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에 흙으로 지어진 100년 가까이 된 집에서 살아서 그런지 촌집에 대한 익숙함이 있다. 그렇다고 옛 집이 그립다거나 편했던 것은 아니므로, 집은 물 잘 나오고 가스보일러가 있는 현대식이 편리하다는 것에는 두 말할 필요가 없다.
잠시 학창 시절로 돌아가 보면.
할머니께서 가사 일을 도맡아서 하셨지만 간혹 피곤하셔서 새벽 연탄불을 같지 못했을 때는 방 안에서도 찬 입김을 폴폴 내면서 냉골에서 버텨야 했다. 그래서 초등학교 고학년 때 즈음부터는 눈치가 생겨 불침번을 서듯 추운 겨울에는 연탄불이 꺼지지 않도록 새벽녘에 일어나 연탄을 갈아주었고, 혹여 시간을 놓쳐 불이 꺼지면 번개탄을 넣어 다시 살리느라 눈물을 빼곤 했다. 연탄의 온기가 방으로 전해질 때까지의 시간이 억겁처럼 느껴져서 다시는 연탄 불을 꺼트리지 않겠다 다짐했지만, 그 후로도 종종 연탄불 회생작전은 몇 년간 이어졌다. 연탄불을 때는 흙집은 방바닥은 따뜻하지만 이불 윗 공기는 싸늘해서 항상 볼과 코는 빨갛게 튼다. 때로는 일산화탄소 중독으로 정신이 몽롱했던 날들도 여러 차례 있었지만 다행히 생명에는 지장이 없었다. 씻을 때는 마당 수돗가에 쪼그려 앉아서 꽁꽁 언 세숫대야물에 연탄불에 데워진 물을 조금 덜어서 찬물과 섞은 뒤 고양이 세수법을 연마했던 날들, 마당에는 할머니가 널어놓으신 시래기와 말린 생선들이 일광욕하고, 한 여름에는 큰 고무 대야에 물을 받아서 물놀이를 한 기억도 생생하게 떠오른다.
불편한 촌집으로 돌아가고 싶다.
인생의 반 회차를 넘어서면서 그런 수고스러움과 불편함을 알면서도 촌집 생활이 그리워지는 것은 왜일까.
육체와 정신이 피로한 만큼 꿈 많고 순수했던 시절이 떠올라서 그런 것일까?
이런저런 이유 중에서도 사람들을 피하고 싶어서 멀리 떨어진 집에서 홀로 살고 싶었다. 가능하다면 깊은 산속 오두막 집에서라도 말이다.
그러나 번아웃을 겪는 동안 사회생활을 하지 않아서 그동안 모아둔 돈과 대출로 생활을 이어가고 있었고, 서울에서 2시간 이내 촌집은 찾아봤지만 1억 이하로는 찾을 수가 없어서 밀리고 밀려서 전남, 경북까지 찾아보게 되었다. 당장 가진 돈으로는 괜찮은 시골 주택을 구매하기에는 어림도 없고, 저렴한 촌집들은 토지와 건물 등기가 완전한 물건은 5천만 원이 넘어가니 새삼 집 없는 설움이 더해졌다.
그러다 발견한 2천만 원 대 지상권 촌집
경북지역에는 6.25 이후에 토지를 구매하지 못해서 불법으로 주택을 짓고 산 사람들이 많았고, 그것이 70년 이상 지상권 주택으로 남아있는 곳들이 많았다. 그중에서 마음에 들었던 한 집은, 사진으로 보니 집은 흙으로 지어져서 내가 어릴 적 살았던 100년 넘은 흙집 대비 양호해 보였다. 거주하시던 분이 요양원으로 거처를 옮기게 되어 아들이 지상권 주택을 정리한다며 최근까지 관리를 하던 집이라 컨디션은 가격 대비 괜찮다고 중개인은 추천해서 서울에서 6시간을 운전하여 찾아갔다.
중개인은 일정이 있다며 혼자서 보라고 주소를 알려주었고, 지상권 성립이 30년 정도라고 하지만 아무 걱정 할 것이 없으니 편안하게 보라고 했다. 그 주택은 이미 70년이 지났지만 철거 걱정 없이 살았고, 이런 집들이 무수히 많지만 생각보다 지상권 주택이 위험하지 않다고 강조했다.
현실적으로 자금 여건이 안 되니 토지와 건물 등기 완전한 매매를 할 수 없는 사정이고, 지상권이 인정된다고 하니 그 조건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혼자서 집을 찬찬히 둘러보았다.
매매가 1,800만 원이었지만 1천만 원까지 조정 가능, 1년 토지에 임대 지료는 15만 원 선으로, 월세를 내지 않고 내 집에서 지낼 수 있는 기회. 햇 빛 잘 들고 넓은 마당에 주차공간도 충분해 보였다.
그러나 손이 너무 가는 촌집..
주방에는 몇십 년을 썼을지 모를 반쯤 쓰러져 가는 싱크대가 있었고, 화장실 겸 욕실에는 샤워기도 세면대도 없이 낮은 판자로 되어있었다. 그리고 보일러와 연탄을 사용하는 추운 촌집에 벽 사이 간극이 많이 보여서 위태롭기도 했다. 인프라 형성이 안 되어 있어서 서울 생활과 달리 빨리빨리가 안 되는 불편함도 있겠지만, 중요한 건 바로 입주가 불가능한 상태라 산적해 있는 짐을 폐기시키고 수리를 하다 보면 인건비와 리모델링 비용이 더 많이 들어 머리가 아플 것 같았다.
앞서 말했듯이 촌집 살이에 대한 로망은 없다. 이미 유년기에 지독하게 경험해 보았으니.다만혼자서 치유하며 더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공간을 찾고 싶었다.
그래서 위태로운 집을 뒤로하고 두 번째 집으로 향했다.
내부는 흙으로 되어있지만, 외장이 벽돌로 덧대어진 곳이니 조금 더 튼튼할 것으로 기대하며 가보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