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 언니 집 거실에 누웠다.
여름옷 몇 벌만 들고 왔던 나에게 남편은 큰 여행용 가방 하나를 보내왔다. 그 안에는 가을과 겨울 옷이 가득 담겨 있었다.
다가올 추위를 준비할 수 있어 다행이면서도,
혼자 한국에서 겨울을 보내야 한다는 사실이 씁쓸하게 다가왔다.
부모님 댁을 나와 언니 집으로 옮겼다.
슬픔 속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고 싶었다. 그래서 나만의 생활 루틴을 다시 만들기 시작했다.
“이제 더는 패배자처럼 살고 싶지 않다.
긍정적이고 활기찬 나의 모습을 다시 찾아보자.”
남편과 딸을 다시 만나려면 두 달이 더 남아 있었다.
시간이 너무 느리게 흐르는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일을 시작하기로 했다.
문득 10년 동안 운영했던 영어 공부방이 떠올랐다.
아이가 태어난 뒤 사교육 시장에 뛰어들어,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시작했던 시간들.
처음에는 작은 공부방이었지만 점점 자리를 잡았다.
어느 순간에는 대기자 명단이 생길 정도로 아이들이 몰렸다.
그러다 코로나가 찾아왔다.
3개월 동안 문을 닫았고, 이후에는 온라인으로 숙제를 체크하며 수업을 이어갔다.
마스크를 쓴 채 아이들과 수업을 한 시간이 2년이었다.
초등학교 6년을 함께한 아이들이 졸업하고, 형제자매까지 맡겼던 학부모님들과는 어느새 10년 가까운 인연이 되었다.
내 상황을 조심스럽게 전하자 세 분의 학부모님이 바로 연락을 주셨다.
“선생님 상황은 마음이 아프지만, 그래도 다시 수업을 받을 수 있어 저희는 행운이에요.”
그 말은 위로이자 격려였다.
덕분에 다시 움직일 힘이 생겼다.
또 하나의 도전도 시작했다.
한식조리사 자격증 과정.
요리를 특별히 좋아하는 편은 아니었지만, 언젠가 영국에서 한식을 알릴 기회가 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매일 오전 네 시간 동안 조리대 앞에 서는 일은 생각보다 힘들었다.
결혼 12년 차였지만 내가 할 줄 아는 한식은 많지 않았다.
특히 채 썰기와 규격대로 자르는 일이 가장 어려웠다.
오전에는 요리 수업,
오후에는 과외 수업.
그렇게 하루를 채우며 크리스마스까지 버텨보기로 했다.
영국에서는 딸이 초등학교 졸업시험을 준비하고 있었다.
영국에 간 지 1년도 되지 않은 상황에서 시험을 준비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나는 딸에게 말했다.
“최선을 다하되, 영국에서 태어난 아이들과 비교하지는 마.”
딸에게는 인생에서 첫 번째 큰 시험이었다.
그 중요한 순간에 내가 옆에 있어 주지 못한다는 사실이 마음을 아프게 했다.
시부모님께는 일부러 자주 연락하지 않았다.
미안한 마음도 있었지만, 그보다 더 큰 이유는 따로 있었다.
남편 말고는 다른 영국인과 대화를 나누고 싶지 않았다.
어쩌면 옹졸한 마음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때의 나는 그럴 여유가 없었다.
시어머니는 딸아이의 점심 도시락, 식사, 빨래까지 모두 챙겨주고 계셨다.
가끔 보내주시는 사진 속에서 딸이 웃고 있는 모습을 보면 그날 하루가 조금 안심이 되었다.
남편 역시 쉽지 않은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학교 적응을 돕고, 딸을 돌보고, 집안일까지 챙겨야 했다.
그는 아마 한 번도 그렇게 무거운 짐을 어깨에 올려놓고 살아본 적이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갑자기 벌어진 일 앞에서
친구를 만나거나 운동을 하는 일조차 사치처럼 느껴지는 시간이 되었을 것이다.
남편 주변에는
나, 딸, 그리고 시부모님까지.
격려하고 공감해주어야 할 사람들이 너무 많았다.
그래서 정작
자기 자신의 감정을 들여다볼 시간조차 없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