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자 결과가 나온 뒤, 나는 일주일 동안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했다.
아침에 눈을 뜨면 집을 나와 공원으로 갔다.
사람이 없는 벤치에 앉아 멍하니 시간을 보냈다.
아무렇지도 않은 척.
누가 볼까 봐 조용한 길을 골라 걸었고,
사람이 없는 곳에서만 눈물을 흘렸다.
남편과 함께 산책하던 길,
딸아이와 자주 가던 커피숍,
우리 셋이 좋아하던 식당들.
그곳들을 지나칠 때마다 명치가 쥐어짜듯 아팠다.
세상은 아무 일도 없다는 듯 돌아가고 있었다.
한국의 일상은 나를 빼고 모두 바빴다.
추석이 가까워지자 부모님은 더 바빠졌다.
채소 값을 잘 받을 수 있는 시기라며 아침부터 밭으로 나가셨다.
“오늘 좀 도와줄래?”
나는 아무 말 없이 따라나섰다. 밭에서는 말을 거의 하지 않았다.
그저 채소를 뽑고, 다듬고, 비닐봉지에 담는 일을 반복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기계처럼 같은 동작을 계속했다.
몸은 일하고 있었지만 마음은 계속 뒤틀리고 있었다.
내 속은 썩어 문드러질 것처럼 화가 나 있었는데
부모님은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그 사실이 이상하게도 더 야속하게 느껴졌다.
그때의 나는 누군가에게 화를 낼 사람이 필요했다.
그리고 그 대상은 늘 내 곁에 있어 준 가장 약한 사람들이었다.
부모님이었다.
하루 종일 채소를 뽑고 돌아온 다음 날, 허리가 끊어질 듯 아팠다.
그날 하루 짜증을 내며 일을 도와드렸던 나에게
엄마는 작은 봉투를 건네주었다.
“태국 가서 맛있는 거 사 먹어라.
이번에 채소 값이 좋아서 엄마 돈 좀 벌었다.”
순간 눈물이 올라왔다.
하지만 엄마 앞에서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우리 가족이 상봉하기로 한 곳은 태국이었다.
두 달 만의 만남.
나는 여행 가방 절반을 한국 음식으로 채웠다.
태국까지 가서 한국 음식을 가져간다는 것이
어쩌면 조금 우스운 일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딸아이에게 따뜻한 밥을 해주고 싶었다.
그 마음 하나였다.
방콕 공항에서 딸아이를 발견한 순간
나는 그대로 달려갔다.
가슴이 터질 것처럼 뛰었다.
심장 소리가 귀까지 울릴 정도였다.
딸아이를 안는 순간 참고 있던 것이 무너져 내렸다.
눈물이 터졌다.
통곡에 가까운 울음이었다.
그렇게 우는 나를 처음 본 딸아이는
당황한 얼굴로 내 눈물을 닦아 주었다.
“엄마 괜찮아?”
그리고 말했다.
“엄마, 아빠한테도 인사해.”
그제야 내 뒤에서
조용히 눈물을 흘리고 있는 남편이 보였다.
그렇게 두 달 만의
우리 가족의 재회가 이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