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 백유, 차이, 처음, 혜민
*로 인용 각주를, °로 내용 각주를 표기하였습니다. 이텔릭체는 파란색 글씨로 표현하였습니다.
석순 64집을 준비하면서, 석수니들과 농담조로 그런 얘기를 하곤 했습니다. 윤석열 파면이 아주 늦어져서 마감 때가 다 되어서도 계속 글을 고치고 있으면 어떡하죠? 글을 쓰는 지금, 2024년 15월의 눈이 내렸습니다. 곧 봄이에요. 이제 정말 따뜻해질 일만 남았는데 혼란은 여전하고, 2025년은 영영 오지 않을 것 같습니다.
그래도 밥을 먹고 집을 치우고 학교에 가야 합니다. 석순 마감도 해야 하고요. 2024년 12월 3일에 갇혀 그 일상들을 보냈습니다. 집회 일정이 달력에 빼곡히 적힌 나날이었습니다. 이 글의 제목이 <석순은 지금>이 된 것은 어쩌면 당연했습니다. 집회에 갈 때마다 인스타그램에 '석순은 지금'이라는 게시글을 올리고는 했거든요.
어느 때보다도 긴 겨울을 보내며, 저는 누군가 제게 잘 지냈냐 물어주기를 바랐습니다. 잘 지내지 못했다고 답하고 싶어서, 힘들고 지쳤다고 말하고 싶어서, 그래도 함께하자고 말하고 싶어서 글을 씁니다. 우리의 지금이 모여 세상을 부술 거라는, 어쩌면 다소 허무맹랑해 보일지도 모르는 그 말을 믿습니다. 그 믿음으로 석순의 지금을 씁니다.
밤 열한 시, 친구의 생일파티를 한창 즐기는데 전화가 왔다. 나 인물 퀴즈 맞춰야 하는데. 전화하지 마라, 문자를 보내니 답장이 왔다.
계엄령 뜸. 너 시위 다니지 마라.
계엄령? 2024년에? SF소설에나 나올법한 2025년이라는 숫자를 한 달 남겨둔 지금, 계엄령이라니. 포털사이트 화면을 가득 메운 '윤석열 대통령 대국민담화 및 기자회견'을 누르니 "북한 공산 세력의 위협으로부터 자유대한민국을 수호하고 우리 국민의 자유와 행복을 약탈하고 있는 파렴치한 종북 반국가 세력들을 일거에 척결하고 자유헌정질서를 지키기 위해 비상 계엄을 선포한다"는 글이 보였다.
순간 눈에 아무것도 들어오지 않았다. SNS에서 계엄령 전문을 읽자 덜컥 겁이 났다. 허겁지겁 파티룸을 나와 대중교통으로 20분도 채 걸리지 않는 집까지 택시를 타고 돌아갔다. 집으로 가는 짧은 시간 동안, 친구들에게 꼭 집으로 들어가라는 연락을 받았다.
집에 도착해 국회 실시간 생중계를 틀었다. 계엄령을 무효화하기 위해 탄핵소추를 하는 것이라고 했다. 이사한 지 며칠 되지 않아 집에는 와이파이 공유기도 없었다. 급하게 이전 집에 있던 것을 가져와 아무렇게나 꽂아두고 뉴스를 보며 텔레그램에 가입했다. 새벽 2시, 군인들이 국회를 들락거리는 화면을 보다 탄핵소추안이 가결되어 계엄령이 해제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몸에 힘이 풀렸다. 이제 어떡하지?
제대로 자지 못하고 출근했다. 퇴근하고 저녁에 석순 회의에 가야 하는데, 꼭 해야 하는 회의인데. 지난해 11월 말 발족했던 젠더폭력 해결 페미니스트 연대로부터 ‘윤석열OUT 성차별OUT 공동행동(이하 윤아웃)’을 조직하자는 연락을 받았다. 저녁 6시, 회의를 미루고 광화문으로 갔다. 알고 있는 정보가 거의 없다시피 한 채로 걸었다. 선두에 서 있는 사람들이 용산으로 간다고 했다. 그냥 하는 말이라고 생각했는데, 걷다 보니 서울역이 보였다. 나 광화문에서 서울역까지 걸어온 거구나, 금방 오네, 정말 용산까지 가면 어떻게 되는 걸까. 주변의 말을 들어보니 용산까지 가지 않고 남영역에서 해산한다고 했다. 남영역에서 걷고 걸어 학교로 돌아와 회의를 진행했다. 저녁을 먹으며 회의를 하는데 밥이 입으로 들어갔는지 코로 들어갔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석순 회의를 끝내고 자정이 다 된 시간에 여성주의 교지 네트워크 회의를 열었다. 지난 몇 년간 교류가 아주 뜸했는데 이런 계기로 다시 만나게 될지 몰랐다. 줌을 켜두고 다른 교지들과 성명문을 쓰고 새벽이 되어서야 집으로 돌아갔다. 이날도 얕은 잠을 잤다.
윤아웃 기자회견을 마치고 국회 앞에 자리를 깔고 앉았다. 본대회가 시작되고 무대에서 “우리는 성별, 성적지향, 성별정체성, 장애, 연령, 국적 등에 관계없이 모두가 동등한 참여자입니다”라는 안내가 흘러나왔다. 충격적이었다. 충격적으로 좋았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모인 광장에서 평등수칙을 말할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이, 세상이 어쩌면 아주 나빠지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는 위안으로 다가왔다.
다섯 시가 되고 국회 본회의가 시작되었다. 사십여 분을 기다리자 김건희 특검법에 대한 결과가 나왔다. 부결. 무대 앞 진행자는 짧은 탄식을 내뱉고는 다시 노래를 이어 틀기 시작했다. 화를 내고 싶었는데 화를 낼 힘도 남아있지 않았다. 몇 시간째 얼어붙어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던 발끝이 다시 시려왔다. 방석도 없이 갔던 터라 근처에서 받은 종이 피켓으로 겨우 자리해 앉은 지 여섯 시간이 다 되어갈 때였다. 첫 번째 안건이 부결되자 사람들이 앞으로 빠지면서 공간이 생겼다. 앞으로, 앞으로 무작정 걸었다. 함께 걷던 깃발들이 어디로 갔는지 신경 쓸 틈도 없었다. 걷다 보니 멀리서만 보이던 국회의사당 바로 앞이었다. 그리고 두 번째 안건 표결이 시작되었다. 표결이 시작되자 자리에서 일어나는 국회의원들이 화면에 잡혔다. 집에 가는 건가 지금? 그들이 윤석열 탄핵소추안에 반대를 던지는 것만 걱정하고 있었는데, 아예 자리에서 떠날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누구는 차가운 바닥에 앉아 목이 터져라 구호를 외쳐도 당장 아무것도 결정할 수 없고, 누구는 남의 집 불구경하듯이 자신의 의무를 내팽개치고 본인들의 이익에만 골몰하고 있는 모습에 화가 났다. 그때부터는 오기로 구호를 외쳤다. 들어가, 들어가, 들어가, 제발! 그들은 본인의 당사로 들어갔을 뿐, 끝까지 본회의장에 가지 않았다.
밤 열 시, 결국 해산했다.
국회의사당역 근처에서 회의를 하고 친구들과 술집에 갔다. 어쩌다 옆 테이블 아저씨들과 이야기하게 되었는데, 그들은 우리가 왜 그렇게 ‘요술봉’을 들고 광장으로 나오는지 궁금해했다. 그들은 우리에게 언제부터 여성들이 정치에 관심이 그렇게 많았냐 물었다. 나는 토요일 기자회견에서의 발언을 한창 고민하던 중이었고, 그날 저녁은 “페미니스트들은 강남역 여성혐오 살인사건과 N번방 성범죄, 딥페이크 성범죄를 겪으며 분노를 행동으로 바꾸는 데 가장 익숙해진 사람들이기도 합니다”라는 말을 적고 나온 참이었다. 나는 그들에게 여성들은 늘 정치에 관심이 많았다고, 여성으로서 겪는 폭력의 한가운데에는 정치가 있는데 어째서 관심이 없을 수 있냐고 말했다. ‘요술봉’을 들고 나온 여성들은 나의 가족이, 나의 친구들이, 나의 동료가, 내가 죽지 않기를 바라기에 광장에 나온다고 말했다. 그리고 여성들은 이제야 등장한 사람들이 아니라고, 매번 있었으나 그 누구도 존재한다 생각하지 않았을 뿐이라고 말했다. 새삼스러운 건 ‘갑자기’ 광장에 나온 여성이 아닌 우리의 존재를 뒤늦게 알아챈 당신들이라고 말했다. 여성의 이야기를 더 많이 들어야겠다던 그 아저씨는 평등 쉽지 않네 하며 껄껄 웃었다. 원래 평등은 어려운 거예요, 대답하자 그 아저씨는 더 이상 웃지 않았다. 술 한 잔과 용돈을 받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그 말을 계속 곱씹었다. 원래 평등은 어려운 거라고, 태평하게 말했지만 어려워도 너무 어렵다. 집회 시작 전 광장에서 평등수칙을 이야기하기까지 수많은 페미니스트들의 노력이 있었다. 그 어려움을 뚫고 온 노력의 파도들이 지금의 해일 같은 광장을 만들었다. 어려워도 너무 어렵고 무섭다. 그렇지만 분명히 바뀔 것이다. 바뀐다. 그런 이상한 확신에 차올랐던 이상한 날이었다.
* 윤석열OUT 성차별OUT 페미니스트들 기자회견 “페미니스트와 윤석열은 같은 하늘 아래 살 수 없다!”에서 발언했던 글 전문입니다.
안녕하십니까. 고려대 여성주의 교지 석순 편집장 양희주입니다.
석순은 지난 삼 년간, 여섯 권의 책에서 윤석열 정부의 성차별적인 정책을 비판했습니다. 지난 봄호인 62집에서는 윤석열의 여성가족부 폐지 공약과 중앙부처의 ‘여성’과 ‘성평등’ 단어 지우기, 돌봄노동의 저평가, 그리고 성차별적인 교육과정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그리고 이번 가을호 63집에서는 딥페이크 성범죄를 다루며 ‘방관’이라는 이름 뒤에 숨은 디지털 성폭력의 또 다른 가해자인 윤석열 정부를 지적했습니다. 윤석열은 언제까지 여성혐오로 석순의 지면을 빼앗아 갈 생각입니까.
성차별적이고 여성혐오적인 정책은 해당 정책에만 영향을 미치지 않습니다. 여성혐오적인 정책은 대학 내 백래시를 심화시켰습니다. 대학 내 디지털 성폭력과 학내 총여학생회 폐지가 불러온 결과가 윤석열의 여성가족부 폐지 공약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공약을 걸고 당선된 대통령의 최후가 바로 오늘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안티 페미니스트의 말로는 퇴진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페미니스트들은 강남역 여성혐오 살인사건과 N번방 성범죄, 딥페이크 성범죄를 겪으며 분노를 행동으로 바꾸는 데 가장 익숙해진 사람들이기도 합니다. 페미니스트가 거리에 나온 것은 이례적인 일이 아닙니다. 광장과 거리에는 언제나 페미니스트가 있었습니다. 페미니스트가, 페미니즘이 세상을 바꿀 것입니다. 윤석열 퇴진은 끝이 아닙니다. 페미니스트 대통령을 원합니다. 디지털 성범죄가 없는 대학을 원합니다. 나의 친구들이 안전하게 살아가고 사랑할 수 있는 세상을 원합니다.
구호 외치고 발언 마치겠습니다.
페미니스트의 이름으로 윤석열을 파면한다
감사합니다.
박근혜 탄핵 집회 이후 처음으로 엄마와 아빠가 집회에 나갈 결심을 했다. 그래도 이 겨울에 고작 몇 번 더 집회 나가 본 경험이 있다고핫팩을 바리바리 챙겼다. 사람들이 너무 많아 앉지도 못한 채 전광판이 보이는 자리에 낑겨 서 있었다. 구호를 외치는 엄마와 아빠 목소리가 너무 쩌렁쩌렁해서 웃음이 나오기도 했다. 아직 다 외우지 못해서 떠듬떠듬 따라 부르던 민중가요를 엄마가 완벽히 불렀다. 왠지모르게 그날 더 자주 울컥했던 것 같다. 탄핵이 가결된 직후, 사람들과 다 함께 함성을 내질렀다. 우리 앞에 서 있던 분들이 우리를 돌아봤다. 활짝 웃는 얼굴로 울고 있었다. 옆을 돌아보니 엄마가 어느새 옆에 서 계시던 분에게 안겨 있었다. 축제 분위기의 집회를 이르게 빠져나오며, 차까지 정신없이 걸어갔다. 차가 너무 막혀서 도저히 바로 집으로 갈 수가 없어 대교를 넘어갔다. 사람들이 빽빽하게 대교를 걸어 건너가고 있었다.
엄마는 90년대에 학생운동을 했다. 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면서 엄마가 했던 말을 잊을 수 없을 것 같다.
“예전엔 그 국회 앞을, 그곳을 가기가 참 어려웠는데. 정말 목숨 걸고 가야 했는데… 근데 그 앞에 사람들이 다 앉아서 웃으면서 노래를부르고, 응원봉을 흔들고…… 응, 그게 참.”
시위 도중 엄마를 살짝 돌아봤을 때, 엄마의 눈시울이 붉어져 있던 장면을 기억한다.
크리스마스 이브의 아침,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의 제10차 다이인(Die-in) 행동에 참여했다. 매년 한 번씩은 장애인차별철폐투쟁에함께해 왔다. 재작년에는 사람들에게 밀쳐졌고, 작년에는 방패에 가로막혀 탑승 시도조차 못 했고, 올해 초에는 같이 간 사람들이 승강장에서 끌려 나갔다. 그리고 오늘은 응원봉을 든 사람들이 함께 있었다. 몸싸움이 있기는 했지만 누구도 끌려 나가지 않은 채로 선전전이 시작되었다.
지하철 승강장에 그대로 누웠다. 사람들로 가득 찬 승강장에 죽은 듯이 누워 천장을 바라보는데 누군가 <다시 만난 세계>를 부르기 시작했다. 장애인차별철폐투쟁에서 듣는 다만세라니, 낯설고도 좋았다. 곧 헌법재판소 앞으로 이동해서 발언을 들었다. 구호를 외치지말라는 경찰의 경고 음성을 배경음악 삼아 자유 발언이 끝없이 이어졌다. 정체성도 길이도 내용도 전부 제각각인 발언들에서, 고립되지 않는 연대를 느꼈다. 고립시키지 않겠다는 의지를 느꼈다. 그 마음이 승강장에서 헌법재판소까지 끝없이 펼쳐지고 있었다.
한강진의 민주노총 집회에 사람이 부족하다는 소식을 듣고, 광화문에 가려던 발길을 돌려 한강진으로 향했다. 극우 세력과 탄핵 촉구집회 사람들과 뒤섞여 가다 보니 누군가의 구속을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저쪽인가? 하는 순간 이재명 구속이란 말이 박혀 들었다. 아니구나. 제대로 길을 찾아가니 이제는 집회에 앉을 자리가 없었다. 이쪽에 자리가 있다는 말에 흘러 들어가니 이번엔 펜스를 든 경찰들과 맨 앞에서 정면으로 마주했다. 이게 뭐지? 사람들이 몰려들고 있는데 경찰들이 자리를 안 내어줬다. 열어라! 열어라! 차빼라! 차빼라! 경찰들과 눈을 마주쳐가며 구호를 외쳤다. 가슴 한 켠에 제주항공사고 근조리본을 달고 있던 경찰들이 눈을 피했다. 한편 고개를 살짝만 돌려도 태극기와 성조기와 이스라엘 국기를 든 극우들이 보였다. 계속해서 민주노총 조합원분들이 왔다 갔다 했다. 사람들이 계속 모였다. 곧 길을 열겠다는 소리가 들렸다. 그 상태로 1시간, 2시간 정도 흘렀다. 어? 하는 사이에 사람들이 펜스 쪽으로 밀렸다. 정신차려보니 사람들과 함께 펜스를 밀고 있었다. 밀지 마세요! 밀지 마세요! 경찰들도, 나도 외쳤다. 채증하는 경찰들이 카메라를 들이밀었다. 뭔가 질 수 없단 맘에 나도 카메라를 켜들었다. 그러다가 경찰들이 한번에 훅 빠졌다. 펜스를 내버려둔 상태로. 교통정리도 채 되지않았는데 냅다 차도에 버려진 건가? 갑자기 늘어난 공간에 혼자 내버려진 기분이었다. 이거, 이래도 되나? 차도에 사람들이 가득해지자 아직 벗어나지 못한 차량이 경적을 울렸다. 사람들이 내버려진 펜스를 차곡차곡 정리해 한 켠에 두었다. 차량들이 빠져나갈 수 있도록 다들 비켜주었고, 정리가 되자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자리에 앉아 집회를 이어갔다. 나도 앉아서 참여하다가 광화문에서 사람들이행진해 오는 걸 보고 빠져나왔다. 혼란스럽고 무서웠던 것 같다. 어쩌면 아직까지.
윤석열 체포영장을 집행한다기에 14일에서 15일로 넘어가는 밤, 한남동 관저 앞에서 텐트를 치고 밤샘농성을 했다. 이미 체포가 한 차례 미뤄진 후였기에, 체포가 될 때까지 자리를 떠나지 않겠다는 분노로 10시간이 넘도록 길에서 밤을 새웠다. 집행은 새벽 5시가 넘어서야 본격적으로 시작되었고, 경찰은 동이 트고 나서야 관저 내부에 진입했다.
길 한복판에서 동이 트는 것을 바라보며, 문학동네의 <우리는 시를 사랑해> 184회를 읽었다. 진은영 시인은 말한다. “광화문, 남태령, 한남동의 추운 밤, 그곳에 모인 이들이 나눈 우정과 연대의 기쁨은 이력서에 쓸 수가 없어요. 역사는 건망증이 심하니 제대로 기억할지의문이고요. 그러나 우리의 영혼에, 시에, 문학의 작고 아름다운 수첩에 그 밤은 정확히 기록될 거예요.”
그의 말대로, 길에서 노래하고 춤추고 먹고 웃고 졸고 수다 떨던 우리의 그 모든 밤은 정확히 기록되었을 것이다.
그 밤에는 또 다른 기록이 있다. 20대 여성 둘이 나란히 앉아 있어서인지, 기자들이 번갈아 찾아와 인터뷰를 했다. 질문은 비슷했다. 몇시부터 있었냐, 어떻게 나오게 됐냐, 마음이 어떻냐, 극우집회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냐… 대부분의 기자가 우리를 ‘응원봉을 통해 처음광장에 나온 소녀’로 가정하고 질문했다. 정치적인 상황 같은 걸 잘 모름에도 현 상황에 분노하는, 무해한 여성으로 대했다.
인터뷰가 끝날 때마다 기분이 묘했다. 아무리 여성들이 광장을 만들고 이끌어왔다고 외쳐도, 여전히 20대 여성은 무해하고 무지한, 그래서 기특한 개인 참여자로 여겨졌다. 우리가 더 이상 무해하지 않아지는 때, 나의 권리를 주장하고 ‘과한’ 요구를 할 때가 온다면 그때우리는 더 이상 소녀가 아니라 마녀로, 꼴페미로 불리게 될 것임을 직감했다. 여전히 여성의 목소리는 허락받은 만큼만 받아들여지고있다.
동덕여자대학교의 비민주적인 공학전환에 반대하는 집회에 외부 연대를 받기 시작했다. 안국역에서 나와 자리를 잡고 깃발을 올렸다. 두 차례 다녀온 동덕여대 집회와는 사뭇 다른 분위기였다. 혜화역과 국회에서 진행된 두 번의 집회가 엄숙하고 비장했다면, 안국역에서의 동덕여대 집회는 축제 같았다. 익숙하고 편안한 기분. 윤석열 퇴진을 외치는 지금 광장의 모습이 고스란히 녹아들어 있었다. 동덕여대 집회에서 이제야 형형색색 펄럭이는 깃발을 보게 된 것이 서러웠다. 젊은 여자들이 응원봉을 들 때에는 기특했지만, 그들이 드는 깃발은 두려웠던 것이겠지. 그러나 이제 돌풍처럼 펄럭이는 깃발들이 이들과 함께 있다. 농민, 장애인, 퀴어, 여성, 그리고 온갖 것들을 대표하는 깃발을 보며 그 어느 때보다 우리는 연결되어 있다고 느꼈다.
2024년 12월 말, 혜화역 동덕여대 집회 발언문에 이런 말을 썼다. 제시간에 제출하지 못해 결국 발언하지는 못했으나 그 글의 일부를 남겨둔다. 그때와 여전한 마음이다.
“지난 유월, 고려대 문과대 성평등위원회가 해산했습니다. 비단 고대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몇 년간 수많은 대학에서 페미니즘 동아리가 짧은 수명을 다하고 사라졌으며 오랜 역사를 가졌던 총여학생회 또한 폐지되었습니다. 이 모든 것은 단순히 소멸에만 그 영향을 미치지 않습니다. 2015년 동덕여대 여성학과 폐지의 결과가, 동덕여대의 설립 정신을 무시하고 비민주적이고 폭력적인 행태로 이루어진 공학전환에까지 이어진 것입니다. (중략) 동덕여대 공학 전환 이후에 닥쳐올 백래시는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할 것입니다. 이어질 날들과 동덕여대 학생들, 그리고 지금 일상을 바쳐 투쟁하는 우리를 위해서라도 동덕여대는 공학 전환을 철회하고 비리를 저지르는 조원영 재단은 사퇴해야 할 것입니다.”
석순이 속해 있는 ‘젠더폭력 해결 페미니스트 연대’에서 2025 여성의 날 여성대회 부스를 냈다. 부스 가판대에 비치된 석순을 알아보시는 분들이 있었다. 12월 3일 이후, 석순을 읽었다는 사람과 석순을 알았던 사람들, 또 석순을 했던 사람들을 꽤 만났다. 지난 63집에서 나는 누가 제발 석순을 읽고 있기는 한 거냐고 하소연했는데, 광장에서 마주친 그들이 그 글에 대한 대답 같았다. 읽는 사람이 있다. 우리의 이야기를 듣는 사람들이 있다. 함께하는 사람들이 있다.
경복궁 앞을 크게 한바퀴 도는 깃발 행진을 하는데, 새삼 이렇게 넓은 공간에서 여성대회를 할 수 있다는 사실이 벅차오르게 행복했다. 날이 좋았고, 좋아하는 노래가 나왔고, 무대에선 사랑하자는 얘기를 했고, 즐겁게 춤을 추었고, 함께 소리 질러주는 친구들이 곁에 있었다. 내년에도 광화문처럼 넓은 광장에서 여성대회를 하면 좋겠다는 얘기를 하다 보니 우리가 광화문 광장에 꽤 많이 익숙해졌구나 싶어 한숨이 나왔다. 사실 지쳐가고 있었다. 축제 같은 집회는 좋았지만, 매주 토요일을 반납하고 추운 길거리에 몇 시간이고 서 있거나 앉아 있는 것이 지겨웠다. 속보라는 소식은 매일같이 뜨는데 왜 빠르게 진행되어야 할 일들은 하나도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걸까. 우리의 목소리는 다 어디로 가는 건가.
여성대회를 마치고 본대회에 참여했다. 앉아서 발언을 듣는데 윤석열이 구속 취소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아, 2024년 언제 끝나지?
12월로 돌아간 것 같았다. 집회가 길어지면서 인원이 많이 줄었는데 사람이 가득한 광장을 보니 정말 끝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경복궁 고궁박물관 근처에 있다는 윤아웃 깃발을 찾아 인파를 뚫고 나아갔다. 사람들과 깃발들이 끝이 없었다. 이번에는 정말 되겠구나, 이번주가 정말 마지막이겠구나.°
집으로 돌아가는 길, 마지막일 것이라는 후련함과 아쉬움이 동시에 들었다. 거리에서 만나 이제는 동료가 된, 석 달 사이 부쩍 가까워진사람들과 더 이상 자주 보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니 마음이 이상했다. 차가운 거리에서 방한용품과 간식을 나누고, 따뜻한 음료를 주고받고, 매주 안부를 건네던 사람들은 이제 어디로 갈까. 어쩌다 마주친 친절을 다시 만날 수 있을까. 영영 돌아오지 않을 시간을 지나고있다는 감각이 이만큼 생생하게 느껴질 수도 있구나.
그러나 2024년 겨울을 지나 봄을 맞이하는 지금, 얻은 것이 분명히 있다. 국회에서, 광화문에서, 남태령에서, 한남동에서 분명히 얻은것이 있다. 얼굴이 있다. 여성의, 퀴어의, 노동자의, 장애인의, 농민의, 이주민의 얼굴이 있다. 윤석열이, 정부가, 사회가, 구조가 그들을지우려고 해도 나는 그 나날들에 그들의 얼굴을 똑똑히 보았다. 존재한다는 머나먼 말이 아닌 당장 무대 앞에 오른 그들의 얼굴이 희미한 위로가 되었다. 각자의 자리로 돌아가도 그 얼굴들을 영영 잊지 못할 것이다.
° 슬프게도 3월 15일은 마지막 토요일이 아니었다. 헌법재판소의 판결이 밀리고 밀려 3월 29일 토요일이 마지막 광화문이 되었다.
광화문 집회가 끝나고, 한화오션 본사 앞으로 향했다. 거통고조선하청지회의 김형수 지회장님이 CCTV철탑에 계셨다. 철탑이 하염없이 높았다. 하염없이 높아서 하염없이 올려다봤다. 그곳은 말 그대로 높은(高) 허공(空). 넓고 높고 무엇도 없는 고공. 1월에 땅에서 보았던 사람이 3월엔 그 고공에 있었다. 가슴에 펌프가 달린 것처럼 울음이 자꾸자꾸 솟아 나왔다. 돈이 뭐라고, 고작 그게 뭐라고 사람을저토록 내모는지 징그럽고 지독했다. 삶 하나 생명 하나가 이토록 처절해야 한다는 게 화가 났다.
11일로 예상되었던 탄핵 선고는 21일 예상으로 열흘이나 밀렸다. 매일을 혹여 속보가 뜰까 맘졸이며 보내고 있었지만, 기다리는 소식은 좀처럼 전해지지 않고 아픈 소식만 늘어난다. 탄핵 선고가 계속 미루어지고 있는 이 시점에도, 어떤 노동자들은 높은 허공으로 오른다.
나는 그 무엇보다도 삶의 편이다.
나는 사람의 편이다.
고작 그뿐이다.
오래 기다렸던 탄핵 선고일이 되었다. 겨울 내내 고생한 보상이라도 받아내듯 마지막 광화문으로 향했다. 따뜻한 햇빛에 졸며 기다리다가 11시가 되었다. 사람들은 한 문장 한 문장에 박수를 치고 환호했다. 그리고 11시 22분, 윤석열의 파면이 선고되었다. 예상했던 것보다는 아주 조금 더 기뻤다. ‘드디어’나 ‘마침내’ 같은 단어 없이 그저 ‘됐다’, 그 정도.
12월의 나는 이 순간을 두려워 했다. 잠깐 열렸다가 사라져 갈 이 광장에서 무엇을 할 수 있는지, 할 수 있는 게 있긴 한지 물었다. 탄핵이 되더라도 달라진 것 없이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게 될까 걱정했다. 그리고 파면이 선고된 지금, 어쩌면 세상은 정권교체 말고는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은 채 계엄 이전 그 상태 그대로 돌아왔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사람들이 바뀌었을 것이다. 연대의 힘을, 우리의 힘을, 저항의 힘을 느꼈을 것이다. 그것이 나의 희망이다.
한 달 가까이 비어 있던 글이 탄핵이 되자마자 빠르게 채워지기 시작했다. 광장에서 할 말을 다 써버렸다고 생각했는데, 새로운 할 말이채워지는 것도 결국 다시 광장에서였다. 종일 많은 문장을 들었고 또 많은 문장이 떠올랐지만 제일 기억에 남는 문장은 이것이다. “국회가 신속하게 비상계엄 해제 요구 결의를 할 수 있었던 것은 시민들의 저항과 군경의 소극적인 임무 수행 덕분이다.” 그렇다. 이 모든것은 우리가 만든 승리이다. 그리고 우리에겐 이루어 낼 승리가 아직 많이 남아 있다.
누군가는 우리에게 이렇게 묻고는 했습니다. 광장에 꼭 나가야 하냐고. 윤석열 탄핵과 페미니스트는, 농민은, 장애인은, 퀴어는, 노동자는, 이주민은, 성노동자는 아무 상관이 없지 않으냐고. 당장 탄핵이 우선인데 왜 자꾸 이상한 이야기를 하느냐고. 먹고 살기도 힘든데그렇게까지 해야 하느냐고. 세상이 그렇게 쉽게 바뀔 거라고 생각하냐고. 고작 그것으로 자만하지 말라고.
그렇게까지 해야 합니다. 그렇게 답할 수밖에 없어요. 이렇게까지 해도, 죽어가는 자들이 있습니다. 그날 12월 3일의 밤 국회에서 시민들이, 페미니스트들의 투쟁이, 농민의 트랙터가, 장애인의 이동권 투쟁이, 퀴어의 축제가, 노동자의 고공이, 이주민과 성노동자의 목소리가 그 사라질 뻔했던 목숨들의 바짓가랑이를 잡은 것입니다. 손에 쥔 것은 응원봉만이 아닙니다. 우리들의 손에는 차별과 억압이 죽여온 삶이 있습니다.
그래서 석순의 지금은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세상이 바뀔 것이라는 허무맹랑한 믿음을 쥐고서 말하고, 글을 쓰고, 광장에 나갑니다. 투쟁은 분노라는 시한폭탄을 일상에 박아 넣고 살아가는 것과도 같아서, 두렵고 무섭고 외롭습니다. 그렇기에 믿음과 희망을 더욱꼭 붙잡아야 합니다. 길고 긴 투쟁 끝에, 결국 터지는 것은 우리가 아니라 세상의 불합리와 구조적 차별일 것입니다. 외롭고 긴 싸움을하고 있는 사람들을 위해, 진정한 민주주의를 위해, 우리를 위해 석순은 계속됩니다. 계속해서 함께할 것입니다.
<석순은 지금>은 그 겨울, 당신 곁에서 함께했던 우리의 기록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