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미니스트의 헤테로 연애기

초록

by 석순

*로 인용 각주를, °로 내용 각주를 표기하였습니다.


사랑에 대한 지극히 개인적인 고찰

학창 시절 나는 연애에 일절 관심이 없었다. 학생의 연애에 대한 엄마의 색안경이 너무 심했다. 엄마는 언니를 교칙이 엄격한 여중, 여고에 보냈고, 나도 당연히 그 수순을 밟았다. 학교에서도 연애는 금기시됐다. '학생은 연애해서는 안 된다'라는 교칙이 있었던 건 아니었지만 발목까지 오는 한복 스타일의 교복, 어깨까지 오는 두발 규정, 액세서리 금지, 의무 야자 등 엄격한 교칙과 그로 인해 학교가 가지고 있던 이미지가 은근히 우리를 압박했다. 우리를 가두는 틀에 문제 의식을 갖기에 우리는 너무 어렸다. 드라마에 나오는 일진 따위는 없었고, 대부분이 착하고 교칙을 잘 따랐다. 연애를 하는 친구도 없었고, 연애를 하고 싶어 하는 친구도 없었다. 가끔 몇 반 누가 남친이 있다는 말을 들을 때면 나는 그 친구를 문제아라 생각했다. 학원에서 남학생을 마주치면 눈도 마주치지 않았다. 나는 엄마와 학교의 말을 잘 듣는 모범생으로 자랐다.


연애가 뭔지 전혀 몰랐던 점도 한몫했다. 좋아한다는 게 어떤 감정이고, 데이트하면 뭘 하는지 모르니까 연애에 호기심이 생기지 않았고, 호기심이 생기지 않으니 하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대학에 와서도 마찬가지였다. 대학 생활의 가장 큰 로망이 CC라든가 연애인 사람도 있을 텐데, 불행히도 나는 대학 생활에 대한 로망 하나 없이 덜컥 대학에 입학했다. 부모님이 모든 걸 돌봐 주던 환경에서 20년간 자란 나는 연애는커녕 일상생활을 해 나가기도 벅차 허우적거렸다. 그렇지만 비연애를 선언했다거나 연애를 할 수 없다 여긴 건 아니었다. 그저 내게 연애란 '언젠가는 하게 될 것'으로만 존재했을 뿐이다.


그러다 그를 만났다. 처음에는 짝사랑이 아닌 덕질에 가까웠다. 나는 그와 만나는 매주 목요일을 기다렸고, 신경 써서 옷을 골랐고, 그의 행동에 혼자 설렜지만, 그도 나와 같은 마음이길 바라거나 그와 사귀는 걸 상상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런 내 행동이 티가 나지 않을 리 없었고, 우리는 점점 가까워졌다. 학창 시절부터 연예인이든 선생님이든 덕질만 해왔던 나는 이제는 누군가를 향한 내 관심이 연애로 이어질 수 있다는 사실을 몰랐던 거다. 그렇게 내 감정은 덕심을 넘어서게 됐다.


연애, 막상 하니까 재밌다. 그러나 연애는 마냥 낭만적이기만 한 건 아니었다. 돈도 시간도 감정 소모도 너무 컸다. 이 모든 비용을 치르고서라도 연애하는 이유는 뭘까? 사실 이는 생각할 것도 없는 질문일 수 있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대를 사랑하기 때문일 테다. 그렇지만 나는 사랑이 뭔지 모르겠다. 내가 지금 하는 게 사랑이 맞을까?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건 뭘까? 사랑이 뭐길래 수많은 사람 중 우리 둘이 연인이란 이름으로 묶이게 된 걸까?


내가 하는 게 사랑이 맞나?

연애를 시작하고 얼마 되지 않았을 때 내가 하는 게 사랑이 맞는가 하는 질문이 끊임없이 나를 괴롭혔다. 표면적으로 우리는 사랑을 하는 게 맞았다. 여느 연인처럼 데이트하고, 스킨쉽을 하고, 서로 사랑한다고 말했으니까. 문제는 내가 계속해서 외로웠다는 거다. 연애가 처음이니 널뛰는 감정 컨트롤이 잘 안되고, 상대가 표현이 많은 스타일은 아니었던 것도 한몫했지만 그렇다기에도 지나쳤다.


사실 나는 그 전부터 생활에 어려움이 많았다. 고등학생 시절의 나는 그저 인서울 높은 대학에 가는 게 목표였다. 대학에서 어떤 활동을 하고, 졸업 후 어떻게 살아갈지에 대한 계획이 전혀 없었다. 내가 뭘 잘하는지, 나는 어떤 음악을 좋아하고 어떤 스타일의 옷을 좋아하고 취미는 무엇인지 등의 자기 이해조차 전혀 되어 있지 않았다. 물론 나와 같은 상황이더라도 입학 후 본인만의 길을 차근차근 그려 나가는 친구들도 많았다. 하지만 나는 너무 게을렀다. 유튜브를 보거나 몰려다니며 술을 마시느라 출석, 과제, 시험, 동아리 과제 등 내게 주어진 의무를 소홀히 했다.


재미는 오래가지 않았다. 자괴감이 밀려왔고, 무엇보다 인간관계에서 오는 스트레스가 너무 컸다. 그래서 2학년이 되자 칩거를 시작했다. 망한 학점을 복구해 보겠답시고 며칠 밤을 새우며 공부하기도 하고, 학업 코칭도 받아보고, 외부 활동도 지원해 보고, 알바도 해보고, 헬스도 해 봤다. 그러나 단기간의 벼락치기와 대학 시험에 맞지 않는 공부 방식 탓에 학점은 제자리걸음이었고, 지나치게 일을 벌인 탓에 어느 하나에도 집중하지 못한 채 금방 그만두기 일쑤였다. 회피와 게으름이 여전히 나를 따라다녔다. 일을 미룰 대로 미루다 항상 마감 직전에 헐레벌떡하다 보니 바쁘면서도 실속이 없었고, 후회를 되풀이했다. 이 때문에 스스로에 대한 믿음과 확신이 없었고, 나 자신이 너무 미웠다. 항상 불안하고, 공허하고, 외로웠다.


“나는 몹시 자주 외롭고 심심하고 쓸쓸하다. 밤에 끌어안고 잘 사람이 필요하다. 날 좋은 날에 같이 돗자리에 누워서 책을 읽다가 떠들 수 있는 사람도, 같이 노래를 흥얼거리다 잠들 사람도, 글을 한 줄도 못 쓰고 무기력하게 학생회관에서 나오면 안아줄 사람도 필요하다. 타인이 내 모든 욕망과 걱정과 불안을 이해해 줄 필요도, 그럴 수도 없지만, 1인분의 외로움을 넘어서는 감정 뭉텅이를 나누고 달랠 사람이 필요하다. 물리적으로, 신체적으로, 내밀하고 가까운 거리를 유지할 수 있는 관계를 원한다.” *


하루에도 몇 번씩 기분이 가라앉곤 했다. 사람이라도 만나고 다녔으면 괜찮았을 텐데, 할 일을 내팽개쳐 놓고 놀러 다녔던 과거 때문에 그러지 못했다. 그저 불쑥 올라오는 감정 뭉텅이를 받아들이는 것, 누워 자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위의 글처럼 그때 나는 진심으로 밤에 끌어안고 잘 사람이 필요했다. 누가 나를 꼭 안아 줬으면 했다. 나도 누군가를 꼭 안아주고 싶었다. 그와 연애를 결심했을 때 그를 좋아하고, 연애라는 걸 해보고 싶고, 지금 놓치면 또 다른 사람이 언제 나타나겠냐는 마음 한쪽에 그가 있으면 내 상황이 나아질 거라는 기대가 크게 자리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정말 효과가 있었다. 일상의 설렘은 기분을 환기해 줬고, 그에게 멋지게 보이고 싶어서 과제와 공부도 성실히 했다. 매일 카톡으로 일상을 공유하고, 자주 만남을 갖는 것도 도움이 됐다. 왜 진작 연애하지 않았나 후회가 될 정도였다. 그런데 오래지 않아 나는 금방 이전의 상태로 돌아갔다. 마음속에서 명명되지 못한 채 뭉쳐 있는 무거운 감정들과 그를 향한 애정을 구분하지 못했다. 가슴이 두근거리고 무언가를 막연히 원하는 감정이 올라올 때마다 그가 보고 싶은 탓이라고, 그를 만나면 해소가 될 것이라고 여겼다. 하지만 방향이 잘못되었으니, 만족은 애초에 불가능했다. 그래서 항상 그에게 서운했다. 연애하는데도 외로운 건 그가 내게 소홀하기 때문이고, 그가 내게 소홀한 건 나를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라 여겼다.


개강이 다가오자, 불안이 극에 달한 날이 있었다. 나는 긴장하거나 불안하면 방광이 예민해진다. 그날도 한 시간에 몇 번씩 화장실을 들락거렸고, 손이 떨렸고, 일에 도저히 집중할 수 없었다. 하필 저녁에 그와 약속이 있었다. 근데 약속 시간을 정하지 않은 탓에 그를 기다리게 했고, 만났을 때 그의 표정에는 짜증이 묻어 있었다. 그걸 보고 가슴이 걷잡을 수 없이 울렁거리기 시작했다. 눈물이 나려고 했다. 들키지 않으려고 식당에 갈 때 바닥을 보면서 걸었고, 자리에 앉아서도 손바닥으로 한쪽 얼굴을 가렸다. 그렇게 잠깐의 만남을 갖고 그와 헤어져야 했을 때 조금 진정됐던 마음은 또다시 울렁거렸다. 나는 수업 시간이 5분도 채 남지 않은 그를 안고 가지 말라며 울었다. 흔히 헤어지기 전 장난식으로 수업 빠지고 나랑 놀러 가자고 말할 때도 있었지만, 그때는 달랐다. 그가 가야 한다는 걸 알면서, 막상 그와 뭘 하고 싶은 것도 아니면서 그가 가지 않기를 바랐다.


지금 돌이켜보면 내가 두려웠던 건 그날 그를 더 못 본다는 사실이 아니라 그를 보내고 아무도 없는 방에 혼자 돌아가야 한다는 사실이었다. 집에 들어오자마자 바닥에 드러누워 유튜브를 볼 거라는 사실. 샤워를 겨우 해치운 후 다시 웅크리고 누워 유튜브를 보다 잠들게 될 거라는 사실. 결국 미뤄둔 할 일, 체계 없는 생활, 도파민 중독, 개강에 대한 불만과 불안이 한데 뭉쳐 과민성 방광의 형태로 나타나고 나조차도 내 감정을 통제하지 못하는 상태가 된 거다. 그런데도 나는 내 마음을 들여다보는 대신 불안한 만큼 그에게 매달렸다. 현실을 마주하기를 피하고, 그에게로 도망쳤다. 그렇다면 내가 하는 게 사랑이 맞나? 혹자는 이 또한 사랑이라고 할 테다. 미숙하고 서투른 나이의 사랑이라고. 정말 그런가? 이것도 사랑이라고 할 수 있을까? 사랑이란 대체 뭘까?


* 소랑(2020b), <로맨스에서 살아남기>, ⟪석순⟫, 55: 98.


사랑이란 뭘까?

우리는 상대를 사랑하기 때문에 연애한다. 이때 사랑한다는 건 뭘까? 연인 간의 사랑을 감정과 행위로 구분해 생각해 봤다. 우선 감정을 보자. 상대와 만나는 날을 기다리고, 상대를 보며 설레고, 상대의 말과 행동, 표정을 머릿속에서 거듭 재생할 때 우리는 이를 사랑이라 말한다. 그러나 사랑의 감정은 이처럼 마냥 아기자기하기만 한 건 아니다.


연애 초반 나는 하루 종일 카톡 알림만 쳐다보며 살았다. 다른 일에 전혀 집중할 수가 없었다. 조금이라도 답장에 텀이 생기면 힘이 빠지면서 화가 났다. 한번은 너무 힘들어서 카톡 알림 설정을 끄고 하루 넘게 일부러 답하지 않기도 했다. 그의 답장 하나에 수시로 오르락내리락하는 과잉된 감정이 혼란스러웠다. 분명 그를 좋아했지만, 점차 그를 향한 마음이 사랑인지 집착인지 구분할 수 없게 됐다.


상대를 너무 좋아하는 감정은 과잉되어 집착으로 이어질 수 있다. 집착을 사랑으로 착각하는 경우도 있을 테다. 물론 집착 없는 사랑은 없겠지만, 집착은 사랑이 될 수 없다. 본인이 느끼는 감정이 '사랑'이라고 확신할 수 있나? 누군가는 이기적이고 삭막한 사회에서 아무런 이해관계 없이 상대가 슬플 때 함께 슬퍼하고, 상대의 행복을 진심으로 바라는 건 오직 상대를 사랑하기 때문에 가능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건 꼭 연인 간에만 가능한 건 아니다.


그다음으로는 행위를 보자. 우리는 연인과 밥을 먹고, 카페를 가고, 매일 카톡으로 연락한다. 친구와 크게 다를 바가 없다. 그렇다면 연인을 연인으로 만들어주는 지점은 무엇일까? 남친과 친한 형의 관계는 이러한 의문을 더욱 증폭시켰다. 남친에게는 한 살 위의 아주 친한 형이 있다. 남친은 그와 일주일에 두 번 같은 곳에서 일하고, 일주일에 세 번 운동하고, 거의 매일 밤 만나 아이스크림을 먹는 것으로 하루를 마무리한다. 가끔은 둘이 공연을 보거나 분위기 좋은 카페에 가기도 한다. 남친은 그와 성격이나 취향, 직업, 종교관까지 너무나 잘 맞다며 자신이 여자거나 형이 여자였다면 사귀었을 것이라 말하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이에 대해 내가 불평할 때마다 그는 자신과 형은 '둘 다 (헤테로) 남자'이지 않냐며 귀찮은 듯 넘겨 버리곤 했다.


남친이 여친인 나보다 더 많은 시간을 보내는 상대. 만남만 보면 여느 연인과 다를 바가 없다. 그럼에도 나는 그의 연인으로, 형은 그저 친구로 선 그어지는 이유는 바로 스킨쉽이었다. 그가 형과 손을 잡거나 안거나 입을 맞추거나 섹스를 하지 않기 때문이다. 더 정확히는 그가 형에게 성적 충동, 성적 흥분을 느끼지 않기 때문이다. 섹스 여부가 상대가 친구인지 연인인지를 가르는 가장 핵심적 기준이 된다는 논리다. 실제로 상대를 좋아하는지 헷갈릴 때 상대와 스킨쉽을 할 수 있는지로 판단해 보라는 말도 있다. 즉, 연인은 섹스할 수 있고, 섹스를 하는 상대다. 그렇다면 연애는 곧 섹스인 걸까? 그러나 사랑 없는 섹스, 섹스 없는 사랑 또한 분명히 존재하지 않나.


연인을 향한 감정에 ‘사랑’만 있는 게 아니고, 연인에게만 갖는 감정, 연인하고만 하는 행위는 없다. 그렇다면 연애에 있어서 사랑이란 대체 뭐란 말인가? 문제는 내가 연인 간의 사랑이 다른 관계와 구분된 순수한 감정 상태와 행위라고 생각한 데 있었다. 가족, 친구, 썸, 연인, 덕질 대상 등의 관계에서 느끼는 감정과 행위는 모두 중첩되어 있다. 우리는 연인에 대해 부모나 형/누나처럼 잔소리하고, 보호해 주고자 하는 욕구를 갖는다. 그러면서도 동생이나 어린아이가 된 것처럼 애교를 부리기도 한다. 친구처럼 허물없이 지내고 어떨 때는 경쟁의식을 느끼다가도 상대에게 설레고 자신이 매력적인 대상이었으면 하는 바람에서 자신을 가꾼다. 또, 자신이 상대에게 유일하고 특별한 대상이기를 욕망하며 상대와 가까운 이를 질투하거나 상대에게 소유욕을 느끼기도 한다. 이렇듯 보호하거나 보호받고자 하는 욕구, 우정이나 경쟁, 설렘, 집착, 소유욕과 같은 감정은 성적 욕망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그러니 "연애는 곧 섹스"라는 말은 틀렸다. 섹스는 연애의 한 부분일 뿐이지 충분조건도, 필요조건도 아닌 것이다.


이러한 관계의 중첩성은 각각의 관계에서 사랑을 지칭하는 이름이 따로 존재하지 않는 이유이기도 하다. 관계는 달라도 사랑은 모두 그저 ‘사랑’으로 호명된다. 가족 간의 사랑도 그저 사랑이라 불린다. 연인 간의 사랑을 ‘이성애’, ‘동성애’ 등과 같이 섹슈얼리티로 구분해 명명하긴 하지만, 이는 ‘이성 간의 사랑’, ‘동성 간의 사랑’이란 의미에 그친다. 덕질 대상을 향한 사랑을 지칭하는 ‘덕심’이란 단어도 그저 ‘덕질 대상을 향한 마음’이란 의미에 불과하다. 단지 친구 간의 사랑에만 '우정'이라는 이름이 붙을 뿐이다.




페미니스트의 헤테로 연애기

사랑에 대해 내 나름 정의를 내리고 보니 그의 연락에 집착한 것도, 우울에서 벗어나기 위한 방편에서 그와 연애를 시작한 것도, 감정을 통제하지 못하고 그에게 정서적으로 매달린 것도 사랑이라는 결론에 이르렀다. 이제 나는 더 이상 그를 향한 내 사랑의 진정성을 의심하지 않는다. 요즘은 과잉된 감정으로 힘들어하는 일이 크게 줄었다. 그러나 한편으로 그와 연애하는 데 있어 여전히 불편한 지점이 존재한다. 페미니스트로서 말이다. 여기서는 페미니스트의 헤테로 연애에 관해 얘기해 볼까 한다.


데이트 비용

그는 이미 학교를 졸업한 직장인이고, 나는 용돈을 받는 학생이다 보니 데이트 비용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해 고민이 많았다. 처음 연애를 시작했을 때는 무조건 번갈아 가면서 내겠노라 다짐했었다. 한쪽이 돈을 더 내는 순간 위계가 발생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물론 연인 관계에서 여유가 있는 사람이 더 많이 부담하는 건 자연스럽고 고마운 일이다. 그러나 전업주부로 독박 육아와 독박 가사를 감당해야 했던 엄마가 경제력이 없어서 이혼하지 못하는 걸 보고 자란 내게는 상대의 경제력에 기대는 것에 대한 거부감이 단단히 뿌리 박혀 있었다. 그래서 처음에는 한쪽이 밥을 계산하면, 다른 한쪽이 카페를 계산하는 식으로 번갈아서 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번갈아 계산한다고 해서 동등한 건 아니었다. 밥값과 카페값의 차이가 컸기 때문이다. 식당에서 메뉴 2~3개에 음료까지 시키면 3만 원은 우습게 넘겼지만, 카페는 1만 원 선에서 해결이 됐다. 게다가 점심 때 만나 카페에 갔다가 저녁까지 먹는 날이면 한 사람이 밥값을 두 번 계산해야 한다는 문제도 있었다. 그렇다고 카페를 계산한 사람이 저녁을 계산하는 식으로 둘이 쓴 액수를 비슷하게 맞추자니 속으로 계속 계산기를 두들겨야 했다. 이익을 보려는 건 아니지만 손해도 안 보려는 심리 같아서 썩 유쾌하지 않았다.


게다가 상대는 내가 학생이지 않냐며 자신이 더 계산하려고 했다. 불행히도 내게는 상대의 성의를 무시한다는 느낌을 주지 않으면서 내가 유쾌하게 계산해 버리는 센스가 없었다. 어느 순간부터 밥값 계산은 눈치 게임이 돼 버렸다. 밥을 먹을 때마다 이번에는 내가 사야 하는데 싶어 눈치를 봤고, 그가 사겠다고 하면 실랑이하고 싶지 않아 우물쭈물 그러라고 했다. 그러고는 상대가 계산하는 동안 카운터 옆에 불편하게 서 있었다.


이미 상대가 계산한 김에 웃으면서 잘 먹었노라고, 다음에는 내가 사겠다고 말 한마디 건네면 되는데 나는 그렇게 할 줄도 몰랐다. 내가 별다른 반응이 없으니, 상대도 기분이 좋지 않을 것 같았다. 상대가 내가 이를 당연하게 여긴다고 오해할까 걱정이 됐다.


주위에는 커플이 몇 없었고, 그마저도 학생 커플이어서 조언을 구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인터넷에서 정보를 찾았는데, 직장인-학생 커플의 경우 직장인이 돈을 더 부담하는 게 당연하다는 반응이 지배적이었다. 그건 어느 정도 수긍이 갔다. 그런데 원래 남성이 데이트 비용의 대부분을 부담했고, 여전히 남성이 조금이라도 더 부담해야 한다는 인식이 보편적이라는 사실을 알고 충격을 받았다. 심지어 같은 학생 커플끼리도 말이다. 당황스러웠다. 이것으로 여성이 잃은 것은 무엇일까? 이는 마치 남성이 데이트를 위해 대가를 지불한 것처럼 느껴진다. 남성은 대가를 치렀으니, 여성이 자신의 맘에 들도록 화장하고, 신경 써서 입고, 육체관계를 요구할 때마다 응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이 사실을 알고 더 이상 그에게 얻어먹고 싶지 않았다. 내가 정말 어려운 상황이면 모를까, 내게도 충분한 돈이 있었다. 그래서 그에게 더치페이를 제안했다. 그런데 그는 몇 번 하더니 너무 개인주의적이라며 차라리 데이트 통장을 만들자고 했다. 사실 그가 전에도 데이트 통장 얘기를 꺼낸 적이 있었는데, 깊이 생각해 보지 않고 거절했었다. 그러나 더 이상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그렇게 우리는 데이트 통장을 만들었고, 지금은 왜 진작 만들지 않았나 싶을 정도로 너무 만족한다.


‘여성성’ 그리고 ‘남성성’

흔히 ‘남성성’은 큰 키, 넓은 어깨, 근육 등의 신체적 요소와 박력, 책임감, 단순함, 어른스러움 등을 포함한다. 또한 ‘여성성’에는 작은 키, 마르고 굴곡진 몸매 등의 신체적 요소와 수줍음, 순수함 등이 있겠다. 페미니스트라는 정체성 때문도 있겠지만, 타고난 기질과 남성이 부재했던 성장 배경 탓에 내겐 ‘여성적’이고 ‘남성적’인 말과 행동에 대한 강한 거부감이 있었다.


원래부터 나는 근육질 몸매를 보고 멋있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설레는 XX 모음집'이라는 제목의 드라마 영상을 봐도 설렘보다 오글거림이 컸다. 정확히 사회에서 규정한 ‘남성’의 외관을 하고 여성이 설렐 법한 행동을 하니 별 감흥이 없었다. 오프라인에서도 누군가 힘 자랑을 하거나 무심하게 반응하는 등 '남자답게' 행동하는 모습을 보면 가소롭기만 했다. 나 자신도 '여성스럽다’고 여겨지는 말이나 행동을 하지 않으려고 의식했다.


그런 내가 막상 연애하고 보니 상대의 ‘남성스러운’ 모습에 설레고 있었다. 처음 그에게 설렜던 이유도 키가 크고 체격이 좋아서였다. 그와 말도 몇 마디 섞어보지 않았는데 말이다. 더 당황스러웠던 건 그를 만날 때 내가 의식적으로 그에게 ‘여성스럽게’ 보이려고 한다는 점이었다. 그의 앞에서 일부러 적게 먹었고, 노출이 있는 옷을 입어서 신체의 특정 부위를 강조했고, 체력이 약한 척을 했고, 애교를 부렸다. 어떨 때는 행동이 의식보다 앞설 때도 있었다. 가령 그의 친구와 함께 만난 자리에서 일부러 그에게 더 애교스럽게 행동하고 난 뒤 나중에 왜 그랬지, 하는 식으로.


물론 상대를 볼 때 일차적으로 외모가 보일 수밖에 없고, 상대의 신체에 매력을 느끼는 건 어느 정도 본능의 영역일지도 모른다. 또한 ‘여성스러워’ 보이고자 한 내 행동은 상대에게 매력적으로 보이고 싶은 마음에서 비롯했을 테니, 무턱대고 스스로를 비난하지 않겠다. 그러나 나는 단순히 ‘남성적’이라는 이유로 그를 좋아하는 게 아니다. 또 나는 ‘여성스럽다’는 이유로 상대가 나를 매력적이라 생각하길 원하지 않는다. 그런데도 무의식적으로 학습된 젠더 규범이 나로 하여금 상대의 ‘남성성’을 확대해서 보고, 상대 앞에서 ‘여성스럽게’ 행동하도록 만들고 있었다.


상대에게 매력적으로 보이고자 하는데 왜 ‘여성스럽게’ 행동한다는 말인가? 여성의 매력은 ‘여성성’에서 오는가? 아니다. 그렇지만 내가 완전히 ‘여성성’에서 벗어났을 때도 과연 상대가 여전히 내게 매력을 느낄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확신이 없다.


섹스

연애를 시작하기 전까지 나는 내가 ‘여성’임을 인지하지 않고 살았다. 나는 내게 그저 '나'였다. 그러나 상대는 나를 '여성'으로 보고 있었다. 내가 누군가의 성적 욕망의 대상이 된다니, 생각지도 못했다. 그래서 그와의 스킨십이 마냥 좋지만은 않았다. 나에 대한 애정 표현이라는 생각에 기분이 좋다가도 '대체 내 어디를 보고 저러지'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어색하고 불편했다. 여기에는 외모에 자신이 없는 것도 한몫했다.


내 몸은 남자들이 좋아하는 몸이 아닌데. 가슴은 없고 다리는 짧고 살도 많은데. 게다가 이쁘지도 않고. 키 작고, 안경까지 써서 영락없이 초딩인데. 근데 왜 그러지. 전 여친들은 나보다 이뻤을까? 가슴이 컸을까? 당연히 나보다 날씬했겠지? 더 여성스러웠겠지? 대체 내 어디가 좋다는 거야.
...그냥 섹스가 하고 싶어서 그러나. 욕구를 풀고 싶으니, 썩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나랑 사귀는 건가.


섹스할 때 그가 보인 태도는 이런 생각들에 더욱 힘을 실어주었다. 우리는 주로 집에서 함께 요리하거나 음식을 시켜 먹었다. 그렇게 배를 채우고 나면, 다음 순서는 섹스였다. 그는 밥을 먹은 뒤 같이 대화하다가 영화를 보다가 혹은 누워있다가 불쑥 입을 맞춰왔다. 우리의 섹스는 은근한 눈빛도 손짓도 묘한 분위기도 없이, 항상 그렇게 난데없이 시작됐다. 방금까지 밥을 먹었는데 갑자기 섹스를 하자니? 지극히 일상적 상황에서부터 성적 흥분 상태로의 급격한 감정 전환이 당황스러웠지만 거부하지는 않았다.


이런 일이 반복되다 보니 집에서 만나는 날은 암묵적으로 섹스하는 날이 됐다. 낮에 잠깐 만나고 헤어지는 날에도 섹스를 했다. 같이 자는 날은 더욱 그랬다. 샤워하고 잠옷으로 갈아입고 그가 누워있는 침대로 들어갈 때 우리가 곧 섹스할 거란 사실을 나도 알고, 그도 안다. 그렇지만 둘 중 누구도 티를 내지 않은 채 나란히 누워 잘 자라는 인사를 나눈다. 그리고 몇 초 뒤, 그가 불쑥 입을 맞춰 오는 거다. 그날 밤에 못 하면 다음 날 아침에라도 하고 헤어졌다.


그러나 그렇게 시작한 섹스는 금방 끝났다. 애초에 성적 텐션이 없는 데다 전희가 너무 짧아서 나는 한 번도 흥분하지 못했지만, 그의 사정과 동시에 섹스는 끝이 났다. 우리의 섹스는 둘이 하는 그의 마스터베이션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데도 나는 좋은 척 연기했다. 아니, 웃기게도 무의식적으로 포르노에서 본 여자를 따라 했다. 그러면서 내가 못 느끼는 건 순전히 내 문제라고 생각했다. 처음에는 내 몸에 아무런 변화가 없는 걸 보고 이상하게 여기던 그도 정말 연기에 속은 건지, 모르는 체 하기로 한 건지 모르겠으나 더 이상 말을 꺼내지 않았다. 그리고 섹스가 끝나면 내가 아무리 자지 말라고 해도 피곤하다며 금세 곯아떨어졌다.


집 밖에서 데이트할 때면 우리는 밥을 먹고 카페에 갔는데, 카페에서는 마주 보고 얘기하는 대신 영화나 유튜브를 봤다. 일주일에 많으면 두 번, 그것도 한 번에 한두 시간 겨우 만나는데도. 이게 뭐란 말인가. 우리가 서로를 잘 안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가 나에 대해 더 알아가고 싶은지에 대해서도 확신이 없었다. 그가 나랑 자려고 만나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머릿속에서 점점 몸집을 불려 갔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그가 나를 정말 좋아해서 그러는 거란 희망도 단단히 붙잡고 있었다. 그가 나를 단지 성욕 해소의 수단으로만 여기는 건지, 나를 사랑해서 그러는 건지는 어떻게 구분한단 말인가? 아니 그게 분리가 될 수 있나?


성적 대상화

누스바움은 《objectification》(1995)에서 여성에 대한 성적 대상화에 대해 “대상화는 본질적으로 윤리적 문제를 함축하는가?”*라는 문제를 제기한다. 그에 따르면 어떤 측면에서 대상화는 도덕적으로 문제적이지만, 어떤 측면에서는 ‘긍정적 대상화’ 또한 가능하다.


그는 대상화의 핵심이 수단화에 있다고 봤다. “우리가 누군가를 대상화해서는 안 된다고 말할 때, 우리는 ‘인격을 사물과 같은 한낱 수단(도구)으로 간주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그는 수단화 역시 언제나 부정적 대상화를 초래하는 건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는 “성적 욕망의 수단이 되는 것이 왜 인간으로서의 지위를 박탈당하는 일이 되는지”* 의문을 제기한다. 그에게 문제가 되는 것은 단지 ‘수단화’가 아니다. 문제는 그러한 수단화가 이루어지는 ‘맥락’이다.


누스바움은 “평등, 존중 그리고 상호동의의 맥락 내에서, 대상화는 더 이상 문제적인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이는 “인간성을 결코 단지 수단으로 사용하지 않고 언제나 동시에 목적으로 사용하도록 행하라”는 칸트 윤리학의 '인간성 정식'을 기초로 한다. 누스바움은 사랑의 관계에서 상대방은 때때로 성적 욕망의 대상이 되지만, 이는 '상대방을 인격적으로 존중하는 더 큰 맥락'에서 '일시적'으로 이루어질 뿐 일종의 '전환'을 통해 상대방은 다시금 인격으로 대우받게 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렇듯 ‘긍정적 성적 대상화’의 가능성을 말하는 누스바움의 주장은 한계를 갖는다. 전환에 의한 주체성 회복이 상대의 선의에 달려있기 때문이다. 내가 대상성에서 벗어나 다시금 주체성을 되찾는 일은 상대의 변덕에 좌우된다. "인격의 주체성이 임의성에 던져지"*는 것이다. 칸트가 주장했듯 '수단화'와 '인격적 존중'이 '동시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다소간의 시간적 간격을 두고 행해진다는 점도 문제적이다. '일반적으로' 인격적인 존중이 이루어질 때 '일시적인' 수단화가 정당화될 수 있다면, 이러한 틈은 관계 내에 폭력이 침입할 여지가 된다.


그렇다면 여성은 언제나 성적 수단으로만 대해질 수밖에 없는 것일까? 대상화의 본래적 한계를 지적하는 사르트르의 주장은 여성이 성적 대상으로 다뤄지는 중에도 주체로서 존속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준다. 사르트르에 따르면 시선의 투쟁°에 있어서 타자가 주체일 때 나는 상대에게 오로지 대상이고, 내가 주체일 때 타자는 내게 오로지 대상일 뿐이다. 그러나 그 둘 각각은 여전히 스스로에게 있어서는 주체다. 주체로서 나의 의식에 타자가 대상으로 주어질 때, 비록 나에게 포착되지 않을지라도 언제나 대상의 눈은 주체의 시선을 지닌다. “타자의 ‘타자성’, 즉 그가 나와 독립된 자발적이고 의식적 주체라는 사실은 내가 타자를 대상화하는 가운데서도 끝내 존속하는 타자의 본성인 것이다."* “어떤 방식으로도 타자는 대상으로서 우리에게 주어지는 일이 없다.”*


그럼에도 성적 대상화는 여전히 문제적이다. 현실에서는 대상화가 양방향적으로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대상화가 이루어지는 방향을 결정지음으로써 조작적으로 역전 불가능한 구도를 만들어내는 권력관계"*가 현실에 존재한다. 여성의 몸은 남성에게 그 자체로 성적 의미로 받아들여지며, 남성에 의해 성적으로 분해되고 확대되고 재구성되고 판매되고 오락으로 소비된다. 최근의 딥페이크 성범죄가 그 단적인 예시다. 이러한 현실에서 여성은 이에 저항할 수 없고, 그 역전 또한 불가능해보인다. 여성은 오로지 성적 대상일 뿐, 주체가 되지 못한다.


연인 관계에서도 성적 대상화는 피할 수 없다.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든 둘 간의 성관계에 남성 중심의 왜곡된 성 관념이 개입하기 때문이다. 남성에게는 자신이 원할 때마다 여자친구에게 관계를 요구하는 일이 당연하다. 여자친구는 자신의 ‘소유’이기 때문이다. 남성은 욕구를 적극적으로 드러냄으로써 자신의 ‘남성성’을 과시한다. 이때 오직 남성의 욕망과 이를 실현할 대상으로서 여성의 신체만 존재할 뿐, 여성의 의사는 무시된다. 섹스 중에도 여성의 상태나 감정은 전혀 고려되지 않는데, 이를 두고 남성이 특별히 여성을 존중하지 않아서라고 보기는 어렵다. 여성이 남성이 행위하는 족족 느끼고 반응하며 남성의 사정과 동시에 오르가슴에 도달하는 남성 중심적 포르노를 보고 자란 남성들은 그들의 여자친구 또한 당연히 그럴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들은 여성이 진정 만족하고 쾌락을 느꼈는지에 대해 신경 쓸 생각 자체를 하지 못한다.


여성은 남성이 성관계를 요구해 올 때 내키지 않더라도 상대의 기분을 상하게 할까 봐 거절하지 못한다. 또한 여성들이 학습한 수동성은 섹스 과정에서 주도적으로 그들의 만족을 추구하지 못하도록 가로막는다. 본인이 쾌락을 느끼기 위해 스스로 움직이거나 남성에게 직접적으로 요구하는 건 '조신하지 않기' 때문이다. 여성들은 성적 흥분을 가장하기도 하는데, 이는 남성을 위한 배려로서 의식적으로 이루어지기도 하지만 무의식적으로 이루어지기도 한다. 자신도 모르게 포르노 속 여성을 흉내 내는 것이다. 섹스 후 여성은 아무런 만족도 쾌락도 얻지 못했을지라도 남성의 사랑을 확인받고, 자신이 남성을 만족시켜 줬다는 사실을 위안으로 삼는다.


연인 간의 섹스에서도 여전히 여성은 존재하지 않는다. 즉, 비록 그에게 그럴 의도가 없었다고 할지라도 그에게 내가 그의 만족을 위한 성적 도구에 불과했다는 건 씁쓸하지만 사실인 것이다.


* 이솔(2023), <사르트르 철학에서 '대상화(objectification)'의 문제: 누스바움의 대상화 이론에 관한 비판>, ⟪현상학과 현대철학⟫, 제99집, 143.

* 이솔(2023), 위의 글, 148.

* 이솔(2023), 위의 글, 150.

* 이솔(2023), 위의 글, 151.

* 이솔(2023), 위의 글, 161.

° 사르트르에 따르면 우리는 늘 어떤 방식으로든 타인의 시선 앞에 대상으로 노출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대타 관계(나-타인)에서는 영원한 주체도, 영원한 대상도 없다. 타인에 의해 대상화 된 내가 다시금 타인을 내 시선의 대상으로 만들기 때문이다. 이처럼 주체와 대상의 관계는 끊임없이 역전된다. 이와 같이 주체와 타자가 끊임없이 서로를 대상화하며 주체로서의 지위를 유지하고자 하는 과정을 사르트르는 '시선의 투쟁'이라 명명한다.

* 이솔(2023), 위의 글, 165.

* 이솔(2023), 위의 글, 164.

* 이솔(2023), 위의 글, 167.


페미니즘

그가 내가 페미니스트여도 상관없다고 말했을 때 나는 너무나 기뻤다. 그리고 그가 페미니즘을 어느 정도는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최소한 여성이 남성 중심적 사회 구조 속에서 고통받고 있다는 데 대해서만큼은 동의하는 줄 알았다. 그에게 석순을 보여주었을 때 우리 사이에 꽤 진지한 대화가 오갔기에 더욱 그렇게 믿었다.


그러나 이런 내 믿음은 어느 날 밤의 통화로 한 번에 무너졌다. 그의 말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그는 구조적으로 여성들에게 가해지는 차별, 반복되는 성 착취와 여성 혐오 범죄, 그리고 여성들이 느끼는 일상적이고 만연한 공포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의 말은 듣는 것만으로도 괴로웠다. 내가 지금까지 성차별적이고 폭력적이라고 비난해 왔던 말들을 그에게서 듣고 있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었다. 그제야 내가 페미니스트여도 상관없다던 그의 말의 진짜 뜻을 이해했다. 그건 내가 ‘예민하게’ 굴든 말든, 그런 일은 자신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말이었다. 무력감이 몸 전체를 짓눌렀다.


우리의 생각이 이렇게나 다른 걸 알게 된 이상, 이 사실을 덮어둔 채 아무렇지 않게 그의 얼굴을 마주할 자신이 없었다. 그러자 그는 자신이 잘 알지 못해 그렇다며 정확한 근거를 가지고 설명을 해주면 자기 생각을 바꿀 수 있다고 말했다. 이 또한 황당했다. 내가 대체 왜 여성들이 당한 피해를 나열해 가면서 그에게 여성들이 고통받고 있는 현실을 제발 알아달라고 구걸해야 한단 말인가. 애초에 완전히 무감각한 사람을 내가 대체 어디서부터 어떻게 이해시켜야 하나. 내가 설명해 준다고 한들, 그의 생각을 바꾸는 것이 가능한가. 그 전에, 그에게 정말로 바뀔 의지가 있긴 할까.


다음날 그와 약속이 있었다. 여전히 혼란스러운 마음으로 그를 마주했다. 나를 바라보는 그의 시선이, 내 손을 잡아 오는 그의 손이 이전만큼 편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우리는 평소와 다름없이 마주 보고 밥을 먹고, 일상을 나누고, 농담을 주고받으며 웃었다. 나도 이런 내가 혼란스럽다. 이 글을 쓰면서 그가 육체적 관계를 위해 나를 만난다는 생각이 더욱 확실해졌고, 그날 밤 그의 말들은 내게 너무나 큰 실망감을 안겨 주었다. 그런데도, 나는 여전히 그가 좋다.


그래서 그를 믿기로 했다. 그의 말들이 단지 페미니즘에 대한 몰이해에서 비롯된 것이라 믿는다. 나 또한 알았다면 절대 하지 않았을 생각과 말과 행동이 얼마나 많은가. 내 말이 끝난 후의 그의 침묵을 믿는다. 그건 내 말이 조금이나마 그에게 와닿았기 때문일 테니. 설명과 이해를 통해 바뀔 수 있다는 그의 말을 믿는다. 내가 아는 그는 지금까지 그래왔으므로. 그리하여 언젠가는 그가 여성들의 분노에 공감할 수 있으리라 믿는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우리의 관계 또한 평등해질 수 있으리라 믿는다.


독자들이 이런 나를 비난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계속해서 페미니즘이 설 자리를 잃어가고 있는 와중에도 페미니스트들이 포기하지 않고 연대를 이어가는 이유는 언젠가는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믿음이 있기 때문이 아니던가. 그러니 그를 여전히 사랑하기로 한 나를 너무 미워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리고 그 또한 너무 미워하지 않길 바란다.




지금까지 페미니스트로서 헤테로 연애를 하면서 가진 질문들에 대해 내 나름의 답을 내려봤다. 그러나 여전히 답하지 못한 질문들이 많이 남아있다. 어떻게 하면 ‘남성성’과 ‘여성성’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을까? 내가 더 이상 ‘여성스럽지’ 않아도 연애할 수 있을까? 그런 연애는 어떤 모습일까? 어떻게 하면 둘 다 동등한 주체로서 관계를 맺을 수 있을까? 앞으로 이런 질문들에도 하나씩 답을 내릴 수 있었으면 한다.



참고문헌

<단행본>

김종갑(2014). 《성과 인간에 관한 책》. 서울: 다른.

<논문>

이솔(2023). 〈사르트르 철학에서 ‘대상화(objectification)’의 문제: 누스바움의 대상화 이론에 관한 비판〉. 《현상학과 현대철학》. 제99집.

<기타>

소랑(2020b). 〈로맨스에서 살아남기〉. 《석순》. 55: 94-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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