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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화. 뭘 고민 해?! 우리 엄마가 무당인데

[미스터리 추리소설] 우리 집에 왜 왔니?

by 해달

“어머니는? 어머니도 너 작가 되는 거 원하셔?”

“그것까지는 모르겠는데, 이제껏 빚 갚느라 고생했으니까 앞으로는 내 꿈을 위해 살아보라고 하셨어.”

“아, 그래?”

“어느 순간 의지와 상관없이 선택의 폭이 좁아지는 때가 오는데 그건 나이가 든 거라고. 성패를 떠나 도전할 수 있을 때 하라고 하셨어. 적어도 꿈에는 후회가 없어야 성공한 인생이래.”




주양현이 비어있는 내 술잔에 소주를 따랐다. 취할 때까지 퍼붓는 나와 달리 녀석은 취기가 돌기 전 잔을 엎었다.


그 뒤로도 우리는 꽤 많은 대화를 나눴다.


자신이 경험해보지 못한 대학생활에 녀석은 부러움을 드러내기도 했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그는 자신이 걸어갈 앞날에 온전히 몰입하고 있었다.


물론 나의 꿈에 대해 물어오기도 했다. 단칼에 생각해 본 적 없다며 잘라 말했지만…….


그러자 주양현은 한심한 눈빛 대신 내가 가진 장점을 끄집어내 칭찬을 퍼부었다. 마른 장작 같은 체형에 무기력하기만 한 내게 어떻게든 힘을 실어주려는 모습이었다.



.

.



“그래도 고향에 너라도 있으니까 좋다. 안 그랬으면 지루해서 못 견뎠을 텐데.”

“4년간 공부하느라 애썼으니까 좀 쉬어. 쉬다 보면 너도 분명 하고 싶은 게 생길 거야.”

“술 땡기면 연락할게!”

“그래! 우리 엄마 김치찌개 생각나면 언제든 집으로 와! 간다!”




갈림길에 들어선 주양현의 뒷모습을 나는 한참 동안 바라봤다. 복잡 미묘한 감정이, 녀석에게서 쉽게 눈을 떼지 못하게 했다.


꿈을 품고 건실히 나아가는 주양현은 확실히 멋진 놈이 되어있었다.


그러나 내 결심은 변함없었다. 그저 그가 사는 날까지 그렇게 열심히 살아주기를 바랄 뿐이었다. 그래야 내 안에 앙금처럼 가라앉아 있는 일말의 양심마저 깨끗이 흘려보낼 수 있을 테니.


주양현이 멀어지자 나도 곧 가벼운 발걸음을 옮겼다. 살짝 취기가 올라 괜히 기분이 좋은, 내 나이 스물일곱 3월 초하루였다.




***




내가 주양현을 다시 만난 건 11월 2일 일요일, 음력 9월 그믐날 아침이었다.


그 녀석 집에서 아주머니가 끓여주신 김치찌개로 든든히 배를 채웠던 게 8월 초였으니 근 석 달 만의 만남이었다.


그간 나는 주양현을 거의 불러내지 않았다.


4월 중순 무렵, 어머니와 외할머니 산소를 다녀오는 길이었다. 나는 어머니께 주양현 대신 다른 건장한 친구를 데려오면 안 되겠냐고 여쭈었다.


전화로 늘 내 안부를 챙기고 행여 내가 세상에서 도태될까, 듣기 좋은 잔소리를 늘어놓는 친구에 도저히 못할 짓이라는 생각이 든 거였다.


그런데 돌아온 어머니 대답이 잠시잠깐 흔들렸던 나를 각성시켰다.




“그른 마음이믄, 마 기냥 뒤지라.”




그날 이후 나는 마음을 독하게 먹었다. 주양현 몫까지 내가 열심히 살면 된다는 결심이었다. 그리고 가능한 한 그 녀석의 시간을 방해하지 않았다. 그것만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배려였다.


그렇게 독한 여름을 거쳐 간 11월, 다시 만난 주양현은 한껏 들뜬 얼굴이었다.


흰 셔츠에 말끔하게 재킷을 걸친 것이 전에 없던 차림에다 단정하게 이발도 한 상태였다. 뭔가 좋은 일이 있는지 입가 가득 미소까지 머금고 있었다.


순간 뜻밖의 무언가가 내 시선을 사로잡았다. 사선으로 걸친 크로스 가방 앞, 그의 손에 들린 작은 성경책이었다.




“너, 뭐냐?”




성경책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내가 물었다.


오랜만에 밥이나 먹자는 나를 아침 일찍 불러낸 건 주양현이었다.




“뭐긴, 보다시피 교회 가려고 나왔지.”

“……교회? 설마, 나랑?”

“어.”

“나는 밥 먹자고 전화한 건데, 너 지금 나 전도하려는 거냐?”




오만상을 찌푸린 내가 손사래를 치며 뒷걸음질을 쳤다. 3개월 전만 해도 멀쩡했던 놈이라 되레 놀란 나였다.




“그게 아니라…… 실은, 나 좋아하는 여자가 생겼어.”




속내를 터는 녀석의 양 볼이 발그레하게 피어올랐다. 그제야 나는 주양현이 사랑에 빠진 걸 알아차렸다.




“근데 왜 교회를…… 아, 그 여자가 교회 다녀?”

“어. 지난달에 보육원 승합차 수리하러 갔다가 우연히 봤는데, 완전 내 이상형이야.”

“대체 어떤 여자길래 첫눈에 빠지냐?”

“보면 알아. 선이 곱고 맨 얼굴에 그 자체로도 빛이 나거든.”

“그래서, 그 여자 보려고 이 아침부터 교회를 가는 거야?”

“뭐 겸사겸사. 이제 2주 됐어.”




실실거리면서도 말을 아끼는 주양현에 나는 곧 녀석을 따라 난생처음 교회로 들어섰다.




*




“대체 어디에 앉은 거야?”




맨 뒷줄, 주양현과 나란히 앉은 나는 목을 빼들고 탐색 중이었다. 교인이라고 해봐야 50여 명 남짓한 작은 교회였다. 그 가운데 내 또래의 여자를 찾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교인 대부분이 노년기에 접어든 농부들과 어린애를 안은 가족이었으니까.


사실 내가 관심 둘 일은 아니었다. 내가 만날 여자도 아닌 데다 교인이라니, 반감이 앞섰다. 그런데 주양현 이상형이라는 게 불현듯 호기심이 일었다.


어릴 적 잠깐 서울물을 먹긴 했지만 17년을 깡촌에서 보낸 녀석이었다. 이상형이라고 해봐야 보나 마나 촌티 나는 여자일 게 뻔했다. 그럼에도 나는 그 여자가 궁금했다. 역시 촌놈 수준은 이것밖에 안 된다는 것을 내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다.


그사이 예배가 시작됐다. 나는 어쩔 수 없이 지루한 시간을 견뎌야 했다.




*




“어?! 저기 나온다.”




예배가 끝나갈 무렵이었다. 살짝 고개를 기울인 주양현이 작게 속삭이자 졸고 있던 내 눈이 번쩍 뜨이며 강단으로 향했다.


강단에는 무릎을 덮는 하늘하늘한 베이지색 원피스를 입은 한 여자와 열 명 남짓한 성가대가 올라오고 있었다. 여자는 곧장 피아노 앞에 앉아 악보를 펼쳤다.




“저 사람이야. 피아노 앞에 앉은 여자. 예쁘지?”

“…….”




헤벌쭉한 얼굴로 여자를 바라보는 녀석에게 이미 나는 안중에 없었다. 그러나 나는 그놈의 마음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주양현 말대로 여자는 선이 고왔다. 오밀조밀한 이목구비에 햇살을 품은 눈빛이 멀리서도 반짝거렸다. 흔한 액세서리나 화장기 하나 없이도 자연스레 풍기는 우아함이, 그야말로 빛이 나는 여자였다.




*




“아까 그 피아노 치던 여자 말이야, 뭐 하는 사람이야?”




예배를 마치고 교회 밖으로 나오는 길, 무심한 듯 내가 물었다.




“국민학교 선생님이래. 올 초 여기로 배정받았다나 봐.”

“어려 뵈던데 사회인이었네.”

“25살이야. 이름은 김정희. 이름까지 예쁘지 않냐?”




그녀 이야기에 주양현 입꼬리가 귀에 걸렸다. 그야말로 사랑에 푹 빠진 모습이었다.




“근데 그 여자는 너 모르는 것 같던데, 아직 안면도 안 텄어?”

“어. 아무 준비도 없이 무턱대고 들이대고 싶진 않거든.”

“너, 진심이구나?!”

“음…… 아마도. 나 말이야, 김정희와 어울리는 근사한 남자친구가 되고 싶어 졌어.”




주양현이 한 손에 든 성경책을 들어 보이며 말을 이었다.




“그래서 이 깨알 같은 성경도 읽고 교회도 다니는 거야. 대화가 잘 통하고 싶어서.”

“너 무교잖아. 근데 여자 때문에 종교까지 갖기로 한 거야?”

“내가 좋아하는 여자가 믿는 신이잖아. 궁금해졌어.”

“이야, 주양현이 웬일이래?”

“일방적이지만 신학에 대해 공부하겠다고 약속했어. 여자 꼬시려고 신앙을 도구로 이용할 순 없으니까.”




그는 여전히 웃고 있었다. 반면 눈빛을 보아하니 놀랍도록 진지했다.


단순히 여자 마음하나 사로잡기 위한 가식이 아니었다. 주양현은 진심으로 그녀를 아끼고 있었다.




“뭐, 참해 보이긴 하더라. 잘해봐.”

“잘되면 같이 밥 한 번 먹자!”

“마침 말 잘했네. 안 그래도 배고팠는데 밥 먹으러 가자!”




잘됐다 싶어 화제를 돌린 나는 주양현을 데리고 교회를 벗어났다. 저만치 교인들과 이야기 중인 김정희를 힐끔 훔쳐본 후였다.




***




“무속신앙에 관한 소설?”




얼마 전 오픈한 시내 경양식당에서 돈가스를 썰던 주양현이 내게 되물었다.


무속인에 관한 소설을 써보라는 내 권유에 살짝 놀란 얼굴이었다.




“아무리 과학이 발전했다느니 귀신이 없다느니 해도 일 년 365일 점집을 들락거리는 발길은 끊이질 않거든. 드러나지만 않을 뿐이지.”

“와, 그렇게 많아?”




세상 속 몰랐던 사회의 이면에 주양현이 머리를 기울였다.


녀석은 조금도 내 말을 의심하지 않는 눈치였다. 그도 그럴 것이 내 어머니가 산증인이었다.




“평소에는 예수님 부처님 찾아도 뒤로는 점집 오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데. 사람들은 막연한 믿음보다 확실한 복을 원해. 아무리 세상이 변해도 샤머니즘이 존재할 수밖에 없다는 방증이지.”

“아, 그렇구나…….”

“내가 장담하는데, 아마 21세기에도 샤머니즘은 살아있을 거야. 게다가 우리나라 토착신앙이잖아.”




자신하듯 나는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물론 무속신앙에 대한 맹신은 아니었다. 그것으로 인해 내가 누린 복은 없었으니까.


다만 정말 내 명줄이 연장된다면, 그때는 안정할 양이었다.


아무것도 모른 채 활짝 귀를 연 주양현 앞에서 내가 열변을 토하는 이유였다.




“언제가 될지는 모르지만 나중에 한번 소설로 써봐. 모르긴 몰라도 꽤 주목받을 걸!”




내 말끝에 포크와 나이프를 내려놓은 주양현이 물 컵을 들었다. 이런 세계에 관심이 없는 그놈에게는 다소 생소한 소재일 터였다. 그러나 그것이 되레 녀석의 호기심을 자극한 건 분명했다.




“뭔가 흥미로울 것 같긴 한데, 난 그런 쪽은 잘 몰라서. 상상으로만 쓰기에는 무리일 것 같아.”

“뭘 고민해?! 우리 엄마가 무당인데.”

“…….”




놀란 마음을 감추려는 듯 주양현이 어색한 웃음을 보였다. 웬만해서는 어머니 얘기를 꺼내지 않는 나를 알고 있던 탓이었다.




“양현이 넌 이런 세계에 관심이 없어서 잘 모르겠지만 실제 굿판이나 신당에서 기묘한 일이 꽤 일어나.”

“기묘한 일? 그게 뭔데?”




순간 주양현의 상체가 살짝 앞으로 기울었다. 덫에 걸려들기 직전의 아슬아슬한 줄다리기였다.




“가령 정체불명의 목소리가 들린다든지, 느닷없이 호롱불이 꺼지거나 병풍이 찢기기도 해. 때로는 천장에 매달아 놓은 종이 사정없이 흔들리고 그 와중에 접신한 무당은 뒤집힌 눈과 소름 끼치는 목소리로 중얼거리지.”




이때다 싶어 나는 어깨너머 목격했던 경험을 나열하며 아는 척을 했다. 가능한 한 녀석의 호기심을 최대한 끌어내기 위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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