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왜 계속 연대를 할까?

백유

by 석순

*로 인용 각주를, °로 내용 각주를 표기하였습니다.


2024년의 12월은 악몽의 연속이었다. 친구들과 같은 의제에 분노하고, 함께 거리로 나섰다. 오랜만에 친구들과 정치 이야기를 했다. 언제나 은은히 하곤 했지만, 늘 일상에 밀려 그저 그렇게 사라지던 이야기였다. 이야기를 나누던 도중 한 친구가 말했다. “굳이 이기지도 못할 싸움을 해야 해?” 순간 말문이 막혔다. 그때 어떻게 답했더라. 그냥 웃어넘겼던 것 같다. 3개월이 지나가는데도 잊을 수가 없는 질문이다. 막연히 나랑 같은 생각을 할 것이라 짐작하고 있던 친구에 대한 서운함과 배신감은 둘째 치고, 제대로 된 대답을 하고 싶었다. 그러니까 이 글은 친구의 질문에 대한 내 대답이고, 변명이다. 어쩔 수 없이 또다시 사소해 보이는 일에 화를 내게 될 나를 이해해달라는 호소이고, 어쩌면 같이 손을 잡아달라는 부탁이다.



생존을 위한 선택


‘승자’에 편승하겠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굳이 더러운 꼴 보지 않을 수 있고, 내가 손해를 보지 않는 수준이 아니라 때로는 이익까지 따라온다. 경쟁 중심 사회에서 당연한 것 아닌가? ‘적자생존’의 세계에서, 다윈의 진화론적 측면에서 당연하다. 강한 자가 살아남고, 환경에 적응하지 못한 약한 자는 도태되기 마련이다. 그런데 문제는, 다윈의 진화론에서 적자생존은 본래 있지도 않은 말이었으며, 무엇보다 우리는 이런 식으로 살아남은 생명이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는 살아남기 위해 협동했다. 이것이 우리가 ‘사회적 동물’인 이유이다.


살아남기 위한 투쟁은 인권이 ‘발명되기’ 훨씬 전부터 존재했다. 우리의 조상은 다른 사람 종들과 경쟁하기 위해 여러 선택과 진화를 거쳤다. 네안데르탈인의 지능은 호모사피엔스보다 높았을 것이라는 가설이 유력하다. 그러나 네안데르탈인은 멸종했고 호모 사피엔스는 살아남았다. 인류학자들은 호모 사피엔스의 ‘친화력’이 그 차이를 만들어냈을 것이라 주장한다. 네안데르탈인들은 10명에서 15명 정도의 작은 무리로 살았지만, 호모 사피엔스는 100명이 넘어가는 큰 규모의 무리를 꾸렸다.* 더 많은 사람들이 모여 사회를 형성했고, 폭발적인 기술의 발전을 이끌었으며, 결국 현존하는 유일한 사람 종이 되었다. 누군가 더 우월하고, 열등한 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살아남은 종이 경쟁 종보다 환경에 ‘그나마’ 더 낫게 적응했기 때문이다.


인간이 다른 존재에게 의존적이라는 것은 갓 태어난 아기 때부터 알 수 있다. 인간의 아이는 다른 동물의 새끼와는 다르게 오랜 기간 동안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한다. 그러나 신기하게도 생후 9개월부터 아이들은 보호자가 가리키는 방향을 따라 시선을 둘 수 있다.° 아이가 움직이는 물체를 손으로 가리키는 것 또한 이때쯤 시작된다.* 즉, 방향을 가리키는 게 무슨 의미인지 알고 있다는 뜻이다. 인간은 사회적인 신호를 몸도 가누지 못하는 시기부터 알아챌 수 있다. 대신 보호자의 돌봄이 필수적이다. 어린 개체를 돌보는 보호자의 헌신이 있었기에 사회적 능력이 먼저 발달하는 인간 개체가 살아남을 수 있었다. 인간은 사회적으로 서로에게 의지한다.


* 브라이언 헤어, 버네사 우즈(2021), 『다정한 것이 살아남는다』, 이민아(역), 서울: 디플롯, 31-34.

° 대부분의 동물종은 어느 한 곳을 가리켰을 때, 방향을 따라 가리키는 곳을 바라보지 않고 손만을 바라본다.



존엄하게 살기 위한 투쟁


인간들은 모여 살기 시작하며 마을을 이뤘고, 국가를 건설했으며, 문화를 만들었다. 농사를 짓고, 가축을 기르고, 때로는 전쟁을 벌이며 영토를 확장하고, 다시 쇠퇴함을 반복하면서 가장 다정한 종이었다가도 냉혹한 종이기도 했다. 책 『다정한 것이 살아남는다』에서 인간은 위협적인 외부인에게 공감하지 못하므로, 같은 존재라 생각하지 않아 얼마든지 잔인해질 수 있는 것이라 한다.* 전쟁을 벌이며 일으키는 학살도, 누군가의 노동력을 얻어내기 위한 착취도, 그 대상을 같은 인간이라 생각하지 않았기에 가능했다. 이때 ‘인간’이 되기 위해 투쟁을 시작한 사람들이 있었고, 결국 ‘인권’이 탄생했다. 천부인권. 인간이 태어날 때부터 하늘에게 부여받은 권리. 왕과 백성이 사실 별 다를 바 없는 같은 인간이며, 노예도 인간이고, 장애인도 인간이고, 남성들에게 착취당하며 그림자처럼 살아야 했던 여성도 인간이다. 즉, 인간답게 살아갈 권리가 있다. 우리는 인간의 개념을 넓히고 더 나아가 생명이 존엄하게 살 권리의 범위를 확장하고 있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그런 세상에서 살고 있다. 인권과 존엄이라는 말이 빈번하게 사용되지만, 아직도 어떤 존재들은 그렇게 살 수 없는 세상에서.


지는 투쟁은 여전히 많다. 사실 지금까지 ‘승리한’ 투쟁들이 기적이었을지도 모른다. 여기서 의문이 든다. 지는 싸움이 뭐고, 이기는 싸움이 뭘까? 패배한 투쟁을 검색했을 때 검색 결과에 바로 뜨는 투쟁이 하나 있다. 1991년의 5월 민주화운동이다. 1987년 6월 민주항쟁의 4년 뒤, 대한민국은 또다시 노태우 정권에 반기를 들며 민주화운동의 물결에 휩싸였다. 백골단에 의한 강경대 열사의 죽음 뒤로 당시 노조위원장이던 박창수 열사의 의문사가 이어졌다. 학생, 빈민, 노동자가 민주화를 위하여 분신했다. 그러나 91년도의 운동은 실패했다고 평가된다. 민자당을 해산하고 노태우 퇴진을 이뤄내겠다는 절박한 구호는 사그라들었다. 그렇게 잊혔다.

2021년 민주화운동기념공원의 하수봉 연구사는 이 투쟁을 민중운동이라 부를지, 민주항쟁 혹은 투쟁이라고 불러야 할지 아직 제대로 논의조차 되지 않았다고 털어놓았다.* 이 외에도 수많은 투쟁들이 대중들의 관심을 얻지 못한 채 잊혔다. 그런데 지금에 와 그 역사를 들추어보았을 때, 그 노력을 함부로 무의미했다고 평가할 수 있을까? 그 투쟁들은 무의미했나?


기득권에 저항하고 자신의 권리를 되찾기 위해 부르짖는 투쟁은 본디 이기기 어렵다. 그러나 우리는 역사의 맥락 위에 서 있다. 지지부진한 싸움을 반복하는 것 같아도 세상은 계속해서 바뀌었다. 어떻게? 투쟁에 연대하는 사람들을 통해서. 작고 산발적인 투쟁에서, 사람들이 점차 더 많이 참여하고, 커지고, 결국엔 그게 세상을 뒤집는 해일이 된다. 우리나라의 민주화 운동들이 그랬고, 서프러제트 운동이 그랬으며, 노예제 폐지 운동도, 인권이라는 개념을 도입했던 혁명들도 그랬다. 그런데 어떻게 해일을 구성하는 작은 파도에 실패했고, 승리했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졌잘싸’를 말하는 게 아니다. 어쩌면 투쟁에 승패는 중요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 브라이언 헤어, 버네사 우즈(2021), 위의 책, 31-34.

* 민주화운동기념공원(2021), “잊힌 투쟁은 실패한 투쟁인가?”, 2023.01.06.



범주를 깨부수는 여성으로서


이런 말이 들린다. 여성으로 살아남기도 힘든데 어떻게 다른 의제까지 연대하냐고. 그러나 페미니즘은 항상 연대하며 발전했다. 노예 폐지론자이자 흑인 여성 인권운동가였던 소저너 트루스Sojourner Truth는 “저는 여자가 아닙니까?”하고 물었다.* 백인 여성만을 ‘여성’으로 간주하던 사회에서 흑인 여성은 여성일 수 없었다. 킴벌리 크렌쇼Kimberlé Crenshaw는 제너럴 모터스 생산부에서 해고된 아프리카계 미국인 여성 엠마 디그레핀리Emma Degraffenreid의 경험을 예시로 들며 ‘교차성’ 개념을 도입했다.* 엠마는 회사에서 인종 및 성차별을 당했다는 이유로 회사를 고소했고, 판사는 회사가 백인 여성과 흑인 남성을 채용했다는 이유로 각하했다. 회사가 채용했던 여성은 모두 백인이었고, 채용했던 흑인은 모두 남성이었으나 ‘회사는 차별하지 않았다’가 결론이었다. 흑인 여성은 온전히 흑인도 아니었으며 온전히 여성도 아니었다. 여성임에도 사회적으로 여성 범주에 속하지 않을 수 있다. 페미니즘은 여성의 범주를 확장하고 깨트리며 계속되었다.


어떤 사람이 받는 차별은 그 자체로 다층적이다. 크렌쇼가 말했던 ‘교차성’ 개념이다. ‘여성’에 포함되더라도 개인이 겪는 경험은 동일하지 않다. 정치적, 경제적 층위에 따라 우리의 경험은 조금씩 달라진다. ‘나’를 구성하는 사회적 요소는 여성만이 아니다. 어디에서는 내가 기득권이고, 어디에서는 소수자이다. 내가 ‘여성’임에도 한편으로는 ‘비장애인’이고, 다른 곳에서는 ‘대학생’으로 불리기도 하며, 또 어디에서는 ‘아시안’을 대표하기도 한다. 절대적 약자성이란 허상일 뿐이다. 여성이라서, 이미 우리가 약자이므로 다른 약자들을 돕지 않아도 된다고 말하는 순간 수많은 차별이 교차하는 지점에 서 있는 여성들의 목소리는 순식간에 묻힌다.


무엇보다 우리는 서로 연결되어 살아가고, 따라서 무 자르듯 서로를 끊어낼 방도는 없다. 참으로 복잡한 세상이라 그렇다. 어느 때보다 분리주의를 외치는 신자유주의 세상이지만, 오히려 복잡해진 세상은 억압받고 착취당하는 사람들과 나를 떼어 생각할 수 없게 한다. 나의 행동이 다른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고, 다른 사람들의 행동이 다시 나에게 돌아온다. 기술의 발달로 세계 반대편의 소식도 금방 알 수 있게 된 세상이다. 우리는 서로에게 성큼 다가갔음에도 결코 마주 보려 하진 않는다. 마주 보지 않으면, 상대방 또한 세상을 살아가는 존재라고 생각하기 어려워진다. 그러면, 또다시 우리는 아주 편리하게도 누군가를 존중받아야 할 범주에서 제외할 것이고, 또다시 우리는 누군가가 배제되는 세상에 갇힐 것이다. 그 누군가가 우리가 될 수도 있는 세상에서.


* 한겨레(2020), “‘생물학적 구분’이 연대의 토대? 페미니즘은 왜 ‘여성’의 범주를 묻는가”, 2020.04.25.

* 박종주(2018), <신자유주의 시대의 교차성 분석>, 《여성학논집》, 35, 163-183.



맺으며


이러저러한 이야기를 길게 늘어놓았지만, 괜찮은 대답이 되었는지는 모르겠다. 사실은 이렇게 깊은 생각을 하며 연대하는 것이 아니다. 솔직히 말하자면 화가 나 도저히 못 참겠기에 연대한다. 슬퍼서, 화가 나서, 조금이라도 상황이 나아진다면 좋겠기에 연대한다. 수십 차례의 집회 끝에 윤석열은 파면되었지만,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문제들은 수두룩하다. 지혜복 교사가 학교로 돌아가기를, 동덕여대에 봄이 찾아오기를, 고공농성을 위해 저 높은 곳에 올라가 있는 박정혜, 소현숙, 고진수, 김형수 노동자가 따뜻한 집으로 돌아갈 수 있기를, 장애인도 시민으로 이동하는 사회가 되기를, 미아리 집결지의 성 노동자 철거민들에게 이주대책이 마련되기를,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계속해서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 다 열거하지 못한 수많은 투쟁장이 있다. 수많은 사람들이 소리 소문 없이 죽어간다. 그리고 그 사실이 나 하나 더 연대한다고 크게 바뀌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럼에도 힘이 되어주고 싶어 연대한다. 머릿수 하나 더 채우려 연대한다. 지칠 수 있다. 외면하고 싶어질 수 있다. 나도 그렇다. 그래도 우리, 할 수 있는 것만큼은 해보자. 부당한 일에 화를 내고, 질 것 같은 싸움에도 목소리를 내보고. 그 작고 사소한 일들이 모여 우리가 살아갈 세상을 바꾸리라 믿으면서. 오늘도, 투쟁.




참고문헌

<단행본>

브라이언 헤어, 버네사 우즈(2021). 『다정한 것이 살아남는다』. 이민아(역). 서울: 디플롯.

<기사>

한겨레(2020). “‘생물학적 구분’이 연대의 토대? 페미니즘은 왜 ‘여성’의 범주를 묻는가”. 2020.04.25.

<논문>

박종주(2018). <신자유주의 시대의 교차성 분석>. 《여성학논집》, 35. 163-183.

<기타>

민주화운동기념공원(2021). “잊힌 투쟁은 실패한 투쟁인가?”. 2023.01.06.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1991년 5월투쟁”. 오픈아카이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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