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 흐름에 맡겨진 나의 흔적
“아니 그게 아니고, 어떻게 된 거냐면…”
누군가 동생과 내가 쌍둥이인지 물어볼 때면 지나치게 우리 집의 호적 정보까지 설명하게 된다. 그렇지 않으면 대답할 방법이 없으니까. 어느 순간 일일이 대답하는 것도 귀찮아지고, 뭐 좀 틀리게 알면 어떠냐 하는 생각에 ‘그렇다’하고 대답할 때도 있었다. 그럼 ‘진짜 안 닮은 이란성이구나’하는 답이 돌아왔다.
나는 1980년생, 동생은 1980년생이다. 이 상황만 두고 보면 재혼 가정이거나 둘 중 한 명은 아빠나 혹은 엄마의 외도 결과이다. 입양 가정이거나. 모두 아니다. 아빠의 잘못인지, 동사무소(현재는 주민센터) 직원의 잘못인지, 1981년에 태어난 동생은 1980년생이 되었다. 물론 그 사실을 당시에는 몰랐다. 아빠가 돌아가시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나와 동생의 입학통지서는 한날 도착했다.
아빠에게 확인할 수 없었고, 엄마에게는 동사무소를 찾아가 항의할 여력이 없었던 것 같다. 대신 초등학교 교장선생님께 무릎을 꿇었다. 동생이 너무 어려서 언니와 같은 반에 넣어달라고. 얘는 지금 아무것도 모른다고. 그땐 엄마가 무릎을 꿇을 정도로 사정한 건 줄 알았는데 엄마는 진짜 무릎을 꿇었다. 돌아오는 대답은 엄마의 기대를 완전히 무너뜨렸다.
“어머니, 아이가 독립심을 못 키워요.”
엄마는 넋이 나간 듯 돌아오셨고, 받아들였다. 두 달 전, 아빠가 돌아가신 직후,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병실의 짐을 빠르게 싸서 나왔던 엄마였다. 6살부터 10살까지 네 명의 딸들이 기다리고 있으니 마음 놓고 슬퍼할 사치를 누리지 못했으리라. 생일도 10월인 막내가 1년이나 빨리 입학해야 하는 상황에서, 그래도 셋째인 내가 한 학년에 같이 다닐 테니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하셨단다.
사실 받아들여야 하는 건 나였다. 엄마는 동생 잘 챙기라고 여러 번 말씀하셨다. 동생 반에 자주 가 보라고도. 같은 반이어도, 다른 반이어도 챙겨야 하는 존재가 있다는 건 온전히 나에게만 집중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나도 막 입학한 초등학생이었는데. 반을 못 찾아서 울고 있는 건 아닌지 하는 생각이 불현듯 들어, 내 교실을 찾은 다음 동생에게 달려갔다. 역시나 복도에서 울고 있는 동생을 달래서 반으로 데려다주고 교실로 뛰어갔다.
어느 날은 동생 반 친구들이 달려와 말했다.
“누가 네 동생 때렸어.”
나는 말이 끝나기 무섭게 달렸다. 어디서 그런 용기가 생겨나는 걸까? 누가 동생을 건드렸다는 말만 들어도 몸이 먼저 반응했다. 내성적인 나도 그 순간은 겁나는 게 없었다. 도착했을 때는 이미 상황이 종료된 경우가 많았지만, ‘우리 동생 건드리면 다 죽어’ 하는 눈빛을 쏘아대며 힘센 언니가 있다는 걸 보여주었다.
초등학교 6년 동안 우리는 한 번도 같은 반이 되지 않았다. 엄마는 보통 아이들도 같은 반이 몇 번씩 되는데, 이렇게 하는 건 학교에서 일부러 떨어뜨려 놓는 거라며 교장선생님을 원망했다.
중학교도 예외 없이 같은 학교에 입학했고, 예상대로 3년 동안 다른 반이 되었다. 이때부터 힘센 언니의 일은 더 바빠졌다. 이젠 내 도움 없이도 학교생활을 잘했지만, 동생의 미모가 문제가 됐다. 길거리에서도 자주 캐스팅 제안을 받고, 독서실에 같이 가면 동생의 책상은 남학생들의 쪽지로 가득했다. 툭하면 자리를 비우는 통에 내 레이저는 더욱 예민해졌다. 감시자의 역할은 보호자의 역할보다 더 촉을 세워야 했다.
어떤 관계인지, 어떤 사연이 있어 자매가 같은 학년인지 설명하는 우리도 곤혹스러웠지만, 동생의 친구들과 내 친구들은 우리 자매의 호칭을 부를 때마다 헷갈려 했다. 동생 친구들과 내 친구들이 겹치는 경우는 그냥 서로 이름을 부르면 됐는데, 내 친구들과 겹치지 않는 동생 친구들은 나를 동생의 언니로 불러야 할지, 이름을 불러야 할지 잠시 머뭇거렸다. 호칭을 정해달라고 하는 친구들도 있었다. 가끔 또래에게도 언니라고 불렸다. 동생은 지금도 유치원에 다니지 못한 것을 억울해한다. 언니들은 모두 유치원을 다녔는데, 자신은 글자 하나 모르고 학교에 들어가서 얼마나 힘들었는지 아냐며. 그래도 동생은 한 살 많은 언니를 다 친구 먹는 혜택은 누렸다.
스무살이 넘어서도 밥을 먹을 때면 동생 숟가락 위에 생선 가시를 발라 도톰한 살을 올려주었다. 아르바이트하러 갔다 늦는 날도 기다렸다가 밥을 차려주는 건, 엄마 아닌 나였고. 동생을 향한 마음은 우리가 성인이 된 후에도 여전히 변함이 없었다.
취업을 하고, 결혼을 하고, 아이 엄마가 된 우리들. 요즘은 동생이 내 마음을 지켜준다. 사람에 치여 고민할 때, “민니(내이름과 언니의 줄인말이다. 동생은 언니가 셋이나 되어 큰언니는 큰니, 작은언니는 잔니라고 부른다), 민니 만큼 열심히 하는 사람은 잘 없어. 민니는 최선을 다했는데, 그 일을 그렇게까지 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거든. 사람들은 다 저마다의 상황이 있잖아. 나는 그럴 때 그 사람 입장이 돼서 생각해 봐. 그럼, 왜 그랬는지 좀 이해가 되거든.” 하고 말한다. 내 마음이 다치지 않게 만져주며 현실을 바로 볼 수 있도록 조언한다. 어쩌면 동생은 어릴 적부터 나의 지나친 관심과 원치 않는 배려를 내 입장에서 생각하고 바라봐 주었던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이전에 한 워크숍에 참여했을 때, 주변 사람들에게 나의 장점 3가지를 물어보고 공유하는 시간이 있었다. 나는 동생에게 물었고 답장이 왔다.
“민니는 공감력도 뛰어나고, 책임감도 있고, 논리적이고… 근데 세 가지만 말해야 해? 다른 장점도 많은데.”
문자인데 동생의 음성이 들렸다. 눈물이 차올랐다. 세상 누구보다 나를 잘 알고, 나의 가치를 인정해 주는 사람. 이제는 서로를 지켜주는 우리.
동생을 보살핀 시간은 분명 나를 어렵게 했지만, 조건 없는 사랑을 알게 했고, 분명 주었다고만 생각했는데 내 사랑을 받아주고 언니의 위치에 있게 해주었다.
우리는 쌍둥이는 아니지만 적어도 쏘울메이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