둥근 원형의 홀 주위로 문이 둥그렇게 쭉 늘어서 있었다. 문의 형태와 색깔, 재질과 스타일 등 모든 게 달랐지만 문마다 금색 숫자가 써 있는 건 같았다. 그런데 숫자가 순서대로 쓰여 있지 않고 제각각이었다. 5번 옆에 27번이 있고 그 옆에 88번이 있는 식이었다. ‘저 문 안에는 뭐가 있을까?’ 해피와 럭키는 이전의 경험과는 차원이 다른 모험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다는 걸 예감하고 새로운 흥분에 휩싸였다. 앞서 가던 블랑쉬가 홀의 가운데쯤 멈춰서더니 브리핑을 시작했다.
“이곳이 바로 고양이들의 행복연구소입니다.”
“행복연구소?”
해피와 럭키가 마주 보며 동시에 말했다. 블랑쉬는 살짝 미소 짓더니 브리핑을 이어갔다.
“우리 백화점의 비밀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이곳 행복연구소에는 백 개의 행복 샘플이 보관되어 있습니다. 백 명의 연구원이 고양이의 행복에 대해 연구한 결과 엄선된 것들이지요. 아시다시피 우리 고양이들만큼 잠과 꿈에 대해 일가견이 있는 동물도 없을 겁니다. 생의 삼분의 이라는 시간을 잠과 꿈으로 보내니까요. 우리는 그 속에서 또 다른 세상들을 경험하고 서로 영향을 주고 받습니다. 우리 연구소의 수면과학 연구팀은 오랜 연구를 통해 행복 데이터를 확보하고 분석한 결과 아주 힘들게 백 개의 샘플을 만들어냈습니다. 그러니까 여기 있는 백 개의 문 안에 백 개의 행복이 있다는 말씀이지요.”
“백 개의 행복이라고?”
럭키가 탄성을 내질렀다.
“하지만 우리는 그렇게 엄청난 행복을 살 만큼 돈이 없어. 아니 사실을 말하자면 돈이 한 푼도 없는 걸.”
해피가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아,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상품이라는 이름을 쓰지 않고 왜 샘플이라고 표현했겠습니까? 그건 바로 판매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행복이란 값을 매길 수 없는 거고, 그렇기 때문에 상품이 될 수 없는 거죠. 두 분이 여기 오셨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그걸 누릴 자격이 됩니다. 이제 두 분이 선택한 문으로 들어가는 순간 그 행복을 쟁취하게 될 겁니다.”
블랑쉬는 쟁취라는 단어에 특별히 힘을 주어 말했다.
“하지만 매우 신중해야 합니다. 두 분은 각자 단 하나의 문만 골라야 되고 그 선택이 오늘밤 두 분의 여정의 끝이 될 것이기 때문이지요.”
끝이라는 말에 해피와 럭키는 갑자기 마음이 울적해졌다. 모험의 시작은 흥분과 설레임으로 가득했는데 정작 진정한 행복이 그곳에 있다고 하는데도 그리 즐겁지만은 않았다.
“이제 두 분은 스스로 원하는 행복을 찾을 수가 있습니다. 뭘 원하세요? 뭘 해보고 싶으세요? 두 분을 가장 행복하게 하는 건 뭐가 있을까요? 비스포크. 맞춤서비스입니다.”
“맞춤서비스?”
해피가 놀라서 물었다.
“네. 우린 모두 같으면서도 다 다르니까, 그렇기 때문에 행복에 대한 생각과 기대도 다 다를 테니까요. 하지만 좀 걱정스럽긴 합니다. 백 개 샘플 중에 두 분이 찾으시는 행복이 없을까봐. 그렇다면 우리에게 또 많은 연구의 시간이 필요할 테니까요. 가슴이 두근거리네요. 부디 오랜 노력과 연구의 결과가 빛을 볼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랄 뿐입니다.”
해피와 럭키는 당황해서 바로 대답을 못하고 망설였다. 그도 그럴 것이 둘은 행복을 찾아 이곳에 왔지만 정작 진정한 행복이란 무엇일까 진지하게 생각해본 적은 없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지금껏 행복백화점에 와서 경험한 행복만 해도 차고 넘친다는 생각이 들었다. 더 이상 어떤 행복이 있을 수 있을까?
“자, 두 분이 생각하는 행복을 떠올려 보세요.”
해피는 왠지 모르지만 바로 그 순간 바다를 떠올렸다. 바다는 파랗다고 하는데 얼마나 파란지 어떻게 파란지 보고싶어졌다. 집사의 집 거실에 걸린 바다 사진 액자는 해피에게 바다를 꿈꾸게 했다. 집사 가족이 매년 여름 해피를 남겨 놓고 바다에 휴가를 갔다 올 때면 기분 좋은 짠냄새가 났고 사람들은 행복해 보였다. 게다가 해피는 바다의 맛을 좋아했다. 제일 좋아하는 간식이 참치와 연어로 만든 츄르니까. 바다에서 온 물고기 간식을 좋아하는 고양이가 바다를 모른대서야 되나 싶어 해피는 언젠가 바다는 꼭 한번 가봐야겠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그렇다. 한때 산고양이였던 해피는 바다의 고양이가 한번 돼보고 싶었다.
“바다에 한번 가봤으면 좋겠어. 그럼 왠지 행복할 것 같아.”
해피가 꿈을 꾸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바다!”
블랑쉬가 눈을 감고 바다라는 단어를 음미하듯 길게 발음했다. 해피와 럭키는 긴장된 얼굴로 서로를 마주 보며 블랑쉬의 다음 행동을 기다렸다. 해피는 자신의 행복 주문이 너무 터무니없는 것이었을까 하고 잠시 생각했다. 그렇다고 주문을 바꾸고 싶지는 않았다. 바다라는 단어를 내뱉는 순간 자신의 꿈에 더 확신을 갖게 되었기 때문이다.
블랑쉬가 살며시 눈을 떴다. 그리고 해피를 향해 환한 미소를 지었다.
“아주 좋은 생각입니다. 아주 아주 아주 좋은 생각입니다. 바다는 충분히 그럴 만한 가치가 있지요. 모든 생명이 시작되고 끝나는 곳… 아름답고 푸른 바다를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행복해지니까요.”
블랑쉬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해피는 중요한 시험에 통과한 학생처럼 기뻤지만 마음속으로만 크게 환호성을 질렀다. 아직 럭키의 차례가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럭키는 밝은 미소로 해피의 행운을 축하해주었다.
“럭키님은 어떤 행복을 원하시나요?”
당연한 순서였음에도 럭키는 순간 당황을 감추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그리고 상념에 잠긴 듯한 얼굴로 블랑쉬를 바라보더니 작지만 또렷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고향에 한번 가보고 싶어.”
“고향이라면 어디를 말씀하시는지?...”
블랑쉬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페르시아! 그곳에 한번 갈 수 있다면 정말 행복할 것 같아.”
“오, 페르시아!”
블랑쉬가 큰 소리로 외쳤다. 럭키는 블랑쉬의 반응에 별로 놀라지도 않고 최후의 변론을 하는 변호사처럼 아주 차분하게 자신의 행복의 꿈을 펼쳐보이기 시작했다.
“나를 보고 페르시아 고양이라고 하는데… 내 이름도 예전엔 공주였어. 페르시아에서 온 공주라고. 그래서 그런지 나는 페르시아라는 이름만 들어도 왠지 설레고 가슴이 두근거려. 내 친구 칸슈가 말하길 페르시아로 가다 보면 인도라는 나라가 있는데 그곳에 ‘딜쿠샤’라는 아름다운 궁전이 있대. ‘기쁜 마음’이라는 뜻을 지닌 궁전인데 그곳에 한번 가보고 싶어. 그리고 사막을 지나 페르시아 고원으로 가는 거야. 그곳에 하얀 눈이 내렸으면 좋겠어. 내 털처럼 하얀 눈이… 그럼 기쁜 마음으로 여행을 떠날 수 있을 것 같아.”
럭키는 그런 생각을 하고 말로 내뱉는 것만으로도 큰 행복감을 느꼈다. 해피는 그 순간 놀라운 마법을 경험했다. 허름한 주차장의 초라한 고양이는 온데간데없고 하얗고 눈부신 페르시아 고양이가 곁에 있었다. 럭키는 진정 기품 있는 페르시아 공주 그 자체였다.
“정말 멋진 생각입니다! 더 이상 멋진 행복은 없을 것 같습니다.”
블랑쉬가 감격한 목소리로 맞장구를 쳤다. 럭키는 담담하게 미소 지었지만 해피는 기쁨을 감출 수가 없었다. 어쩌면 자신의 행복 주문이 통과된 것보다 더 기뻤다.
“바스테트여신께 감사해야겠습니다. 다행히도 두 분이 꿈꾸는 행복이 이 백 개의 문 중에 있습니다. 바다의 꿈은 7번, 페르시아 궁전의 꿈은 99번. 백 개의 행복 샘플 중에 두 분의 꿈이 있어서 정말 다행입니다. 혹시 아닐까봐 마음이 조마조마했거든요.”
블랑쉬는 두 팔을 모으고 크게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자, 이제 두 분은 각자 선택한 문으로 들어가게 될 겁니다. 그리고 두 분이 원하는 행복을 찾아 떠나게 될 겁니다.”
‘행복을 찾아 떠나게 된다고?’ 떠난다는 말에 해피와 럭키는 가슴이 설레었다. 또 다른 모험이, 더구나 진정한 행복을 찾아가는 여정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다니 이 밤이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 같았다. 아니 끝나지 말았으면 싶었다.
“그럼 전 여기서 이만 인사를 드려야겠습니다. 제 오랜 꿈을 이룰 수 있게 되어 마음이 홀가분합니다. 고행점의 고양이 손님을 정말 오래 기다렸으니까요. 말씀드렸다시피 이곳은 우리만의 비밀의 공간입니다. 오늘 밤 이곳에서 함께 했던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을 잊지 말고 기억해 주세요. 자, 준비들 되셨나요? 서둘러야 합니다. 시간이 많지 않아요. 고양이들이 고행점에 들어온 걸 아는 사람이 생기는 순간 난리가 날 테니까요. 그럼 이만 출발할까요?”
블랑쉬가 확인을 했다.
“잠깐, 그래도 친구와 작별인사 할 시간은 있어야지. 안 그래 해피?”
럭키의 말에 해피도 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럭키와 헤어져 이제 각자의 길로 가야 한다는 게 실감나서 해피는 마음이 착잡했다. 자애로운 눈길로 해피를 바라보던 럭키가 먼저 말을 꺼냈다.
“해피, 고마워. 이렇게 멋진 여행에 나를 초대해 줘서. 오늘은 내 묘생 최고의 날이야. 결코 오늘을 잊지 못할 거야. 지금 당장 세상을 떠난다 해도.”
럭키의 목소리는 차분하면서도 다정했다.
“럭키, 또 그런 말 할 거야?”
해피가 원망스런 얼굴로 럭키를 바라보았다.
“해피, 미안해. 하지만 떠난다는 건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야. 세상 모든 일이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듯이 우리 삶도 마찬가지야. 지난 달 주차장 관리인 집사가 떠났어. 어딘가 아프다고 했는데 곧 돌아온다고 하고는 돌아오지 않았어. 한동안은 내 이마를 지긋이 누르며 쓰다듬어주던 집사의 손길이 얼마나 그리웠는지 몰라. 꿈에도 와주지 않아 야속했는데 어젯밤 꿈에 집사가 와줬어. 이제 떠날 때가 된 것 같아. 오늘 밤 그런 생각에 잠겨 있을 때 네가 나타나 날 이 여행으로 이끌었어. 힘들었지만 난 해냈어. 사실 잘 해낼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거든. 난 지금 너무 행복해. 너 같은 친구를 알게 됐고 상상도 못했던 모험을 하게 됐고 이젠 내가 오랫동안 꿈꿔왔던 행복까지 얻을 수 있게 됐어. 난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고양이야. 어떻게 이보다 더 행복할 수 있겠어! 안 그래, 해피?”
목이 메인 듯 럭키의 작은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럭키의 눈가가 촉촉해지고 있는 걸 본 순간 해피는 갑자기 가슴 한켠이 무너지는 것처럼 아려왔다. 처음 느껴보는 통증에 한동안 아무 말 못하고 럭키를 바라보기만 하던 해피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모험을 떠나길 잘했어. 고행점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멋진 곳이었어. 하지만 혼자였다면 불가능했을 거야. 세상에 뜻을 같이 하는 친구가 있다는 게 얼마나 행복한 일인지 오늘 알게 됐어. 럭키, 네 덕분이야. 이 모험에 함께 해줘서 정말 고마워.”
해피의 목소리도 잔잔하게 떨리고 있었다. 두 고양이의 대화를 지켜보던 블랑쉬가 끼어들었다.
“자, 이제 시간이 됐습니다. 밤은 그리 길지 않으니까요. 푸른 밤을 날아서 우리는 꿈에 그리던 행복을 만나게 될 겁니다.”
블랑쉬가 목소리에 힘을 주어 선언하듯 말했다.
“우린 가는 방향이 달라. 넌 동쪽으로 산을 넘어 푸른 바다로 갈 거고 난 서쪽으로 사막을 지나 페르시아 고원으로 갈 거야. 아직도 왕궁의 벽돌 조각 하나쯤은 어딘가를 굴러다니고 있을지 모르지. 그렇다면 난 먼 옛날 고향의 냄새를 기억해낼지도 몰라.”
럭키가 추억을 더듬는 듯 아련한 눈빛으로 해피를 바라보았다.
“바다는 파랗고 파랗대. 파란 물이 끝없이 펼쳐진 게 바다래. 난 바다의 고양이가 돼서 배를 타고 멀리 멀리 떠날 거야. 배를 타고 온 세상을 돌아다닐 거야. 이 세상 끝까지 가볼 거야.”
해피가 결연하게 다짐을 했다.
“때르르르릉!”
그 순간 사이렌이 울렸다. 밤을 깨우는 무례한 벨소리는 빨리 떠나라는 경고의 알람 같았다. 당황한 블랑쉬가 두 고양이를 재촉했다.
“서둘러야 해요. 누군가 한밤의 침입자가 있다는 걸 알게 된 것 같아요. 곧 비상경계 시스템이 작동하고, 그럼 모든 문이 자동으로 차단될 겁니다. 독 안에 든 쥐 신세가 될 순 없지요. 우린 고양이니까. 자, 서두르세요. 해피님은 저기 돛단배가 그려진 7번, 럭키님은 독수리 문양이 새겨진 99번 문으로 들어가세요. 저는 100번 문으로 들어가겠습니다.”
블랑쉬가 화려한 장미가 조각된 문을 가리켰다.
“잠시만, 궁금한 게 있어. 100번 문 안에는 뭐가 있지?”
궁금한 건 못참는 해피가 물었다.
“음… 백 년 동안의 고독?!”
블랑쉬가 입가에 미소를 띠며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백 년 동안의 고독?”
해피가 믿을 수 없다는 듯 되물었다.
“행복을 꿈꾸려면 나만의 밤과 방이 필요하지요. 고독 속에서 아름다운 창의의 꽃이 피어날 수 있으니까요. 하지만 고양이 행복연구소의 연구는 계속되어야 해요. 이 세상 모든 고양이들이 행복한 그날까지 저는 이 한 몸 바쳐 노력하고 또 노력할 겁니다. 그것이 결국 이 세상을 아름답게 만드는 길일 테니까요.”
“때르르르릉! 때르르르릉!”
블랑쉬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알람이 다시 두 번 울렸다. 모두 마음이 분주해졌다. 자신의 문을 찾아 걸음을 옮기려는 순간 블랑쉬가 두 고양이를 향해 돌아서더니 서둘러 말했다.
“아 참, 한 가지 제가 깜빡 잊고 말씀 안 드린 게 있네요. 두 분이 절대 잊어서는 안 되는 아주 중요한 일입니다.”
해피와 럭키는 긴장한 얼굴로 블랑쉬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저 문 안으로 들어간 순간부터 두 분은 자신의 꿈의 날개에 계속해서 연료를 주입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어느 순간 추락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아시다시피 새로운 모험에는 대가가 따르는 법이니까요.”
“연료라고? 도대체 뭘 어떻게 해야 하는데?”
해피가 당황해서 큰 소리로 물었다.
“아, 너무 걱정은 마세요. 다른 연료는 필요 없으니까. 마음을 계속 불어넣어야 합니다. 바람이 빠지지 않게 마음을 부풀려야 해요. 행복을 꿈꾸는 마음을… 중요한 건 꺾이지 않는 마음이니까요.”
블랑쉬가 빠르게 외쳤다.
“때르르르릉! 때르르르릉! 때르르르릉!”
더 커진 사이렌 소리가 세 번 울렸다.
“자 그럼, 굿나잇! 모두에게 행운을!”
블랑쉬의 외침소리와 함께 세 고양이는 서둘러 각자 자신이 선택한 문 앞으로 걸어갔고 문이 자동으로 열리자 빨려들어가듯 안으로 사라졌다. 그 순간 천장을 덮고 있던 장막이 걷히면서 환한 달빛이 무대 조명처럼 옥상 위에 쏟아져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