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제의 계절, 멈춰버린 시간
매일 영국에 와서 동네 한 바퀴를 돌며 조깅을 하고 있다. 집 앞을 나설 때는 코 끝이 쨍할 만큼 싸늘하지만 뛰다 보면 마음이 뻥 뚫리듯 상쾌해진다.
쉐필드는 언덕의 도시다. 달리기를 할 때 그만큼 숨찰 일이 많다.
나의 조깅코스에서 가장 마지막 휘날레를 차지하는 곳인 맨스필드 로드.
언덕을 10분 정도 계속 올라가는 코스이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올라가다 보면 언덕길의 가장 높은 곳에 벤치 하나가 있다.
빨간 버스가 쉼 없이 오가는 도로 옆, 한 벤치 아래 놓인 헬멧과 예쁜 꽃다발, 그리고 작은 장난감을 보았다. 작은 정원처럼 꾸며진 초록 잔디 위에 놓인 물건들은 누군가의 이야기를 조용히 붙잡고 있었다.
이곳에서 한 소년이 세상을 떠난 것이 아닐까?
영국의 겨울, 크리스마스가 다가오고 있다.
한국의 설이나 추석처럼 잠시 고향에 내려가는 수준이 아니라, 가족과 함께하기 위해 삶의 속도를 완전히 멈추는 기간이다. 오랜만에 모인 식구들이 벽난로 앞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서로에게 준비한 선물을 건네고, 크리스마스 디너를 먹으며 웃음이 오가는 시간. 영국에서 크리스마스는 ‘함께 있음’ 자체가 목적이고, 사랑이 가장 선명해지는 계절이다.
그러나 이 벤치를 세운 가족에게 크리스마스는 다른 얼굴로 다가올 것이다. 환한 조명은 여전히 거리를 비추지만, 그들 마음의 한 자리는 어둠 속에 남아 있을 것이다. 누구보다 기다렸을 날, 다시는 함께할 수 없는 자리를 바라보는 일. 그것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고통스럽다.
다시 만날 수 없는 자리 앞에서
나는 문득 작년 겨울을 떠올렸다.
비자 문제로 영국에 올 수 없었던 시간, 남편과 딸은 프랑스 파리에서 크리스마스를 함께 보냈다.
2주 후 또 헤어져야 하는 사실에 마음이 편치 않은 시간이었다. 우리 가족은 어디에서 살게 될 것인지, 또 언제까지 기다려야 하는지 그리고 기다림을 묵묵히 이겨낼 수 있을지.. 어려운 현실 속에서 우리는 절망하지 않으려 서로의 손을 잡고 파리의 거리를 누비고 다녔다.
다시 벤치 아래를 바라본다.
색이 바랜 장난감, 조용히 누워 있는 헬멧, 그리고 사랑을 대신해 놓아둔 꽃들. 누군가는 이곳을 찾아와 그 소년을 생각하며 함께한 소중한 시간들을 되돌아볼 것이다. 벤치는 말이 없지만 그 마음을 알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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