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자보
지난 8월, 인하대학교에서 딥페이크 성착취물을 제작・유포하는 단체 채팅방이 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인하대학교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고려대에도 ‘겹지방’이 있으며, 여타 대학과 군대, 그리고 중고등학교에서도 딥페이크 성착취물이 유포되고 있었다.
딥페이크 디지털 성범죄는 AI를 이용한 딥페이크라는 ‘새로운’ 기술의 등장으로 발생한 사건이 아니다. 디지털 성범죄는 디지털 기술과 함께 계속해서 존재해왔다. 1990년대에는 청소년 성착취물 비디오가, 2000년대에는 소라넷을 비롯한 웹하드 카르텔이, 2010년대에는 단톡방 성폭력과 버닝썬 성범죄가, 2020년에는 웹하드 카르텔을 기반으로 한 N번방 성범죄가 있었다. 딥페이크 성폭력은 기술만의 문제가 아니다. 문제는 강간문화에 있다.
강간문화는 남성은 넘쳐나는 성욕을 제어하지 못하는 존재로, 여성은 피해자가 되지 않기 위해 스스로 처신을 잘 해야 하는 존재로 규정한다. 이러한 성역할의 위계에 따라 강간은 성폭력이 아닌 ‘거친 성관계’로 이해되거나 연인 사이에서 일어나는 ‘사적인 일’로 치부되고, 딥페이크를 이용한 성착취물 합성은 ‘성욕을 제어하지 못한 남성의 단순한 성욕 해소’로 왜곡된다. 여성혐오에 기초한 권력관계는 미디어와 대중문화의 재현을 타고 강간을 하나의 ‘문화’로 만들었다.
강간문화에 일조하는 것은 그뿐만이 아니다. 정부는 강간문화를, 디지털 성폭력을 방관해왔다. 텔레그램을 통해 공유된 딥페이크 성착취물에 대해 정부는 “텔레그램이 국외 사이트라 수사가 어렵다”라는 입장만을 내놓았다. 소라넷, 웹하드 카르텔, 그리고 N번방 디지털 성폭력 사건 때에도 정부는 똑같은 말을 반복하며 책임을 회피할 뿐 적극적인 문제해결에 나서지 않았다. N번방 성범죄 사건 이후 마련된 법안은 보여주기식에 지나지 않았다. 2024년 현재, 우리는 여전히 디지털 성폭력을 목격한다. 끊이지 않는 사건 속에서 국가가 그 역할과 책임을 다하지 않고 있음을, 여성혐오와 강간문화에 침묵하고 가세한 결과가 지금의 딥페이크 성폭력임을, 정부는 직시해야 한다.
디지털 성폭력을 암묵적으로 용인하는 정부에 힘입어 기업은 강간문화를 이용해 돈을 번다. 이용자수와 광고 수익 등으로 이들에게 성착취물은 수익성 있는 사업이 되었다. 텔레그램을 비롯한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 플랫폼은 성착취적이고 폭력적인 게시글을 제지하지 않는다. 도리어 이에 문제를 제기하는 댓글과 게시글을 삭제하고, 계정을 정지시킨다. 지난 달 에브리타임은 피해자를 조롱하는 글에 달린 ‘피해자 조롱도 성희롱이다’라는 댓글을 삭제하고 댓글을 쓴 계정을 정지시켜다. 플랫폼은 디지털 성폭력의 제삼자가 아니다. 강간문화와 폭력범죄를 수익구조 속에 은폐하는 적극적인 가담자이다.
성폭력에 대한 정부와 기업의 침묵과 방관은 결코 소극적인 태도가 아니다. 이는 명백한 폭력이다. 그밖에 딥페이크 성폭력 사건 속에 여성들의 고통을 ‘별 것 아닌 일’로 치부하는 태도는 두말할 것 없이 2차 가해다.
“사건을 너무 과대포장해 쓸데없는 두려움을 불러일으키도록 하지 마라”
“무고한 남성을 잠재적 가해자로 몰아가는 것도 억울하다”
“사진을 내리는 건 과민 반응하는 것 아니냐”
여성혐오를 기반으로 한 강간문화는 여성들의 피해사실을 축소한다. 여성의 고통과 불안은 예민함과 불편함이라는 말 아래 흐려진다. 여성혐오는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기보다 자신의 억울함을 앞세우게 만든다. 성폭력이 사회구조적 문제가 아니라 개인의 ‘실수’일 뿐이라고 말한다. 여성혐오는 지금 여기에 고통받고 있는 여성들이 있다는 사실을 지운다.
페미니즘은 더 이상 침묵과 방관을 용인하지 않는다. 우리는 여성들이 너무 예민하거나 과민 반응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강간문화를 바탕으로 이어진 디지털 성폭력으로 죽어가는 여성들이 있다고 말한다. 우리는 잠재적 가해자라는 말을 방패 삼아 문제의 본질을 외면하는 무책임한 태도를 비판한다. 우리는 지금 여기, 고통받고 있는 여성들이 존재한다고 말한다.
디지털 성폭력의 뿌리가 강간문화에 있다는 사실을 도외시하고 국가로서의 역할을 잊은 정부는 우리의 목소리를 들어라. 성착취물로 이익을 좇기에만 급급한 기업은 우리의 목소리를 들어라.
그리고 마지막으로, 고려대 학우들은 들어라. 건강한 학생 사회와 학내 공론장을 형성해야 할 책임은 우리에게 있다. 익숙해지지 마라. 성폭력의 핵심을 마주하라. 함께 목소리를 내고, 행동하라. 그리고 변화를 함께 목격하라.
2024년 9월 23일
고려대 여학생위원회
고려대 여성주의 교지편집위원회 석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