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 흐름에 맡겨진 나의 흔적
전주가 흐른다. ‘불러야 할까?’ ‘불러도 될까?’ 노래가 시작된다.
“어젯밤에 우리 아빠가 다정하신 모습으로 한 손에는 크레파스를 사 가지고 오셨어요. 음음.”
나는 부르는 것처럼 입을 벙긋거렸지, 소리 내지 않았다. 나는 아빠가 없으니까.
학년이 시작되는 첫날의 공포는 아직 또렷하게 남아있다.
“아빠 없는 사람?”
선생님의 말에 손을 들자마자, 모두의 시선은 나를 향했다. 무언가 나는 아이들과 시작부터 달랐다. 다른 사람은 다 있는데 나는 없는 것이 있다는 것에 움츠렸고 뭔가 잘못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설레야 하는 첫날이지만 새 학년이 시작될 때마다 공포는 재생되었다. 적어도 몇 해 동안은.
5학년 어느 날 호감을 느끼고 있던 남자아이가 내 옆으로 와서 앉았다. ‘어떤 이야기를 할까? 혹시 얘도 나한테 관심이 있었던 걸까’ 하는 생각에 미소 지으며 친구를 보았다.
“야. 너 아빠 없다며. 진짜 없어?”
‘또 그게 문제니? 응 없어. 그게 왜? 그게 무슨 상관인데? 언제까지 물어볼 건데? 네 아빠는 평생 사셔?’ 마음속으로 한바탕 퍼붓고 한마디도 내뱉지 못했다.
아빠와 크레파스를 부를 수 없는 날들은 계속되었다.
대학 입학을 하고 그룹 과제를 하러 늦게까지 학교에 남아 있었다. 아빠가 데리러 온다는 친구의 말에 화제는 아빠 이야기로 이어졌다. 마음이 불편해져 일어날 타이밍을 엿보고 있었다. 그때 한 친구의 말이 나를 붙잡았다.
“아빠가 일찍 돌아가셨어. 초등학교 때. 그래서 아빠 기억은 별로 없어.”
친구는 아무렇지 않게, 주눅 들지도, 부끄러워하지도 않으며 그저 담담하게 말했다. 그리고 다들 ‘그렇구나' '보고 싶겠다’라고 반응했다. 그때 알았다. 아빠가 일찍 돌아가신 건 내 잘못이 아니라는 것, 그걸 남들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 그건 내가 처한 일이지 다른 사람들에게 크게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친구의 이야기에 용기를 얻어 내 이야기를 이어갔다. 처음으로 우리 아빠 이야기를 사람들 앞에서. 일곱 살 마지막 날 우리 집 앞 도로에서 오토바이 뺑소니 사고로 돌아가셨다고. 나는 사고 자국이 보이는 그 길을 매일 같이 건너다녔다고. 다음 해 유치원 졸업식에 카메라를 들고 사진 찍어주는 아빠가 없어 부재를 처음으로 실감했다고.
아빠는 늘 밤마다 한 손에 간식을 사 오셨다. 술 한잔 드시고 늦게 오시는 날도 여전했다. 그중 제일 좋아했던 간식은 리베나 아이스크림이다. 떠먹는 요구르트 크기의 아이스크림이었는데, 그 당시 비싼 가격이었다. 다만 잠들어 있던 우리 네 자매를 깨워서 먹는 걸 보셔야 주무시러 간다는 점만 빼고는 퇴근하는 아빠가 항상 기다려졌다. 그때의 많이 먹으라는 아빠의 음성과 미소, 바닐라향의 조화가 좋아서였을까? 지금도 최애 아이스크림은 바닐라이다. 교육에도 관심이 많아서 70년대 후반~80년대 초반에 태어난 우리들은 사립유치원에 다녔고 큰언니는 사범대학부속초등학교에 다녔다. 지금 말로 하자면 그야말로 열성 아빠, 딸 바보 아빠였다. 아빠에 대한 기억이 많지 않지만, 넘치는 사랑을 받았던 그 시절로 다녀온 날이면 마음이 충만해진다.
가끔 아빠가 사무치게 그리운 날이 있다. 눈시울이 붉어지면서 눈물이 쏟아져 나오는 날이. 지금이 그 순간이다. 이 그리움을, 이 보고 싶음을 어린 나는 어떻게 견뎠을까?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하고, 들킬까 마음 졸였던 어린 나를 가만히 안는다. 그리고 말한다. 언제라도 아빠와 크레파스 노래를 부르라고. 아주 크게 불러도 된다고. 너에게는 너를 누구보다 사랑했던 아빠가 네 마음속에 지금도 계신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