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윤도 Oct 04. 2024

그 많던 에그 샐러드 9 마지막회

여기 직원들은 다 알아요

  윤조는 앰버를 향해 걸어갔다. '다른 건 다 참겠는데 아픈 사람 두고 혀를 차거나 내 뒤에서 고개를 흔드는 건 하지 마. 그거 정말 기분 더럽게 만드는 거니까 하지 마' 윤조는 조금 전 제프에게 할 말을 연습했을 때 이미 앞치마를 벗고 자동차 키를 챙겨 클럽 하우스를 나가버리는 시나리오도 생각해 두었었다.


  "조. 진정해요."


  윤조가 흥분해서 다가서자 앰버가 침착하게 말했다.


  "뭐라고? 진정하라고?"

  "블리미아라고 당장 어떻게 되는 건 아니에요."

  "뭐, 뭐? 블리미아?"

  "역시 몰랐군요. 하긴 오늘 제프와 말할 때 보니 조가 모르는 것 같긴 했어요."

  "블리...... 미아? 미아가?"


  섭식 장애의 일종인 블리미아와 아노렉시아중 뭐가 거식증이고 뭐가 폭식증인지 헷갈렸다.


  "그래요. 폭식증이요. 갑자기 식욕이 생겨 폭풍처럼 흡입하고는 바로 다 토해버리는 거요."


  앰버는 윤조 마음을 읽은 듯했다.

  윤조는 스탠을 보았다. 근엄한 얼굴이 좀 더 어두워 보였다.


  "앰버는, 어떻게, 알았죠?"


  윤조의 목소리가 차분해졌다.


  "뭘요? 미아가 블리미아라는 거요? 외모 보고 딱 알았죠. 너무 말랐잖아요. 여기 직원들은 다 알아요. 아휴, 안 됐어요."


  그날 윤조가 퇴근할 때까지 미아는 한 번 클럽 하우스에 들어왔다가 바로 나갔다. 미아와 이야기할 기회도 없었지만, 만약 있었다 하더라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오전에 재료가 없어졌다고 제프에게 흥분해서 말할 때 미아는 얼마나 무안했을까. 제프가 자기가 다 먹었다고 우스꽝스러운 몸짓을 할 때 얼마나 수치스러웠을까. 윤조는 몸과 마음이 축 처져서 퇴근했다.



  토요일에 마샤를 만났다. 다운타운 메인 스트리트에 있는 더폭스 마켓에서 피시앤칩스를 먹었다. 전에 있던 가게를 리모델링하고 로고도 산뜻하게 파란색으로 바꾸어서인지 줄이 길었다. 윤조와 마샤도 각각 배쓰와 할리부트 콤보를 주문해 빈자리로 가 앉았다.


  "뭐라고 연락이 온 줄 알아? 그 인터뷰 왜 떨어졌냐고 보낸 거?"

  "뭐래?"

  "말해줄 수 없대. 조, 그게 말이 되니? 두 번이나 날 떨어뜨려 놓고 이유도 말 못 하겠다는 게?"

  "하긴, 그런 거 말 안 한대. 그래서 기준이 뭔지 아무도 모른다잖아."


  튀김 한 조각을 들어 타르타르소스를 찍어 베어 물고는 윤조가 말했다.


  "정말이지 어떤 때는 여기 사람들, 이해가 안 간다."

  "그래도 답변이라도 해준 게 어디야. 그냥 무시하는 경우가 더 많을걸."


  윤조와 마샤는 배쓰와 할리부트튀김을 끝내고 감자튀김을 오물거리며 사람 구경을 했다.


  "마샤?"

  "응?"

  "블리미아 앓는 사람은 심리상태가 어때? 항상 떠 있어?"  

  "그럴 수도 있지. 불안한 마음을 숨기려 하니까. 왜? 누가 그런 거 앓고 있는 거야?"

  "으응. 직원 중 한 사람이."

  "어머. 너무 안 됐다. 그래도 일하는 게 대단하네."



  위니펙의 짧은 여름은 제 가치를 지키려는 듯 금세 지나가 버렸다. 이글거리던 태양도 차분해지고 골프장 손님도 쑥 빠졌다. 9월이 되며 나이 어린 직원들은 학교로 돌아갔다.

   다음 주면, 골프장 문을 닫는다. 윤조의 마지막 날이기도 하다. 5월 처음 일하기 시작할 때처럼 다시 한산해진 클럽 하우스엔 이제 윤조와 제프만이 남았다. 오전 7시 전부터 왁자지껄하며 클럽 하우스 한쪽을 차지했던 단골들도 찬바람이 불면서 발길을 끊었다. 아마 커뮤니티 센터에서 빙고 게임을 하고 있겠지.

  오전에 가끔 들어오는 손님들의 음식 주문은 여전히 받지만 이제 윤조는 쿠키를 굽거나 샌드위치를 만들지 않는다. 찾는 손님이 적어 아직 가득 찬 커피를 한잔 따라서 패티오에 앉았다. 커피를 한 모금 홀짝이고는 미처 푸른빛을 잃지 않은 잔디를 바라보았다. 엄마 오리 뒤를 따랐던 아기 오리들은 얼마나 커 있을까. 윤조에게 오리를 보여주고 싶어 했던 스탠의 해맑은 눈빛과 주방에서 일하는 윤조를 쫓던 날카로운 눈빛이 중첩되었다. 한동안 윤조를 불안하게 했던 그 알 수없던 눈초리. 스탠은 마지막날이 되어서야 윤조의 의구심을 풀어주었다.


  "조. 혹시 위니펙에 언니나 동생이 있나요?"


  "아뇨. 한국에는 있는데요. 왜요? 닮은 사람을 보기라도 한 건가요?"


  "그건 아니고요. 클럽 하우스에 조 같은 사람 한 명만 더 있으면 다른 사람 필요 없을 것 같아서요."


  그런 말을 할 때도 스탠의 눈빛은 근엄했다. 스탠과 스스럼없이 얘기할 수 있었다면 좋았을걸. 생각하니 씁쓸했다.


  앰버는 밴쿠버에 돌아갈 날을 앞당기는 바람에 8월부터 나오지 않았다. 바람이 불어와 쓰고 있던 모자를 날렸다. 윤조는 일어나 쫓았다. 버드나무 아래에서 파르르 떨고 있는 모자를 주워 들며 핸드폰을 보니 곧 브레이크 타임이 끝나가고 있었다. 바람이 부는 방향으로 몸을 틀어 머리카락을 한데 모아 모자를 눌러썼다. 한때 북적였던 골프 코스가 눈앞에 펼쳐졌다. 비어 카트를 실은 자전거 페달을 밟는 미아 모습이 떠올랐다. 미아와는 그때 화장실 사건 이후로는 오며 가며 인사만 했었다. 음식 재료가 계속해서 조금씩 사라지는 걸 보며 윤조는 오히려 위안을 삼았다. 적어도 미아의 상태가 악화하는 것은 아닐 테니까. 내년 시즌에도 미아가 또 이곳에서 일할지는 모르지만 물론 윤조 자신도 일 년 후를 기약할 수 없지만, 혹시라도 다시 만나게 된다면 그때는 조금은 차분해진 모습의 미아를 볼 수 있기를.

  윤조는 빈 커피잔을 들고 클럽 하우스로 들어갔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