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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비야, 안녕 Ⅰ : 사랑스러운 존재

서로 다른 모양을 하고, 각기 다른 흉터를 지니고, 같은 것을 품는

by 희야 Mar 15.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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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모두 저기 저 먼 바다 끝으로 가요.
아비스마가 당신의 소원을 이뤄줄 거예요.
당신이 그토록 갈망하고 있는 것, 당신의 그것은 무엇인가요?

우리는 모두 아비스마의 섬에 다다르기 위해 끊임없이 헤엄치고 있어요.
그곳에 가면, 행복할 수 있을까요?




01

각양각색의 물고기들이 하나의 무리를 이루고, 한 방향으로 지느러미를 살랑살랑 흔들어댄다. 그리고 그 뒤를 따라 몸을 열심히 꿈틀거리는 내가 있다. 오늘도 우리는 같은 곳을 향해서 헤엄치고 있다. 살랑살랑, 그리고 꿈틀꿈틀….


푸른 하늘 위,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한 해가 강렬한 빛을 뿜어내는 이 시각, 우리는 잠시 지친 몸이 쉬어갈 곳을 찾고 있다. 이렇게 뜨거운 빛이 마구 쏟아지는 때는, 모든 걸 멈추고 잠시 쉬어 가라는 해님의 신호가 전해지는 시간이기 때문이다.

제일 선두로 나아가던 대장 물고기 하나가 어느 동굴 앞에서 헤엄을 멈췄다. 짙은 회색의 크고 작은 바위 조각들이 서로 불규칙하게 맞물려 있는 그 가운데, 커다란 구멍 하나가 뻥 뚫려 있다. 동굴 전체를 이룬 바위 조각들은 맞지도 않는 몸을 어거지로 끼워 맞춘 채, 서로가 서로에게 의지하며 거대한 동굴의 무게를 버텨내고 있다. 그들의 표면은 울퉁불퉁한 흉터로 가득했다. 흉터의 깊이로 느껴지는 오랜 세월의 흔적, 그들이 쌓여 만들어진 거대한 동굴. 경의를 표한다. 거대한 동굴이 아닌, 이를 이루고 있는 수많은 작은 것들에게.

잠시 동굴을 훑어보던 대장 물고기가 퐁당- 소리를 내며 경쾌하게 물속으로 뛰어든다. 뒤따라 모든 물고기가 물속으로 뛰어들고, 그 움직임이 모여 큰 너울이 인다. 고요했던 동굴 입구에 우리만의 물장구질로 손님의 방문을 알린다. 구멍을 지나 어느 정도 안쪽으로 들어가자 공기의 흐름이 바뀌는 것이 느껴진다. 서늘한 기운 속 큰 구멍을 통해 스며들어 오는 약간의 햇빛, 그 빛을 품은 에메랄드 색의 물웅덩이. 휴식을 취하기에 좋은 장소를 찾은 것 같다. 공기는 시원하고, 물색은 아름답구나.


천장이 높다. 맞는 모양이 하나 없던 밖과 달리, 서로가 서로에게 잘 맞물려 있는 동굴 안 그들의 모습. 너희는 제 몸을 깎고 또 깎아내며, 서로에게 모양을 맞춰왔구나. 그렇게 결합을 이뤄냈구나. 몸이 깎이는 고통을 감내하며 지켜내던 것. 그래, 그럴만한 가치가 있는 거 같아.

그들이 지켜낸 에메랄드빛 물속으로 하나둘씩 몸을 담그고, 잠시 눈을 감는다. 아, 평온하다.



02

깜깜한 세상 속, 나 홀로 둥-둥- 떠 있다. 이곳은 빛도, 소음도, 다른 생명체의 숨결조차도 존재하지 않는 곳이다. 하지만 어떤 무형의 것들이 모여, 내 몸을 포근히 감싸 안아 준다. 오롯이 혼자가 되는 시간, 동시에 혼자가 아니게 느껴지는 공간. 이곳은 나만의 안식처이다. 휴식이 필요할 때면 나는 이 공간에서 한동안 시간을 보낸다. 누군가는 어두운 곳이 무섭다고 한다. 하지만 나는 이곳이 좋다.


저기, 친구야!

화들짝 놀라 눈을 떴다. 그러자 시야에 들어온 물고기 하나, 웬 조그만 애가 내 몸에 자기 몸을 딱 붙이고 있는 게 아닌가. 하얀 몸에 검은색 줄무늬가 몇 개나 있고, 등 위로 얇고 긴 깃이 하나 솟아나 있는, 그 뒤로 노란빛을 풍기는 눈이 땡그란 물고기. 생김새가 제법 귀엽다.


으, 응. 무슨 일이야?

다른 물고기와 대화를 해 본 경험이 적은 나는 이 순간이 익숙지 않다. 나한테 왜 말을 건 걸까. 몸은 왜 이리 딱 붙이고 있는 걸까. 심히 부담스럽다.


드디어 깼구나? 놀랐다면 미안해. 쟤네들은 너무 시끄러워서 편히 쉴 수가 없더라고. 조용한 곳을 찾다 보니 여기까지 오게 되었지 뭐야. 참, 내 이름은 ‘나비’야. 넌 이름은 뭐니?
내 이름은.. 마, 말랑이야!

당황해서 아무 말이나 내뱉어 버렸다. 나는 아직 내 이름을 모르기 때문이다. 이름이 있기는 한 건지, 그것도 의문이지만. 몸이 말랑거리니까 말랑이 맞지 뭐. 일단은 말랑이라고 하자.


말랑이? 나는 좀 더 분위기 있는 이름일 줄 알았는데! 안개, 신기루 막 이런 거 있잖아? 반전이긴 하지만, 말랑이도 나름 귀여운 이름인걸. 헤헤-
고마워. 네 이름은 정말 예쁘다. 근데 날 보고 왜 그런 이름이 떠올랐는지.. 물어봐도 될까?
나는 꿈을 꾸고 있었어. 꿈속에서 엄마 얼굴이 보였거든. 그러다 눈을 뜨니까, 저기 뿌옇게 엄마 형상이 보이는 거야. 멀리서 볼 때는 네가 물인지 물고기인지 구분이 안 갔거든. 그냥 수중에 떠 있는 물방울 같은데, 또 뭔가 흐릿한 형상이 보이는 거 같기도 하고.. 그래서 무작정 헤엄쳐 왔어. 가까이 와서 보니까 물고기더라고? 꼭 신기루 같았어. 잠시일지라도 내가 그리는 대상이 되어주니까….

똘망똘망하던 나비의 눈동자가 가느다래진다. 나는 그런 나비의 눈을 바라보았다. 귀엽기는 제가 더 귀엽고, 예쁘기도 제가 더 예쁜데. 그런 나비의 조그마한 입에서 흘러나오는 말들이 썩 나쁘지는 않다. 신기루 같다라. 알고 보면 나는 그런 오묘한 존재인 걸까, 아니면 나비의 사랑스러운 시선이 나에게까지 와 닿은 걸까.


아, 미안. 내가 몸을 너무 딱 붙이고 있었지? 헤헤- 왠지 편안해서 나도 모르게 기대고 있었네.
아냐, 괜찮아. 나는 네가 왠지 좀 슬퍼 보여서….
사실.. 나 아직 엄마가 많이 보고 싶어. 이건 비밀로 해줘. 무리에서 이런 말 하면 바보 취급 받거든. 다들 씩씩하던데.. 나만 아직도 아기처럼 엄마를 생각하나 봐.
어쩌면, 나비가 감정이 풍부한 물고기라 그런 걸지도 몰라. 작은 것도 세심하게 바라보고, 별거 아닌 것도 별것이 되게 하고.. 넌 특별해. 걔네는 걔네고, 너는 너야. 나랑 너랑도 이렇게 다른 것처럼 말이지.

별소리를 다 한다. 주제넘은 소리였을까? 속으로 오만가지 생각을 하며, 이리저리 눈알을 굴리고 있는 나다. 나비의 또렷한 시선에 내 볼때기가 뚫릴 것 같기 때문이다. 더욱 땡그래진 나비의 눈동자가, 나를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다. 얘는 물고기를 당황하게 하는 재주가 있는 게 틀림없다. 계속해서 느껴지는 부담스러운 나비의 시선, 그 사이를 가르고 들어오는 날카로운 휘파람 소리. 휴식을 끝마칠 시간이다.


고마워 말랑아. 나 요즘 꽤 지쳤었거든. 근데 네 덕에 계속 헤엄칠 힘이 생겼어. 우리 친구 된 거 맞지? 나중에 만나면 인사하기다? 아휴 이러다 또 혼나겠다, 먼저 가볼게. 말랑아, 안녕!

내가 할 말을 제가 다 해버리는 나비.

마음속으로 조심스레 읊조려 본다.

'나비야, 안녕'



03

세상의 만물을 환하게 밝혀주는 해님도 때로는 너무 뜨거울 때가 있다.

살이 베일 듯 날카로운 바위 조각들은, 누군가에겐 평온한 안식처가 되어주기도 한다.

사랑스러운 존재는 별일 없이 사랑스러워서 억센 상처가 어울리지 않는다. 그러기를 바란다.

기괴하게 생긴 존재는, 사실 기괴하지 않을 수도 있다.


우리는 그렇게 맞물려있다.

전혀 맞물릴 수 없을 것 같이 서로 다른 모양을 하고,

제각기 다른 모양의 흉터를 지니고,

울퉁불퉁한 표면 아래에, 에메랄드빛 물웅덩이를 숨긴 채.


우리는 무얼 지켜내려 했던 걸까.

우리가 이토록 지켜내고자 하는 게 뭘까.

어쩌면 비슷할지도 몰라.

모양은 다르지만, 같은 것을 품고 있는 저 동굴처럼.


뜨거운 햇빛을 막아주는 안식처, 서늘한 공기로 가득 찬 거대한 바위 동굴.

세상의 소음이 닿지 않는 듯한 고요 속에서, 더없이 안락한 휴식의 시간을 보내고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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