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없이 건네진 휴식

by 잉글맘

남편의 분노가 집 안을 조용히 잠식해 가던 어느 날이었다.

그때, 뜻밖의 제안이 나왔다.

“잠깐 어디라도 다녀오는 건 어떠니?”

시어머니였다.


우리가 영국 생활에 적응하느라 고생하는 것 같다고,
가까운 곳이라도 여행을 다녀오라 하셨다.
그리고 조용히 덧붙이셨다.

“경비는 내가 할게.”

나는 잠시 말을 잃었다.


고마웠지만, 한편으로는 마음이 불편했다.

이미 성인이 된 우리가 부모님의 도움을 받는다는 것이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하지만 남편은 말했다.

“엄마도 우리 없이 조용히 쉬고 싶으실 수도 있어.
서로 필요한 걸 잠시 갖는 거라고 생각하자.”

그 말이 이상하게 위로가 되었다.

우리가 선택한 곳은 터키 안탈야였다.

이름도 낯선 도시.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나라.

4월의 햇살은 따뜻했고
공기는 바다 냄새를 품고 있었다.

우리는 10일 동안, 아무것도 하지 않기로 했다.

아침에 일어나 수영을 하고, 배가 고프면 먹고, 졸리면 낮잠을 자고,
해가 지면 와인을 마셨다.


딸아이는 키즈클럽에서 각국에서 온 아이들과 금세 친구가 되었다.

아이를 맡기고 돌아오는 길,
남편과 나는 오랜만에 손을 잡고 천천히 걸었다.

급하게 해결해야 할 문제도, 눈치를 살펴야 할 분위기도,
누군가의 표정을 읽어야 할 필요도 없었다.


그곳에서는 그저 우리 셋이면 충분했다.

“여기가 지상낙원인가 봐.”

남편이 웃으며 말했다.


그 웃음이 참 오랜만처럼 느껴졌다.

그는 더 이상 엄마의 눈치를 보지 않았고, 학교 이야기도 잠시 멈췄다.

우리는 우리가 감내해 왔던 시간들을 잠시 내려놓았다.

그 달콤함은 마치 허락받은 휴식처럼 느껴졌다.


리조트에서는 매일 같은 얼굴들을 마주쳤다.
독일에서 온 부부,
폴란드에서 온 가족,
프랑스에서 온 노부부.

모두가 각자의 삶을 잠시 내려두고 이곳에 와 있었다.

그들과 나누는 짧은 인사와 웃음 속에서 나는 깨달았다.

누구나 잠시 숨을 고를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월, 금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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