 되었고 문득 우리와 함께 할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예감이 들었다. 같은 지붕 아래에서 언니를 닮아가기에 시간이 부족하다는 것도.
언니는 유아교육과에 진학했는데, 교생실습을 위해 손 인형을 만들고, 구연동화를 연습하는 모습을 넋 놓고 바라봤다. 내 진로는 자연스럽게 결정되었다. 같은 대학, 같은 과에 입학했을 때 언니는 졸업한 후였지만 흔적이 있었다. 만나는 교수님마다 ‘네가 동생이냐’며 언니가 너무 잘했었다고 칭찬하셨다. 역시 나의 워너비. 언니가 이뤄놓은 결실에 누가되고 싶지 않았다. 나는 만점에 가까운 학점으로 장학금을 받았고, 유아교육과를 대표하는 행사에 사회를 맡았다.
졸업을 앞두고 공립 유치원 교사가 되기 위해 임용고시를 준비할지, 사립유치원에 취업할지 잠시 고민했지만, 취업을 결정했다. 일단 버는 사람이 되어 가정에 보탬이 되어야 했다. 언니가 그랬던 것처럼.
대학 부설 유치원 교사 생활은 피아노를 치며 아이들과 노래 부르는 모습만은 아니었다. 현장을 배움과 동시에 대학 부설 기관으로서의 연구에도 참여해야 했기에, 유아교육학에 관한 깊은 공부가 필요했고, 대학원 진학을 결정했다. 근무하며 대학원을 병행하는 일은 거의 잠을 자지 못하는 날들의 연속이었는데, 논문 심사하기는 더욱 그랬다. 수업 준비, 청소, 차량 지도, 개인 업무, 학부모 면담, 과제, 논문 준비… 내가 하는 일 중 어떤 것이든, 하나라도 해준다면, 누구에게라도 부탁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논문 심사 때는 논문 심사본뿐만 아니라 심사위원들이 드실 다과까지 준비해야 했다. 심사장의 분위기와 교수님들의 컨디션을 고려해야 했기에, 누가 뭐라 하지 않아도 논문만큼이나 다과 준비에 신경을 써야 했다.
내 상황을 언니에게 푸념하며 늘어놓았고 언니는 본인이 준비하겠다고 했다. 그리고 찻잔, 깔개, 필기구, 필통, 화과자, 과일, 접시까지 모두 준비해서 몇 시간이 걸리는 거리를 기차와 택시, 버스를 타고 왔다. 양손과 어깨에 들고 메고. 짐 때문에 손을 흔들지 못하고 몸을 양옆으로 흔들며, 웃는 얼굴로 내 이름을 크게 부르는 언니와 마주했다. 이렇게까지 완벽하게 한다고? 계획부터 준비, 동생을 위한 헌신까지. 이건 내가 아무리 좋아 보여도 따라 하기에는 힘들 것 같았다. 단 며칠 만에 되는 일도 아니고, 연습한다고 그 성정을 따라잡을 수도 없고. 언니는 도대체 뭐지? 혹시 먼저 하늘로 가신 아빠가 언니 몸에 들어가 계신 건 아닐까 하는 생각도 잠시 들었다.
언니가 나를 구원해 준 일은 또 있었다. 절에서 초등학생들을 위해 운영하는 자비 교실에 다니고 있었다. 일주일에 한 번씩 가서 부처님 앞에서 합장한 채 찬불가를 부르고 염불을 외우고, 간식도 먹었다. 쉬는 시간, 평소 장난기가 있던 한 오빠가 나를 밀었고 나는 바닥에 무릎을 부딪치며 넘어졌다. 아프고, 창피했고, 큰언니에게 달려가며 울었다. 언니는 누구냐고 한마디 물었고 그 아이에게 직진해서 뺨을 날렸다. 아마 최초의 언니 바라기가 시작된 시점은 이때인 것 같다. 언니도 초등학생이었는데 어디서 그런 배짱이 있었을까? 내가 언니였다면 백번 용기 내서 겨우 하지 말라고 말하는 정도였을 텐데.
요즘 언니네는 캠핑 마니아가 되었다. 하나둘 장비를 사들이더니 이제는 아예 차에 완전 세팅을 해 놓고 언제든지 즐기고 온다. 스멀스멀 따라 하고 싶은 마음이 들어 남편의 옆구리를 찔러보지만, 잘 안 먹힌다. 어쨌든 혼자 하기에는 버거워 때를 보고 있다. ‘언니가 하는 건 다 좋아 보여’는 마흔이 넘은 지금도 분명히, 아직도 진행형인 게 맞다.
언니는 내가 선택한 게 아니다. 태어나보니 언니 동생이었고, 못해도 자매계의 금수저 쯤 되는 것 같다. 성장 과정에서도 현재에도 언니가 스며있다. 불현듯 언니가 먼저 떠나면 어쩌나 하는 생각이 든다. 행복할 때, 그게 사라질 가 더 불안하다고 하지 않는가? 술 마신 언니와 마주한 그날처럼. 언니가 결혼해서 집을 나가던 그날과 같이. 언니가 결혼하고 다시 나의 일상을 찾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공기처럼 마시던 사람이 없었으니까. 만약 어떤 이유에서든 언니를 보지 못하는 날이 온다면, 언니와 같은 하늘 아래 있을 수 없다면, 나는 어떤 모습일지 떠올리는 게 두렵다. 언니는 나와 같은 상황이라면 어떻게 할까? 아마도 충분히 애도하고 잘 떠나보내 주겠지. 할 수 없이 나는 언니 바라기이니까 이것 또한 닮기로 한다. 언니가 하는 건 다 좋아 보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