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그런 생각을 오래 했다.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어디서부터 말해야 할까. 키보드 앞에 앉아 한 자도 쓸 수 없는 시간들이 길었다. 이게 다 무슨 소용이냐고 썼던 반년 전 내 시의 한 구절대로, 나는 아무 소용도 없는 짓을 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여기서부터 시작하는 것이 좋겠다. 나는 석순에서 두 해를 보냈다. 여섯 개의 글을 썼고, 처음 쓴 글을 제외하고는 모두 시를 썼다. 이제야 고백하건대 석순에 들어온 첫 학기를 제외하고는 어떤 글도 쓰고 싶지 않았다. 의제에 대해 적극적인 주장을 할 자신이 없어 시를 썼다. 짧은 시에는 강렬하고 정확한 주장을 하는 문장은 필요 없다고 생각했다. 어느 날 친구로부터 그런 말을 들었다. 넌 왜 글을 안 써? 그러게. 아무것도 쓸 수 없다고 생각해 정말 아무것도 쓰지 않았던 일 년이 지나자 문득 슬퍼졌다. 혐오와 차별은 저렇게도 명확한데, 왜 내 글은 이렇게도 흐릴까. 이 글은 무너지고 흐려지지 않기 위한 발악이자 사랑하는 내 친구들과 동료들, 그리고 나를 위한 헌사이다.
유난히 무더웠던 올해 여름, 한 인터뷰에서 이런 질문을 받았다. 귀하의 페미니스트로서의 활동 기간을 말씀해 주시길 바랍니다. 예시, 1년 6개월. 나는 언제부터 페미니스트로 살았지? 그런 걸 세어볼 수 있나? 응애 하고 태어났을 때부터 페미니스트였다고 적을 수도 없고. 어떤 ‘활동’을 해야 페미니스트가 되는 거지? 고민하다 이렇게 적었다. 8년.
나는 혜화역 시위가 일어나던 2016년의 어느 봄, 트위터를 통해 페미니즘을 접했다. 그리고 2년 뒤 다니던 여자중학교에 페미니즘 동아리를 만들었다. 그 당시에는 ‘페미니즘 활동’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몰랐다. 내가 아는 것이라고는 거리에 앉아 구호를 제창하는 시위가 전부였고 학교에서 그런 시위를 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럼에도 학교에 페미니즘 동아리의 결과물을 보여주고 싶었고 함께 페미니즘을 이야기하는 친구를 만들고 싶었다.
그해 유월에는 여학생의 교복이 얼마나 활동성이 없는지, 그것이 여자 아이돌의 성상품화와 무슨 관련이 있는지를 얘기하는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학교 게시판에 여학생 교복의 단점과 교복을 입은 여자 아이돌이 어떤 식으로 성상품화되고 있는지 써 붙일 수 있는 판넬을 두었다. 그 판넬에 적힌 성차별적인 발언을 포스트잇에 옮겨 복도에 전시하듯이 붙였다. 그날 점심시간 게시판 앞에서 판넬을 보던 나에게 체육 선생님이 대뜸 소리를 지르셨다. 선생님의 손에는 우리가 복도에 붙인 포스트잇이 가득이었다. 허락도 없이 ‘이런 말’을 학교에 붙이는 게 제정신이냐고 하셨다. 나는 허락 없이 게시해서 죄송하다는 말을 남기고 복도에 남은 포스트잇을 떼어 냈다. 내게 소리를 지른 체육 선생님을 본 후배들이 그 선생님 수업에 들어가 “저 선생님이 그 언니(나)에게 소리를 지른 한남이다”라고 소문을 냈고 체육 선생님은 나 때문에 학교를 다닐 수 없다고 했다. 그리고 나는 부장 선생님께 불려 가 꾸중을 들었다. 꾸중을 듣던 두 시간 동안 나는 선생님께서 지금 제게 하신 말 시간이 지나면 후회하실 거라고, 시대가 바뀌고 나면 이렇게 혼을 낸 것이 아주 성차별적이고 불평등한 일이었노라 회상하게 되실 거라고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리며 말했다.
눈이 퉁퉁 부어 교실에 돌아가자 몇 친구들이 내게 “너는 우리가 이딴 모습(교복을 입은 여자 아이돌을 향한 성차별적 발언들)으로 보이는 거냐”며 화를 냈다. 나는 그때까지만 해도 ‘같은 여자’라면 함께 성차별적인 현실에 맞서 분노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선생님과 말싸움을 하던 시간보다도 더 절망스러웠다. 우리는 비슷한 종류의 차별을 공유하고 서로 연대할 수 있는 집단이기에, 페미니즘에 반하는 말을 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성별만이 우리를 우리로 묶어줄 수 있다고 생각했다. 내 친구들로부터 “그렇게 심각하고 저질스러운 성희롱은 실재하지 않는데 왜 네가 과장해서 우리를 비하하느냐”는 말을 듣자 와르르 무너지는 기분이었다.
나와 친구들은 언제 싸웠냐는 듯이 전과 같은 학교생활을 보냈다. 나는 그날 이후로 전교생 모두의 참여를 바라는 페미니즘 활동은 하지 않았다. 포스터를 만들어 게시하는 정도의 활동을 이어갔고, 선생님이나 친구들과 싸우는 일 없이 졸업했다. 내가 사라지자 동아리도 자연스레 사라졌다. 그리고 페미니즘을 오직 ‘생물학적 여성’만이 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나의 굳은 믿음도 사라졌다.
나는 페미니즘 동아리를 만들었다는 이유로 동네의 유명 인사가 됐다. 정작 ‘메갈’이었던 내게 가해지는 직접적인 위협은 없었으나 나의 친구들은 ‘메갈 친구’라는 꼬리표를 얻어 작고 큰 다툼을 겪어야 했다. 세상이 금방 바뀔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제자리인 것 같았다. 내가 한 모든 행동과 말들이 아무런 소용이 없는 것 같았다. 페미니즘이라는 말은 여전히 볼드모트처럼 아무도 입 밖으로 내지 않는 단어였다.
시간이 지나자 나의 모든 ‘페미니즘 활동’들은 사춘기의 치기 어린 행동 정도로 치부되었다. 내게는 정말 치열한 시간이었는데 주변 사람들은 페미니스트로서 나의 정체성을 모른 체 했다. 중학생인 나도, 페미니스트로서 아무런 활동도 하지 않는 고등학생인 나도 모두 페미니스트라고 얘기하고 싶었는데 나는 이미 지쳐있었다. 작고 좁은 ‘촌 동네’에서 페미니즘이 여기에도 있다고 말했던 나의 행동들은 오직 분노만을 연료로 해 굴러갔었다. 일상 속의 차별을 바꾸기 위해 움직였는데, 분노가 일상 속에 들어오자 하루하루가 버거웠다. 이화여대 학생들이 총장실 앞에서 서로의 팔짱을 끼고 <다시 만난 세계>를 부르는 영상을 보고 또 볼 때마다 그 사이에서 함께 노래를 부르는 나를 상상했다. 혜화역 시위를 보며 길에 앉아 있는 나를 상상했다. 내 목표는 대학이 아닌 페미니즘이었다. 서울에 가야 했다.
동시에 페미니스트로서 나를 더 심하게 검열하기 시작했다. ‘생물학적 성별’에 대한 단일한 믿음이 실은 무척이나 차별적이었다는 것을 깨닫자 내 목소리에 누군가를 향한 혐오와 배제가 섞여 있을까 두려웠다. 일상에서도, 나 스스로에게서도 붕 떠 있는 기분이었다. 그 모든 모순이 서울에 가면 다 해결될 거라고 믿었다. 당장의 모순과 자기혐오를 잠재우기 위해 미래만을 바라보고 현실과 타협했다. 그즈음에는 더 이상 “정상에서 만나자”는 말을 믿지는 않았지만 나는 가야 했다.
그리고 서울에 도착했다. 학교에 입학하고 여학생위원회의 존재를 알게 되자마자 여학생위원회에 들어갔다. 처음으로 다양한 페미니스트 친구들과 동료들을 만났다. 숨통이 트이는 기분이었다. 세미나가 끝나고 테이블에 둘러 앉아 시시콜콜한 농담을 주고받고 집으로 돌아오는 밤마다 어린 나를 떠올렸다.
너, 조금만 더 견뎌봐. 이건 꽤 괜찮은 탈출구일지도 몰라.
타협하며 미뤄두었던 글을 쓰고 싶었다. 그렇게 석순에 들어갔다. 정제된 언어와 문장으로 의견을 피력하는 것이 이렇게 어려운 일인지 몰랐다. 세상은 차별과 혐오에는 무감했지만 차별과 혐오를 말하는 우리에게는 엄격했다. 틀린 말을 하게 될까 전전긍긍했다. 서울은 종착지가 아닌 경유지에 불과했다. 서울이라는 장소가 나의 고민과 모순을 모두 해결해 주지 못한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다. 결론 같은 건 아무렴 없어도 그만이라고 썼지만 정말 결론이 없는 질문을 끊임없이 던져야 한다는 사실이 가끔은 너무나도 숨 막혔다. 바뀌고 변화하고 질문하고 생각하고 행동하는 그 모든 것들이 마냥 쉬운 일도 즐거운 일도 아니라는 걸 이제는 안다고 생각했는데. 무언가를 안다고, 알 것 같다고 생각할수록 페미니즘은 내게 다시 질문을 던졌다. 경계에서 흔들리는 멀미 같은 삶을 언제쯤 잘 살아낼 수 있을까 아득했다. 내가 흔들리다 못해 아예 흐려졌다고 생각했다.
모든 게 모호한 것 같았고, 어쩌면 모든 게 모호하기를 바랐지만 가끔 내가 묻고 싶은 몇 가지는 정말 명확했다. 내가 무언가를 할 수 있을까? 세상이 바뀌기는 하는 걸까? 누군가 석순을 읽기는 할까? 우리는 정말 점점 나빠지고 있을까?
가판대에서 줄어들거나 줄어들지 않는 석순을 보며 늘 궁금했다. 석순 위원들과 아무런 인연 없이 독자모임에 오는 독자는 정말 드물었다. 가끔 석순실을 뒤적거리다 예전 독자분들이 보낸 편지를 읽곤 했다. 학내 학우들이 보낸 편지도 있었고, 졸업생이나 중학생 독자가 보낸 편지도 있었다. 상황이 정말 안 좋아져서, 대학에 학생 사회라는 게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아서, 백래시가 해를 더해갈수록 심해져서 우리가 쓴 글들은 아무런 응답을 받지 못하는 걸까?
세상이 정말 나빠지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중학생 시절 나와 친구들은 실리콘 접착제를 들고 다녔다. 화장실에서 구멍을 마주칠 때마다 실리콘을 작게 얹어 구멍을 막았다. 몇 년이 지나자 N번방 성범죄가 발생했고, 이제 디지털 성폭력은 딥페이크 성착취물로 진화했다. 처음 보는 사람들에게 석순을 여성주의 교지편집위원회가 아닌 그저 교지편집위원회로 소개했고 자기소개서에 여학생위원회 이름을 올릴지 말지 고민했다. 거리로 향할 때 마스크를 잊지 않고 챙겼으며 얼굴이 보이지 않도록 피켓을 이마 끝까지 올렸다. 퀴어퍼레이드로 향하는 지하철역에서 크게 소리 지르는 사람을 보면 움츠러들었다. 찢긴 대자보와 석순을 보며 제발 우연이기를 빌었다.
나쁜 소식 위로 미뤄둔 질문들이 누덕누덕 쌓여갔다. 내가 하고 있는 일이 맞는 방향인지도 모르겠는데, 세상은 점점 더 나빠져만 가는 것 같았다. 끔찍해지는 세상이 나를 부정하는 것에 맞서 내가 여기에 있다고 소리 질렀는데 정작 나는 내 목소리를 듣지 않으려고 했다. 더 이상 나를 옥죌 정도의 검열 같은 건 하지 않는다고 했지만 여전히 나는 나를 의심하고 부정하고 지워왔던 것은 아닐까. 내가 내 목소리를 듣고 싶지 않았던 것은 아닐까. 내게서 도망치다 보니 어느새 나는 사라져 있었다.
내가 확실하게 존재한다는 것을 깨닫게 한 건 오직 감각이었다. 한 손에 쥔 깃대가 바람에 나부끼는 것을 느꼈고 다른 손에 쥔 피켓이 마이크의 진동과 함께 울리는 것을 느꼈다. 빌딩숲과 도로를 걸으며 코에 쌓이는 먼지를 느꼈고 이랑의 노래를 들었고 구호를 제창하는 나와 친구들의 목소리를 들었다. 그날 나는 노동자들과 함께 춤을 추었고 퀴어들과 함께 거리를 걸었고 여성들과 함께 소리질렀다. 나는 언제나 차오르는 눈물을 꾹 참으며 서 있었다. 그날 그때, 우리는 그 자리에 존재했다. 처절하게 존재했다. 그 사실을 떠올리면 내가 한낱 유령이 아니라는 것이 뚜렷하게 느껴졌다.
나는 내게 괜찮다고 말하고 싶었다. 그 말을 이렇게나 길게도 하고 싶었다. 정말 괜찮다고, 정말 괜찮을 거라고 그 믿기지 않는 사실을 속삭이고 싶었다. 세상이 순식간에 바뀌지는 않겠지만, 어쩌면 정말 더 나빠지고 있을지도 모르지만, 더디더라도 세상은 언젠가 나아질 거라고. 네 곁에 있는 친구들과 동료들이 함께해줄 거라고. 이 어지러운 세상에서 네 멀미는 잘못된 게 아니라고. 그러니 너는 계속 존재하라고. 존재하기 위해 나라도 나의 목소리를 들어야 주어야 한다고.
여전히 자신이 없다. 거대한 폭력 앞에서 꼿꼿하게 버틸 자신도, 왜 내 삶이 투쟁이어야 하냐고 억울해하지 않을 자신도 없다. 그러나 또 다른 세계가 있을 것이다. 또 다른 세계가 있거나 없을 것이다. 그 희미한 세계를 상상하며 지금 이 자리에서 끔찍함을 말할 것이다. 폭력이 얼마나 끔찍한지, 그것이 얼마나 우리 곁에 있는지, 그래서 여기 사라져가는 사람이 있다고 말할 것이다. 우리는 소문과 유령이 아니라고 말할 것이다. 나는 유령이 아니라고 말할 것이다. 상상조차 되지 않는 이상하고 아름다운 세계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결국 우리 누구도 죽지 않고 무사히 항해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