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유한 본질을 지닌 존재, 혹은 본래의 것에 닿지 못한 불완전한 존재
"햇빛을 따라가면 바다 끝이 나온대. 바다 끝 저 너머에는 영원히 해가 들지 않는 작은 섬이 있는데, 그 안에 살고 있는 인어를 찾아가면 소원을 들어준대. 인어의 머리칼은 해가 뜨기 전 새벽녘의 바다처럼 파랗고, 살결은 해를 한 번도 보지 않은 것처럼 새하얗대. 그녀의 이름은 아비스마야. 그녀가 너를 데려다줄 거야, 네가 그리는 꿈의 세계로. 아비스마를 찾아가 봐."
01
바다 아래로 수많은 물고기들이 연신 몸을 살랑거리며 헤엄치고 있다. 은빛 비늘을 가진 물고기, 노란색 줄무늬를 가진 물고기, 풍성한 지느러미와 꼬리가 천사의 날개처럼 펄럭이는 물고기. 모두 제각기 다른 형상을 이루고 있다. 그들은 물면 위로 폴짝- 뛰어오르기도 하고, 그럴 때마다 햇빛을 받아 반짝거리는 비늘을 뽐내며 바다 안에서 마음껏 흔들리기도 하고 또, 몸을 팔딱이며 있는 힘껏 헤엄치기도 한다. 그런 수많은 몸짓이 모여 하나의 큰 파도를 이룬다. 바다를 수놓은 물고기들의 향연. 이런 걸 고유한 본질의 실체라 하는 것일까.
나는 실체가 없다. 아니, 나 자신이 인정할 수 있을 만한 고유성이 없는 존재라 해야 할까. 나에게는 둘 다 비슷한 의미로 느껴진다. 나는 아무 색도 없다. 멀겋고 투명해서 아무런 색채도 나지 않는다. 그렇다고 유리알처럼 투명한 것도 아니다. 약간의 더러운 불순물이 섞여, 미처 맑음에 도달하지 못한 물처럼 혼탁하다. 그래서 여느 물고기처럼 햇빛을 받아 몸을 반짝거릴 수도 없다. 그 정도면 다행이다. 이 애매한 투명함은 내가 감추고 싶은 것까지 다 드러내게 한다. 이를테면 딱히 아름답지도 않은 나의 장기들, 남들보다 유독 큰 뇌, 그리고 가장 문제인 이 거북스러운 외형.
껍질은 또 어떤가. 탄력이 부족하여 남들처럼 팽팽하게 끌어당겨지지 못한 채 축- 흘러내리는 피부. 그런 것이라도 감싸안아 주기 위해 어떤 형태도 이루지 못하고 늘어진 껍질. 자기들끼리 그런 몸을 몇 겹씩 겹치고 온기를 내어주고 있는 걸 보면, 그들은 서로의 갸륵함을 아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누군가는 그것조차도 아니꼬운지, 몇 겹씩 겹쳐진 껍질 사이로 미끄덩거리는 이상한 액체가 흘러나오게 했다. 이게 무엇인지 알 수는 없지만 햇빛을 받으면 액체의 양이 늘어나는 걸로 봐서, 나는 햇빛을 많이 받으면 안 되는 몸이라는 걸 알았다. 그래서 나는 하루에 딱 두 번만 물면 위를 오른다. 하늘 정 가운데 가장 높은 곳, 그곳으로 힘차게 떠오른 해가 바다를 황금빛으로 물들일 때. 급히 떨어지는 해가 몇 방울 흘린 색에, 온 바다가 주황빛으로 번져갈 때. 이때의 해가 가장 아름답고, 찬란하고, 나의 고독감을 옅어지게 하는 시간이다. 저렇게 눈이 부시도록 찬란한 빛을 내뿜는 해님도, 매일 저녁이 되면 본연의 모습이 드러나는 게 두려워 바닷으로 곤두박질치기 때문이다. 내 눈에는 황금색의 해도, 주황색의 해도 아름답지만 말이다. 그렇게, 나는 견뎌내고 있다. 홀로 외로이 바닷속을 표류하는, 길고 긴 이 삶의 여정을.
02
나는 언제나 혼자였다. 이 곤란한 몸뚱이도 그렇지만, 무엇 하나 남들과 비슷한 구석이 없는 존재는 어느 무리에도 낄 수 없는 것이 통상적인 일이 아니겠는가. 그것이 당연한 세상의 이치이다. 이해할 수 없어도 납득해야 하는 실지이다. 그중 가장 곤란한 것은 나의 느린 움직임이다. 속도를 내보려 해도 도무지 빨라지지가 않는다. 내 딴에는 빨리 헤엄친다고 해도, 남들과 비교하면 확연히 느린 건 어쩔 수 없다. 나라도 답답해서 같이는 못 가겠다. 다들 한시가 바쁜 친구들이니.
그들은 모두 같은 곳을 향하고 있다. 그들이 각자 무엇을 원하고 있는지는 모르겠다. 다만 무언가 귀중한 소망을 품고 있는 건 분명하다. 그러니 그곳으로 향하는 거겠지. 그곳은 불가능이 존재하지 않는 곳이니까.
어디선가 들었다. 원하는 건 무엇이든 이루어주는 곳이 있다고. 간절히 원하기만 하면 말이다. 정말? 그런 곳이 있을까. 처음에는 믿지 않았다. 이 세상에 그런 힘이 있다면 왜 애초에 그걸 주지 않았는지. 이 미약한 숨결이 언제까지 이어질지도 모르는데, 이왕이면 세상에 첫 호흡을 내뱉을 때부터 쥐여주면 좋잖아. 그럼 품에 꼭 껴안고 해님을 향해 활짝 웃어 보였을 텐데. 그렇게 생각했다.
그들도 완벽히 믿는 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그저, 간절히 바라는 것이 있어서, 꼭 이뤄졌으면 하는 것이 있어서. 그래서 그 실낱같은 희망을 품고 온 힘을 다해 헤엄치고 있는 것이다. 그걸 깨닫고 나니 왠지 크게 외롭지는 않았다. 그들도 나처럼 무언가를 간절히 원하고 있구나. 얼마나 절실하면 실재하는지도 모르는 곳에 다다르기 위해 일생을 쏟아붓고 있는 걸까. 너희도, 그리고 나도.
'나는 말이지, 언젠가 보았어. 황금빛 바다를 헤엄치는 고래들의 영롱한 몸짓을. 한 번쯤은 그렇게 살아보고 싶었어. 안되는 걸 알면서도, 자꾸만 마음 한편에서 스멀스멀 기어 올라와. 깊숙한 곳에서부터 피어오른 뿌연 연기가 머릿속을 가득 채우면, 그 사이로 희끗희끗하게 보일 때가 있어. 유유히 바닷속을 떠다니며, 찬연하게 빛나는 물고기 하나가.'
꿈꾸는 건 죄가 아니다. 그래서 언제부턴가 나도 꿈을 꾸기 시작했다. 진실인지 거짓인지 알 게 뭐람. 진실이면 좋은 거고, 거짓이면 깨끗하게 포기하고 아무렇게나 살면 그만이지. 뭐가 됐든 지금보다는 나아.
그렇게 나는 단춧구멍만 한 눈알을 또렷이 뜬 채 그곳을 향해 헤엄쳐 갔다. 속도는 느리다. 그렇지만 부단히 나아갔다. 짧은 지느러미를 연거푸 휘저어대고, 늘어진 몸뚱이를 뒤뚱거리면서, 끊임없이 헤엄쳤다. 계속해서, 계속, 계속….
03
나는 특별한 존재인 건가요? 이건 내가 진정 완전(完全)한 실체인지, 아니면 본래의 것에 닿지 못한 불완전(不完全)한 존재인지에 대한 물음이에요. 불완전한 존재라면, 나를 왜 세상에 내보내셨나요? 이건 불공평하잖아요. 묵묵히 있으니 괜찮아 보이나요? 아뇨, 전혀 괜찮지 않아요. 거룩하지 않은 건 없다고요? 글쎄요. 이 넓고 깊은 바다에서, 나 하나 사라진다고 무슨 일이 생기긴 하나요? 나도 행복하고 싶어요. 나도 그들처럼 헤엄치고 싶어요. 나도 그들처럼 빛나고 싶어요. 사실 행복이란 게 뭔지 잘 모르겠어요. 그래서 가보려고요. 그곳으로.
모든 걸 가능케 하는 환상의 세계, 아비스마의 섬.
나는 아비스마를 만나러 가기 위한 길고 긴, 그 외로운 항해의 여정을 떠나고 있다.