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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맑음 Oct 23. 2024

단풍이 지는 날

유맑음 동화#12

 가을바람이 버석한 향기를 몰고 골목을 누볐다. 골목 양옆엔 크고 작은 나무들이 앞뒤 없이 서있었다. 얼마간 내린 가을비에 나무도 땅도 촉촉이 젖었다. 길바닥에는 젖은 낙엽들이 켜켜이 쌓여갔다.

 골목 위 여린 단풍나무에 가랑잎 하나가 살랑였다. 후, 불면 날아갈 듯 잎은 메말라있었다. 빗방울이 가지를 타고 가랑잎 위로 또르르 흘렀다.


 “어맛! 하마터면 떨어질 뻔했네. 빗방울이 제일 위험하다니까. 한시도 방심하면 안 돼.”


 가랑잎이 나뭇가지를 더 힘주어 잡았다. 그럴수록 이파리 끝이 조금씩 오그라들었다. 가랑잎은 길바닥 위에 늘어진 낙엽들을 내려다보았다. 얼룩덜룩하고 너저분했다. 사람들이 밟고 지나간 자국도 선명하게 찍혀있었다.


 ‘으, 저게 무슨 꼴이람. 난 절대 저런 볼품없는 낙엽이 되지 않을 거야. 무슨 수를 써서라도 여기 붙어있을래.’

 가랑잎은 다시금 나뭇가지를 고쳐 잡았다.


 골목 어귀로 누군가 자박자박 걸어왔다. 기다란 빗자루와 쓰레받기를 든 남자였다. 가랑잎은 한눈에 그를 알아보았다. 정갈한 푸른색 와이셔츠에 남색 모자를 쓰고, 머리가 희끗한 남자는 골목길에 나뭇잎이 쌓이면 어김없이 나타났다.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남자가 골목을 쓸기 시작했다. 빗물에 젖어 바닥에 척 붙어있던 낙엽들이 먼지 구르듯 빗자루에 쓸려갔다. 가랑잎은 일순간 숨을 참았다. 자칫 떨어지기라도 하면 저 날카로운 연두색 빗자루 솔에 짓이겨지는 거였다. 이내 낙엽들은 커다란 주황색 쓰레기봉투에 담겼다. 남자는 구둣발로 꽉꽉 눌러가며 비닐 끈을 동여맸다. 낙엽 더미가 담긴 봉투를 구석에 옮겨놓은 그는 유유히 골목을 떠났다.


 가랑잎은 골목 끝에 덜렁 남은 쓰레기봉투를 바라보았다. 주황색 비닐은 낙엽들을 꼭 붉은 단풍처럼 보이게 했다. 함께 아름답게 물들였던 단풍 골목이 떠올랐다. 단풍이 예쁘다며 사진을 찍어가던 사람들이 조금 미워졌다. 가랑잎은 잎사귀 끝을 더욱 오므렸다.


 ‘난 떨어지지 않을 거야…….’


 그때, 가랑잎 옆구리가 근질거리기 시작했다. 누가 계속 간지럽히는 거 같았다.

 “대체 누구야? 성가시게.”

 가랑잎 옆에는 민들레 홀씨 하나가 날리고 있었다.

 “미, 미안! 홀씨를 저리로 날려 보낸다는 게 그만…….”

 가녀린 목소리가 아래쪽에서 들려왔다. 홀씨들을 움켜쥐고 있던 민들레였다. 민들레는 소나무 아래서 겨우 가을비를 피한 모양이었다.

 “흠, 넌 민들레구나? 가을바람 견디기가 쉽지 않지. 나도 나뭇가지에서 떨어지지 않으려고 버티는 중이라.”

 “버틴다니, 왜? 떨어지는 게 나쁜 거야?”

 “당연히 나쁘지. 저길 좀 봐. 더럽고 축축한 쓰레기 신세가 되는 거라고.”

 가랑잎이 주황색 봉투를 가리켜 말했다.

 “하지만 난 겨울까지 붙어있는 단풍잎은 본 적이 없는걸.”

 민들레가 홀씨들을 팔랑이며 말했다. 가랑잎은 기분이 나빠지려 했다.

 “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해. 난데없이 떨어지는 빗방울이나 조심해. 잘못 맞았다간 네 홀씨들이 다 떨어져 나가고 말 거야.”

 “어차피 난 홀씨를 모두 날려 보내야 해.”

 “뭐? 그럼 네 홀씨들이 떨어져야 한다는 말이야?”

 “응, 맞아. 그래야 내가 새로 태어날 수 있거든.”

 민들레가 줄기를 꼿꼿이 세웠다. 시린 가을바람을 온몸으로 맞으려는 듯했다. 홀씨가 날아가는 걸 두려워하지도 않았다. 가랑잎은 한둘 흩어지는 홀씨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러자 문득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민들레야. 부탁이 있어.”

 “응, 뭔데?”

 “홀씨가 날아갈 때 말이야. 네 홀씨에 나도 함께 실어주라. 그럼 지금보다 더 좋은 곳으로 날아갈 수도 있잖아? 저 쓰레기봉투보다야 어디든 낫겠지. 난 곧 죽어도 바닥에 늘어진 낙엽은 되기 싫거든.”


 민들레가 줄기를 조금 구부렸다. 벌써 홀씨는 반이나 떨어져 나갔다. 듬성듬성 홀씨를 매단 얼굴이 휘청거렸다. 야속한 가을바람이 민들레 주변을 씽씽 맴돌았다.


 “얘, 아무래도 다른 방법을 찾는 게 좋겠어. 내 홀씨들은 조만간 모두 날아갈 거야. 마냥 너를 기다려줄 순 없어.”


 민들레는 바람에 홀씨가 뜯겨 나갈 때마다 아파했다. 몸 깊숙이 박힌 씨앗이 빠져나가는 고통을 가랑잎은 알 수 없었다. 아파하면서도 끝내 쓰러지지 않는 민들레를 가만히 지켜보아야만 했다. 마침내 홀씨를 모두 날려 보낸 민들레는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또다시 가랑잎 위로 빗방울이 투둑, 떨어졌다. 가랑잎은 저도 모르게 나뭇가지를 힘껏 부여잡았다.


 ‘이놈의 빗방울! 좀 전에 떨어졌으면 얼마나 좋아? 그럼 벌써 홀씨를 타고 여길 떠났을 텐데.’

 속이 상한 가랑잎은 잎사귀를 더욱 움츠렸다.


 멀리서부터 총총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머리를 양 갈래로 땋은 작은 소녀가 콩콩 뛰며 다가왔다. 한 손에는 알록달록한 가을꽃들을 한 움큼 쥐고 있었다.


 “어! 내가 찾던 코스모스!”

 소녀는 신이 나서 발을 동동 굴렀다. 단풍나무 주위에는 코스모스 몇 송이가 피어 있었다. 그중 가장 영롱한 분홍빛 코스모스가 꽃잎을 부르르 떨며 말했다.


 “저 애는 분명 날 꺾어갈 거야. 뻔하잖아. 꽃다발을 만들려고 하는 거야. 나처럼 예쁜 꽃을 모으고 있는 거라고. 어쩌면 좋지?”

 코스모스가 은근하게 꽃잎을 세우며 말했다. 내심 소녀에게 선택받길 바라는 눈치였다. 당연히 주황색 쓰레기봉투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가랑잎은 조금 샘이 났다. 몇 주 전까지는 가랑잎도 코스모스 못지않게 아름다운 단풍이었다. 어쩌면 꽃다발은 가랑잎 자리였을지도 몰랐다. 저 꽃다발이라면, 가랑잎은 지금 당장 나뭇가지를 놓을 수도 있었다.


 “얘, 코스모스야.”

 소녀는 꽃잎 구경에 젖어 들어 있었다. 가랑잎이 얼른 코스모스를 불렀다.

 “뭐야, 나뭇잎?”

 “부탁이 하나 있는데 말이야.”

 “내가 지금 부탁 들어줄 여유가 없거든? 내 코가 석 자라고.”

 코스모스가 들은 체도 않고 고개를 꼿꼿이 세웠다. 가랑잎은 포기하지 않고 말했다.

 “저 애가 널 꺾어갈 때 나도 같이 데려가 줄래? 내가 나뭇가지를 놓아버리면 네 꽃송이 위로 떨어질 수 있을지도 몰라.”

 “뭐? 말이 되는 소릴 해. 그리고 누가 다 말라가는 나뭇잎을 꽃다발에 쓴다니? 나처럼 예쁜 분홍색도 아니고.”

 “여기 좀 봐. 나 아직 한쪽은 붉은빛이 남아 있어. 꽃다발에 쓰일 수 있을지도 몰라.”

 가랑잎이 이파리 한 부분을 벌렁 내비치며 말했다.

 “뭐라고? 푸하하!”

 분홍빛 코스모스는 꽃잎을 찰랑이며 비웃었다. 그러고는 가랑잎을 흘겨보며 말을 이었다.

 “그래봐야 넌 시든 낙엽일 뿐이야.”

 “하지만…….”

 “쉿! 온다, 온다!”


 꽃을 찾던 소녀가 코스모스 앞에 쪼그려 앉았다.

 “으음, 이게 제일 예쁘다!”


 예상대로 소녀는 분홍빛 코스모스를 골랐다. 꽃잎을 한창 쓰다듬더니 꽃줄기를 똑, 꺾었다. 코스모스는 몹시 고통스러워하며 몸부림을 쳤다. 소녀에게는 그저 살랑이는 꽃 한 송이로 보일 뿐이었다. 소녀는 모아놓은 꽃들을 한 손에 콱 움켜쥐었다. 조촐한 꽃다발이었다. 줄기가 잘린 코스모스는 끈적이는 진액을 뚝뚝 흘렸다. 손에 들려 골목을 돌아나가던 코스모스가 힘없이 웅얼댔다.


 “내가 제일 예뻐……. 예쁘니까 선택받은 거야…….”


 코스모스는 소녀와 함께 골목을 떠났다. 가랑잎 잎자루에 맥이 풀렸다. 어쩐지 나뭇가지를 세게 붙잡을 수가 없었다. 가랑잎은 자꾸만 약해졌다.


 단풍나무 옆에는 우직한 소나무 한 그루가 서 있었다. 거의 말라버린 가랑잎은 솔잎을 쳐다보았다. 기다랗고 뾰족한 솔잎은 사시사철 변함이 없었다. 나뭇가지에 그림자처럼 붙어 멋지게 뻗어있었다.


 “솔잎아, 넌 좋겠다.”

 가랑잎이 나지막이 말했다.

 “나 말이야?”

 솔잎이 갸우뚱하며 대답했다.

 “응, 넌 낙엽이 될 걱정 같은 거 안 해도 되잖아. 눈이 오나 비가 오나, 추우나 더우나 언제든 푸르고 멋지잖아. 나도 소나무에서 태어났으면 좋았을 텐데.”

 가랑잎이 울먹이며 말했다. 솔잎은 그러잖아도 쭉 뻗은 잎을 바짝 곤두세웠다.

 “뭐? 너 아주 배가 불렀구나.”

 “어?”

 “난 세상에서 단풍잎이 제일 부럽다고.”

 “네가 날? 어째서?”

 “사람들은 나더러 강하다고 해. 네 말대로 소나무는 사시사철 변함없으니까. 그런데 사실 난 말이야. 잠시 쉬고 싶어. 늘 푸른 소나무 말고, 한 계절 잠들었다 피는 꽃나무처럼 살고 싶어. 물론 어떤 솔잎은 운 좋게 낙엽이 되기도 해. 난 그걸 기적이라 불러. 소문은 무성하지만, 나에겐 오지 않는 기적.”

 언제나 꼿꼿하던 솔잎이 조금 구부정해 보였다. 가랑잎이 되물었다.


 “낙엽이 되면 저 쓰레기봉투로 들어가고 말 거야. 그래도 낙엽이 되고 싶어?”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아. 다시 피어나면 돼. 잠시 쉬어간다고 생각하면 그렇게 마음 쓰리지 않을 거야.”

 가랑잎은 우거진 솔잎들을 쓱 둘러보았다. 솔잎들은 모두 말라가는 가랑잎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가랑잎 잎자루 끝에 자꾸만 힘이 빠졌다. 나뭇가지를 잡고 있기가 어려웠다.

 “솔잎아.”

 “응.”
  “내가 다시 피어나면 말이야. 그때는 나랑 친구 해줄래?”

 “그래. 어차피 난 늘 여기 있을 테니까. 네가 피어날 때를 기다릴게.”

 “정말이지?”

 “그럼.”


 가랑잎이 구겨진 이파리를 서서히 펼쳤다. 선선한 가을바람이 잎을 감쌌다. 마침내 가랑잎은 나뭇가지를 놓았다. 그네를 탄 듯이 살랑이는 공기를 가르며 천천히, 천천히 떨어졌다.


 시린 겨울이 가고, 어느덧 골목은 고소한 봄 향기로 가득 찼다.

 앙상했던 단풍나무에 초록 잎사귀가 빼꼼 얼굴을 내밀었다. 초록 잎이 찌뿌둥했던 몸을 활짝 피웠다. 초록 잎은 기다렸다는 듯 주위를 둘러보았다. 매서운 겨울을 이겨낸 소나무가 여전히 옆에 있었다. 초록 잎은 솔잎들 사이사이를 살펴보았다.


 “솔잎아, 솔잎아.”


 몇 번이나 불러보아도 익숙한 목소리는 들려오지 않았다. 다른 솔잎들이 초록 잎을 의아하게 바라볼 뿐이었다. 초록 잎이 찾는 솔잎은 그곳에 없었다. 솔잎에게 기적이 일어난 것 같았다. 초록 잎은 슬프지 않았다. 그저 묵묵히 친구를 기다렸다. 붉게 물들어 떨어지고, 떨어지다, 또다시 피어날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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