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는글

혜민

by 석순

저에게 봄은 곧 목련이 피는 계절입니다. 목련은 겨울이 지나자마자 온 힘을 다해 꽃눈을 터뜨리고, 시드는 게 두렵지 않은 것처럼 커다랗게 꽃을 피워냅니다. 그러고는 미련없이 툭툭 꽃잎을 떨어뜨립니다. 꽃잎이 떨어진 가지 끝에는 다음 해의 꽃이 될 꽃눈이 생겨납니다. 목련의 꽃눈은 꽃이 지고 한 달쯤 뒤에 생겨 여름과 가을, 겨울을 보내며 다음 봄을 기다립니다.

하지만 변하지 않은 채로 가만히 기다리는 것은 아닙니다. 꽃눈은 여러 겹의 눈껍질에 싸인 채로 여름과 가을을 보내고, 겨울의 찬바람에 눈껍질을 한 겹 한 겹 떨어뜨립니다. 그리고 마침내 봄이 오면 그 안에 기다리고 있던 꽃봉오리를 틔워냅니다. 크게. 아름답게. 긴 시간을 쏟아붓는 모양새로 활짝. 그러고는 툭툭 떨어집니다. 멍들어 떨어지고 떨어져 멍듭니다. 꽃잎이 떨어진 뒤에는 다시 그 다음 봄을 기다리며 새로운 꽃눈을 만듭니다.

목련이 지고 있는 지금, 64집의 여는글을 씁니다. 아마도 여러분께는 푸릇한 새잎까지 다 자라고 난 뒤에야 이 글이 전해지겠지요. 목련은 그때쯤이면 다음 겨울을 맞이하기 위해 또 꽃눈을 만들어내고 있을 것입니다.


석순 63집의 마지막 회의가 있기 바로 전날, 윤석열은 계엄을 선포했습니다. 길게 고민하지 않고 깃발을 들고 달려 나갔습니다. 12월에는 여의도로, 1월부터는 광화문으로 향했습니다. 석순 64집은 그렇게 시작되었습니다.

1월에는 수습위원 세미나를 진행했습니다. 수요일마다 모여 매주 새로운 분노를, 새로운 무력감을, 새로운 희망을 이야기했습니다. 2월과 3월에는 아이템회의와 편집회의를 하며 글을 썼습니다. 계엄에 대해, 탄핵에 대해, 우리가 겨울 동안 보고 느낀 것에 대해 썼습니다. 페미니즘이 내릴 수 있는 답을 매주 모여 고민하고 또 적었습니다. 그리고 마감을 한 주 남긴 4월 4일, 마침내 윤석열이 파면되었습니다.

그렇게 석순 64집은 지난 12월부터 4월까지의 길고 긴 겨울을 부수며 마침내 우리 모두에게 도착했습니다. 겨우내 눈껍질을 떨어뜨리고 꽃을 피워내는 목련처럼, 우리는 함께 겨울을 떨쳐내고 이 봄을 맞이했습니다.


겨울을 지나며, 광장에서 많은 여자들을 만났습니다. 어떤 여자는 떠들었고, 어떤 여자는 달렸고, 어떤 여자는 주저앉았습니다. 어떤 여자는 울었고, 어떤 여자는 웃었고, 또 어떤 여자는 화를 냈습니다. 광장 밖에서도 많은 여자들을 만났습니다. 불탄 공장의 옥상에, 서울시 교육청 앞에, 학교가 탄압하는 캠퍼스 안에, 계고장이 날아온 집결지에 여자들이 있었습니다. 사실, 그들은 여전히 그곳에 있습니다. 그리하여 우리에게는 또다시 여름과 가을이, 그리고 겨울이 찾아올 것입니다. 다가올 겨울과 그에 따라올 또 새로운 봄을 위해 우리는 열심히 눈껍질을 떨어뜨리며 싸워야겠지요.


그러므로, 계엄은 끝났지만 우리의 싸움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여전히 광장에는 여자들이 있습니다.
거리에 여자들이 있습니다.
쫓겨나는 여자들이 있습니다.
갈 곳 없는 여자들이 있습니다.
스스로를 검열하는 여자들이 있습니다.
미치거나 슬픈, 슬프거나 미친 여자들이 있습니다.
비난받는 여자들이 있습니다.
연대하는 여자들이 있습니다.
싸우는 여자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모든 여자들과 함께, 여기 작은 편집실 안에는 글 쓰는 여자들이 있습니다.


안녕하세요, 우리는 여성주의 교지 석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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